125화
* * *
“제의를 수락하겠습니다.”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로서 데일이 쌓아 올린 사상의 결정체. 작센의 ‘검은 공자’가 망설임 없이 그의 세계를 드러냈다.
청색과 흑색의 장미들이 흩날리고 있는 꽃밭을 마주하며, 희고 어두운 겨울밤 위로 칠흑의 성채가 우뚝 솟아올랐다.
달리 그녀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알기 쉬운 색깔론이었다. 적어도 티타니아의 세계에는 ‘제국과 황실의 색’이 없다. 설령 그녀가 교묘하게 황실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 할지라도 그것이 곧 황제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 정도로 마법사의 세계에서 색이 갖는 의미는 중대했다. 당장 데일이 펼치고 있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무엇보다도,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곧 데일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장 데일의 앞에 있는 티타니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으로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는 동등해졌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들어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고독의 성채에 군림하는 성주로서.
“참으로…… 공자님의 이명에 걸맞은 풍경을 하고 있네요.”
시린 냉기와 고독의 지평을 향해, 티타니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아이가 어째서 그토록 작센의 ‘검은 공자’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비로소 좀 이해가 되네요.”
“그 아이?”
“수정 여왕의 총명한 어린 딸이지요. 혹은 지혜로운 요정 ‘세피아’라고 불러야 할까요?”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순, 희고 어두운 겨울밤을 따라 냉기와 어둠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동요가 그치고 나서는, 마법사로서의 냉정함이 자리를 잡았다.
“달리 세피아 님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러는 데일 공자님께서는 얼마나 그 아이에 대해 알고 있나요?”
티타니아가 되물었다.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스노우 엘프, 추방자, 청색 마탑의 장로.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전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티타니아가 화제를 돌린다.
“나아가 데일 공자님께서 이렇게 저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표를 보여주신 이상, 우리 역시 사실을 고할 수밖에 없겠네요.”
티타니아가 말을 잇는다.
“부디 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 주세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요크 가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대의’를 수행하기 위해 출혈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지요.”
“……설마.”
바로 그 설마였다.
“그래요, 랭커스터 가에 맞서 영지전을 감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소속되어 있는 조직의 뜻, 다시 말해서.”
“청색 마탑입니까?”
불살과 조화를 중시하는 청색의 마탑. 그러나 제국의 폭정과 적색 마탑의 압박 속에서도 기이할 정도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침묵의 탑.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저희는 청색의 뜻을 계승하는 데일 공자님을 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청색의 뜻을 계승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살과 조화의 청색 마탑. 그 점에서 ‘살육의 재능’을 가진 데일의 존재는 청탑의 상극이나 다름없으니까.
“후후, 제가 보기에는 데일 공자님이야말로 ‘가장 유력한 청색 마탑의 후계자 중 하나’로 보이는데요.”
티타니아가 뜻밖의 말을 입에 담았다.
“아직도 청색이 불살과 조화를 추구하는 동화 속의 색처럼 보이시나요?”
그 무엇보다 청색의 지혜에 깊이 도달하고 있는 데일이기에 알 수 있는 물음이었다. 이어질 대답 역시도.
“모략과 거짓.”
“…….”
“그것이 바로 우리 ‘청색 마탑’의 실체이자, 우리가 가지는 지혜의 원천입니다.”
일찍이 백청의 장미를 내세우고 있는 요크 가의 실체가 그러하듯이. 모략과 거짓의 대가들. 그러나 데일 역시 다르지 않다. 그 점에 있어 데일과 청색 마탑이 생각하는 ‘지혜’는 오히려 놀랄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청색 마탑이 침묵을 깨트렸다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요. 저희는 늘 침묵하고 있답니다.”
티타니아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웃었다. 동시에, 티타니아의 등 뒤로 청색 장미의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까?”
“이미 데일 공자님께서는 우리 청색 마탑의 ‘외부자’가 아니니까요.”
티타니아가 말했다.
“우요(愚妖) 세피아는 나름의 지혜로 훌륭하게 그녀의 임무를 수행해 주었습니다. 설령 그녀가 자기의 소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어리석은 요정, 세피아. 그녀의 임무. 일순 머릿속의 조각들을 짜 맞춘 데일의 표정에 동요가 어렸다.
데일의 등 뒤로 시린 냉기와 어둠이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세계를 집어삼킬 듯이 요동치고 있다.
“세피아 님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습니까?”
데일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감추지 않고 되물었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주 작은 ‘암시’를 주었을 따름이지요.”
“당장 그 내용을 말하십시오.”
“아, 딱히 숨길 것도 없을 정도로 별것도 아니랍니다.”
어느덧 시린 냉기의 지평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흑색의 후계자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그 마음에 부응하라.”
“……!”
그 말을 듣자마자 데일에게 일말의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100%의 신뢰를 위해 존재해야 할 데일의 세계가, 어느덧 전력으로 적을 배제하기 위한 무기로써 탈바꿈했다.
두 세계가 맞물린 경계에서, 죽음의 기사들이 일제히 쇄도했다. 데일 역시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검과 총알을 내리꽂았다. 냉기와 어둠의 포화가 티타니아를 향해 휘몰아쳤다.
동시에 그녀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흑청의 장미 잎사귀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아가 장미의 줄기들이 촉수처럼 솟아올라 데스나이트를 휘감고, 뾰족하게 솟은 가시를 내리꽂았다.
데일 역시 그 자리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그림자 망토를 흩날리며 ‘티타니아의 세계’ 속으로 쇄도했고, 흑청의 장미와 가시 줄기들이 데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망설일 것은 없었다. 그림자 망토의 칼날이 휘몰아쳤고, 장미 잎사귀가 가을 낙엽처럼 덧없이 스러졌다.
거리가 좁혀졌다. 어느덧 칠흑의 마검 ‘기아’가 티타니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대의 지혜가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거란 사실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습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어디까지나 공자님의 신뢰에 부응할 따름이랍니다.”
티타니아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세피아 님이, 처음부터 청색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겁니까?”
“그녀가 정식으로 ‘소서리스 의회’에 입회하지 못하는 이상, 설령 탑의 장로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 없지요.”
소서리스 의회. 그것이 바로 티타니아가 말하는 ‘모략과 거짓’의 청색 마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에 소속하지 못하는 자들로서는, 청색 마탑이 그저 ‘불살과 조화’를 상징하는 탑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의회의 꼭두각시로 기동하는 것이리라.
그녀의 말로 미루어, 청색 마탑의 구조에 대해서는 데일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티타니아가 말을 잇는다.
“세피아 님이 ‘수정의 땅’에서 추방되어 속세에 떨어질 때, 그녀를 거두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것도 청색 마탑의 결정이니까요.”
“꼭두각시로서의 가치를 헤아리고 내밀어준 결정이겠지요.”
“공자님께서는 엘프 사회에서 추방되는 엘프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시나요?”
“산의 암살자(Hashishin)…….”
사막의 다크 엘프들로 이루어져 속세의 ‘추방자’들을 숙청하는 엘프 사회의 비밀 조직.
“산상노파와 거래해 세피아 님의 무사를 보증해준 것 역시, 청색 마탑의 결정이었답니다. 적어도 그녀는 우리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는 셈이지요.”
세피아의 빚. 데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청색 마탑이 그녀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 사실을 저에게 고하는 진의가 무엇입니까?”
“우리 청색 마탑이, 공자님과 흑색 마탑의 적이 아니란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따름이랍니다. 그저 미하일 공자님이 ‘랭커스터 가의 후계’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지요.”
“처음부터 후계자가 될 리처드 공자님을 홀린 것은 요크의 요녀들이 아니었습니까.”
“어머, 랭커스터 대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티타니아가 참으로 우습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비록 우리가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 할지라도, 지혜는 결코 우리 청색 마탑 하나의 독점 상품이 아니지요.”
“…….”
“애초에 저의 딸 마가릿과 랭커스터 가의 장남, 리처드 사이에 혼약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리처드 랭커스터는 이미 적색 마탑의 사술(邪術)에 의해 세뇌당해, 제대로 사고조차 할 수 없는 불구입니다. 자기가 ‘요크의 마가릿과 혼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멋대로 믿고, 홀몸으로 우리 영지를 찾아왔지요.”
티타니아가 말을 잇는다.
“그렇기에 저희 요크 가가 랭커스터 가를 상대로 후계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을 경우, 우리 요크 가는 고스란히 랭커스터 가의 장남을 세뇌하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멸문(滅門)의 길을 걸을 겁니다.”
“…….”
“그렇기에 청색 마탑의 ‘소서리스 의회’는 요크 가를 지키기 위한 제 뜻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처음부터 랭커스터 대공이 그것을 노렸다는 겁니까?”
“아니요, 유감스럽게도 랭커스터 대공 역시 이 무대 위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지요.”
“그럼 대체 누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비로소 데일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미하일 랭커스터.”
불과 빛의 사도.
차남(次男)의 몸으로 랭커스터 가의 후계자가 될 정도의 실력자. 그리고 그 지위를 손에 넣은 것은 결코 고결함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
무심코, 데일이 딛고 있는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요크 가의 티타니아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차남의 몸으로 랭커스터 대공의 자리를 잇기 위한 미하일의 노림수’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그녀의 뒤에 있는 청색 마탑의 진짜 모습을 고백하고 신뢰의 증거로 내밀었다.
동시에 미하일 랭커스터 역시 데일에게 손을 내밀고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까. 물밑에서 펼쳐지고 있는 암투(暗鬪)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무심코 작센 자작성에서 미하일이 보여준 아바타와 그가 믿어 의심치 않는 ‘평화’에 대해 떠올렸다.
─ 이계의 용사가 이 세계에 얼마나 커다란 피를 흘리게 했는지,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 평화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는 평화 따위가,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처음부터 나는 미하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나?’
침묵 끝에, 데일이 티타니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저의 신뢰를 얻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답니다.”
“지금부터 저에게, 청색 마탑의 ‘침묵’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십시오. 그대들의 목적, 그대들의 조직, 그대들이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 침묵을 지키며 행하고 있는 임무들에 대해서 무엇 하나 남김없이. 설령 조금이라도 부족할 경우…….”
데일이 말했다. 어느 쪽을 신뢰할지는 전적으로 그 뒤의 일이 될 테니까.
“저는 저의 ‘지혜’를 철저하게 랭커스터 가를 위해 아끼지 않으리라 맹세할 겁니다.”
“역시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지요.”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서로의 마음’을 허락하고 있는 마법사들의 세계 속이다. 알량하기 그지없는 거짓 따위로 무마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티타니아의 심상을 상징하는 흑청의 장미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말했듯이, 적당한 거짓말로 저를 회유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나아가 데일이 알고 있는 ‘용사로서의 지식’ 역시 결코 얕은 것이 아니다. 설령 이 세상의 역사와 전부를 알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티타니아의 말에 갖는 사리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는 있었으니까.
제국의 사냥개로서 그가 알고 있는 제국의 치부와 진실들.
“저 역시 적당한 거짓말로 ‘검은 공자’를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답니다.”
비로소, 티타니아의 입에서 데일이 그토록 기다린 제국의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백적청녹, 오색의 마탑.
다섯 가지 색의 마탑과 별개로 북부 고위 마족들이 쌓아 올린 그림자의 탑과 더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데일의 적이자 제국이란 이름의 용, 그리고 그 용의 심장에 존재하는 황가의 색.
황금의 마탑(Tower of Gold)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