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24화 (124/301)

124화

* * *

그로부터 얼마 후, 랭커스터 공작성에 ‘검은 공자’가 승전보를 가지고 왔다.

몇 발자국 앞서 데일의 전령이 그 소식을 보고했을 때, 대공 가의 수뇌들은 그들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성 막달레나 기병대를 몰살하고, 브란덴부르크 백작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주 일순이나마, 철없는 어린아이의 허풍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보잘것없는 잡병들의 무리를 소탕하고 전과를 부풀리는 것은 전쟁에서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처음 데일이 홀로 소수의 기사를 이끌고 ‘공작령의 순찰’을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 랭커스터 가의 수뇌들로서는 천하의 ‘검은 공자’에 대해 떠들어대는 허풍의 실체를 깨달은 듯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외려 작센 가의 장남이 이토록 중요한 상황에서 멋대로 나서는 것을 우려하고 제지하려 들 정도였으니까.

‘여기서는 데일 공자님을 믿어보도록 하지요.’

마지막까지 데일의 의지를 존중해준 것은 랭커스터 가의 차남, 미하일의 몫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랭커스터 공작성의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결과. 다시 말해, 랭커스터 가의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영지 외부의 전력’을 이용한 기습이었다.

그림자 법정, 제국 제일의 암살자 조직…… 설령 제국 유수의 대제후들이 격돌하는 전장 속에서도 암행(暗行) 작전이 가능한 실력자들이기에 낼 수 있는 결과물.

쿠웅!

성검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이제는 성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존재로 떨어져서.

자기 힘으로 몇 발자국조차 걸을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어, 데일이 거느린 밤까마귀 기사들의 포박에 강제로 성내에 내동댕이쳐졌다. 제국의 다섯 전쟁 영웅 중 하나라고 믿을 수 없는 참혹한 풍경이었다.

“브, 브란덴부르크 대백!”

그 모습을 두고 랭커스터 가의 가신들조차 놀라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행위다. 그러나 상대 세력의 절멸을 각오하는 총력전이 아니고서야, 이 세계에서 ‘고귀한 피’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리 통용되지 않는 규칙이었다.

기사나 귀족이 포로로 사로잡힐 경우, 그의 직위에 맞는 정중한 대우와 함께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의미 없이 귀족을 죽이고 증오를 사는 것보다, 살린 채로 정중하게 대우하며 훗날을 도모하는 게 이득일 테니까.

그러나 ‘검은 공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검의 육체 곳곳에 살수들의 암기가 무참하게 내리그어져,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

“제, 제국의 전쟁 영웅에게 어쩜 이토록 잔혹한 처사를!”

“감히 있을 수 없는 무례입니다!”

랭커스터 가의 가신 귀족들이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나같이 ‘제국의 전쟁 영웅’에 대해 걱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께서는 도대체 어느 제후에게 충성하는 가신입니까?”

“이것은 충성의 문제가 아니오! 포로를 존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전통……!”

“제국의 전통이라고 하셨습니까?”

랭커스터 가의 가신 귀족 하나가 숨을 삼켰다.

“공께서는 그 자랑스러운 제국의 전통에 따라, 이대로 대공 각하의 뜻을 무시하고 장남을 후계에 세우실 셈입니까?”

“아,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귀족 하나가 당혹스럽게 말을 흐렸고, 바로 그때였다.

“그쯤 하라.”

침묵 끝에, 옥좌에 앉아 있는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입을 열었다. 장내의 소요를 압도하는 무게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작센의 어린 후계자여,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알고 있나?”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천검의 물음 앞에서,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랭커스터 공작 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강자를 사로잡아, 대공 각하의 앞에 대령했지요.”

“성검을 향한 그 무례하고 잔혹한 행위가, 훗날 작센 가에 가져올 여파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냐?”

“아,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성검 뒤랑달’은 이미 이 세상의 검이 아니니까요.”

“……!”

“훗날 자매신의 계시를 받은 대장장이가 ‘또 하나의 성검’을 벼린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남자의 손에 들릴 일은 없겠지요.”

장내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성검은 부러졌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손상 끝에 소멸했습니다. 따라서 백작 각하께서는 더 이상 ‘성검사’가 아니지요.”

무릎 꿇고 있는 백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깨물고 나서, 힘없이 중얼거린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공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초대 백색 마탑주의 성유물을 훼손해버린 이상, 교회가 잠자코 있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감수하는 것은 제 몫이 될 겁니다. 성검을 쓰러뜨린 것은 오롯이 저 하나의 책임이니까요.”

“공과 과 모두를 가져가겠다는 것이냐?”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되물었다. 날카로웠다.

“그렇습니다.”

성검과 그 휘하의 성 막달레나 기병대를 쓰러뜨린 것은 오롯이 ‘데일의 책임’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천하의 성검을 쓰러뜨린 무명(武名)과 승리 역시 오롯이 ‘검은 공자’의 것이 될 거란 소리다.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아가 그것은 능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좋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천검이 말을 잇는다.

“사로잡은 포로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센 가’의 뜻에 일임할 것이다.”

“……!”

“대공 각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천검은 사리를 아는 자였다.

이로써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적 하나가, 오롯이 데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국이란 나라는 거대한 용과 같고, 데일은 이제 막 용의 꼬리를 잘라냈을 따름이니까.

* * *

─ 이 남자를 ‘법정’으로 옮겨라.

포로로서 성검사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센 가의 책임이 됐고, 그렇기에 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림자 법정.

랭커스터 공작령 내에, 아군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터를 잡은 그곳에 ‘그림자 군주’가 있었다.

“허허, 쉬펄. 영웅 팔자 좆도 없네.”

‘그림자 군주’의 곁에서, 살검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지하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쇠창살 속에서, 일찍이 ‘성검사’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놈…… 작센의 괴물 놈이……!”

작센의 괴물.

“지금부터 백작님이 처하게 될 미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공식적으로 백작께서는 아직 ‘성검의 이명’을 갖고 있으며, 그 이름의 무게를 대가로 백작 가에 ‘거액의 몸값’을 요청할 겁니다.”

“……!”

“설령 천하의 브란덴부르크 대백이라 하더라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액수겠지요.”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그러나 백작님의 아들, 필립 공자님께서 달리 결정의 여지가 있을까요?”

“네, 네놈이 감히……!”

“가문의 기둥, 자랑스러운 아버지, 바로 그 성검을 위해 ‘지불해야 할 희생’ 같은 것은 참으로 사소한 액수에 불과하겠지요. 설령 그것이 천금(千金)의 액수라 하더라도.”

“……!”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고, 성검사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자기 몸 하나 가눌 수 없는 불구의 육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게다가 체내의 장기마저 엉망으로 망가져, 오러의 힘조차 쓸 수 없는 기사.

데일이 의미하는 ‘힘줄’이란 것은 말 그대로의 힘줄이 다가 아니었다.

기사의 힘줄, 오러 하트의 이름을 가진 체내의 장기 역시 예외일 수 없었으니까.

이 정도의 피해를 돌이키는 것은 설령 백색 마탑주의 치유 마법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하다.

마스터 바로의 말마따나, 제국의 자랑스러운 전쟁 영웅치고는 참으로 별것 없는 결말이었다.

일찍이 ‘이계의 용사’가 그러했듯이.

* * *

그 직후. 요크 후작 가에 사절이 도착했다.

랭커스터 대공 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센 공작 가의 이름’을 내걸고서.

포로로 사로잡은 성검의 처우와 더불어, 요크 가와 작센 가 사이의 회담을 요청하겠다는 제의였다.

* * *

요크의 티타니아.

공식적으로 ‘요크 후작의 아내’로서 가문을 보좌하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처. 그러나 내막을 알고 있는 자들이 그녀를 부를 때의 이름은 달리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트리스.”

“…….”

데일이 그 이름을 불렀고, 그러나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동요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세월의 층첩조차 어쩌지 못하는 미모와 기품 속에서 우아하게 부채질을 할 따름이다.

“아, 작센의 귀여운 공자님께서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네요.”

티타니아와 그녀가 총애하는 요크 가의 총명한 딸들이 그곳에 있었다. 마가릿과 캐서린, 그 외에도 다섯 명의 어린 영애들이. 흑색의 잔혹함과 청색의 지혜를 가진 자매들.

“굳이 그이가 아니라 저와 ‘회담’을 요청하신 까닭을 달리 물어도 될까요?”

“두 자루의 칠검이 이쪽에 있고, 그쪽에 있는 것은 하나의 칠검이지요.”

“살검과 그림자 법정이 ‘검은 공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네요.”

티타니아가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미 규격 외 강자들이 이루고 있는 ‘힘의 저울추’가 무너졌습니다.”

비대칭 전력(Asymmetric Force).

과거의 세계에서는 핵무기 등을 비롯해 각종 ‘전략 무기’의 영역에 속하는 규격 외 전력. 그것이 이 세계에서 칠검이나 오색 마탑주를 비롯한 ‘규격 외 강자’들이 갖는 존재의 무게다.

“요크 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부디 이쯤에서 항복하고 물러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카드에서 우위를 확보한 이상, 꼭 전투로 결착을 낼 필요는 없다.

“설령 후계 자리를 잇지는 못할지라도, 대공께서는 리처드 공자님과 마가릿 양의 혼약을 유지할 용의가 있으십니다. 이 이상 싸움을 지속해도 커다란 의미는 없겠지요.”

“역시 ‘검은 공자’의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네요.”

요크의 티타니아가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제 수락을 듣는 즉시, 리처드 공자님과 마가릿 양의 혼약 유지를 카드로 랭커스터 대공에게 종전(終戰) 협상을 할 셈이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

데일이 짐짓 평정을 유지하며 미소 지었다. 티타니아의 지적대로였다. 데일과 랭커스터 대공 사이에는 아무런 협약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철저하게 요크 가를 꼬드기기 위한 데일의 블러핑이었으니까.

그렇게 요크 가와 협상을 받아내고, 그 협상을 바탕으로 대공을 설득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 그것이 데일이 노리고 있는 회담의 목표였다.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이 전쟁을 끝낼 용의가 없답니다.”

“강자들 사이의 저울추가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도 말입니까?”

“성검이 이렇게나 빨리 쓰러진 것은, 저로서도 예상 밖의 일이었지요.”

티타니아가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란 것은 강자들의 존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설령 그렇다고 할 경우, 이런 거창한 갑주나 검, 병사와 병법 따위가 무엇 하러 존재할까요? 그저 강자 사이의 결투 하나로 승부를 결정짓는 게 낫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것을 참고, 데일이 되물었다.

“달리 믿으시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가령…….”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동시에 일대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데일과 티타니아, 오직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이계(異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사상의 세계……!’

6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이 세계에 덧씌우는 심상의 풍경.

지평 너머까지 끝없이 장미가 피어 있는 꽃밭이었다. 저마다 청색과 흑색의 빛을 머금고 있는 장미들이 잎사귀를 흩날리며, 나아가 장미 줄기들의 날카로운 가시가 곳곳에 돋아 있는 세계.

‘흑색과 청색의 장미, 그리고 가시라.’

그 세계 속에서,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되물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공자님을 포로로 사로잡겠다고 할 경우, 공자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실 셈이지요?”

“천하의 ‘미스트리스’가 흑색공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테지요.”

데일이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 참으로 총명하셔라.”

티타니아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마법사가 ‘사상의 세계’를 꺼내는 의미를 모를 리는 없겠지요.”

100%의 부정이거나 100%의 긍정이거나. 둘 중 하나이며, 예외란 있을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기꺼이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보여주신 신뢰에 보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참으로 다행이네요.”

미스트리스 티타니아가 미소와 함께 말을 잇는다.

“그러나 신뢰란 것은 쌍방의 믿음이 있기에 성립할 수 있는 것. 제가 저의 마음을 드러냈듯이, 부디 저에게도 ‘데일 공자님의 마음’을 허락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티타니아가 말을 잇는다.

“그럴 경우, 저는 기꺼이 데일 공자님을 믿고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티타니아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에 맞서, 데일이 가진 심상의 풍경을 보여달라는 종용.

데일이 일순 침묵을 지켰다. 요크의 요녀로서, 그녀가 속내에 품고 있을 흑심을 헤아리며.

짤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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