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23화 (123/301)

123화

* * *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정정당당하게 맞설 경우, 지금의 데일로서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전투가 모두 ‘정정당당하게’ 치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아스의 맹약에 따라 성검사가 그의 심장에 칼날을 찔러 넣었고, 그럼에도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검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것이다.

시스티나 여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는 검. 성검사를 지금의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초대 백색 마탑주의 유물.

성검이 부서지고, 동시에 이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 상처마저 입었다. 심장을 찔린 즉사의 일격을 막아주었다고 해서, 그 충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상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돼지의 왕》이 땅을 박찼다.

손에 들린 칼자루 같은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짐승 그 자체가 되어서, 이제는 ‘성검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그가 질주했다.

멧돼지의 흉악한 어금니를 무기 삼아 빠르게 거리가 좁혀졌다.

동시에 데일이 칠흑의 마검 ‘기아’를 휘둘렀고, 그와 동조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칠흑의 칼날들을 내뿜었다.

망토 자락의 음영을 따라 생성되는 칼날의 세례가, 총알처럼 쏘아졌다.

마검 ‘기아’의 어둠을 덧씌우고 있는 칠흑의 칼날들이 폭격처럼 내리꽂혔다. 멧돼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꾸에에에에에엑!”

사람의 비명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싸움을 속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지.’

성검사로서 전력을 다할 때의 3할…… 아니, 그 이하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리라.

그러나 분노 속에서 이성마저 날아가버린 《돼지의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육질을 찢고 끝없이 내리꽂히는 칠흑의 칼날에도 개의치 않고, 짐승처럼 돌진을 거듭했다. 거리가 좁혀졌다. 이대로 그의 뿔처럼 솟아 있는 어금니가 데일을 들이받기 위해 내리꽂혔고, 바로 그때였다.

“지금입니다.”

데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그를 수호하는 검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디 섀도우.

일찍이 ‘돼지의 왕’ 앞에서 무참하게 패배하고 왕국을 잃어버린 그녀의 검이, 질주하는 《돼지의 왕》에 맞서 휘둘러졌다.

그때처럼 찬란한 금빛과 천사의 날개를 가진 아바타는 찾아볼 수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그저 칠흑의 발키리였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바 없이 아름답고 잔혹한 심성을 가졌다 일컬어지는 전쟁의 처녀. 흑색의 갑주 사이사이로 핏빛이 덧씌워져 있는 흑적(黑赤)의 발키리.

살검의 가르침을 통해 거듭나 있는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흑색과 핏빛이 뒤섞여 있는 암살자의 검이 질주하는 멧돼지의 어금니를 향해 휘둘러졌다.

“꾸에에에에에엑!”

다시금 세상에서 가장 추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뒤로하고, 레이디 섀도우와 데일이 엇갈리듯 땅을 박찼다.

어느덧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발광하고 있는 멧돼지를 사냥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했으니까.

발악하고 있는 멧돼지의 사각을 노리고 칠흑의 발키리가 그녀의 혈검을 내리꽂았다. 일찍이 《돼지의 왕》이 그녀에게 준 굴욕과 수치를 잊지 않고.

촤아아악!

멧돼지의 가죽 갑주가 맥없이 찢어졌고, 혈검이 깊이 내리꽂혔다. 그 직후, 오렐리아가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쳐내려 할 때였다.

“그쯤 하십시오.”

데일이 손을 뻗어 오렐리아를 제지했다. 그녀의 검이 그대로 정지했고, 멧돼지가 굴복할 수 없다는 듯 역으로 그녀를 향해 어금니를 들이받으려 할 때였다.

“블랙 배럴, 「개틀링식」.”

흑색의 총신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의 총알들이 내리꽂혔다. 비참할 정도로 처절하게, 짐승처럼 최후의 발악을 거듭하고 있는 《돼지의 왕》을 향해서.

쿠웅!

그의 육중하기 그지없는 거구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덧 아바타가 해제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그곳에 있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갑주를 뒤로하고, 힘없이 무릎 꿇고 있는 ‘전(前) 성검사’가.

“아, 아아…….”

그야말로 세상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힘없이 신음을 흘린다.

신음 끝에 그의 팔이 움직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뾰족한 쇄석(碎石) 하나를 움켜쥐고, 그대로 내리꽂았다.

적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향해서.

그리고 그에 앞서, 발밑의 그림자가 꼬챙이처럼 솟아올랐다.

“아아아아악!”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자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의 손바닥 위를 찢고 고정하며, 데일이 말을 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네, 네놈……!”

“제국의 전통에 따라, 브란덴부르크 백작께서는 무사히 살아남을 겁니다.”

데일이 무척이나 정중한 어투로 비아냥거렸다. 이대로 쉽게 죽여줄 수는 없다는 듯이.

“어디까지나 ‘랭커스터 대공 가의 포로’로서 그에 맞는 정중한 대접을 받겠지요.”

꼭 죽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설령 그것이 증오해 마지않는 복수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성 막달레나 기사’들의 비명이었다.

“지금쯤 그들에게 벌어지고 있을 일이 궁금하십니까?”

데일이 저항할 수 없는 성검사를 향해, 차갑게 조소했다.

“이곳에 있는 성 막달레나 기사는 누구 하나 살아나가지 못할 겁니다.”

“……!”

“그리고 성검사께서는…… 아니, 이제는 성검사도 아니었지, 참.”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일이 태평하게 조롱했다.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아들과 함께 몇 차례고 소중한 성 막달레나 기사들을 말아먹고, 비참하게 포로로 잡혀버린 패장이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 따로 없네.”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조롱에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발버둥쳤고, 그러나 어느덧 레이디 섀도우를 비롯한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이 그를 포박하고 있었다.

“힘줄을 모조리 잘라내라.”

데일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고,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촤아아악!

일제히 검들이 내리그어졌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기동하기 위한 톱니바퀴들이 차례차례 찢어지고 있었다.

발목에, 손목에, 손가락에, 어깨에, 육체와 육체를 맞물리고 있는 태엽들이 남김없이 제거되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전쟁 영웅, 성검사는 더 이상 없다. 그저 비참하게 발버둥치는 불구(不具)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데일의 표정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랑하는 기사들을 잃고, 성검을 잃고, 몰락 일로를 걷게 될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명운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 흑색공의 말마따나,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쳐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가는 이상, 고통이란 것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날, 등 뒤에서 가슴팍을 향해 찔러넣은 성검의 고통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그 사실을 알리고, 비참함 속에서 발악하는 그의 표정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전부를 잃고 밑바닥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그와 그의 가문이 걷게 될 몰락의 길을 헤아린다.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겪어야 할 지옥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 *

그즈음. 시가지에 있는 고립 상태의 성 막달레나 기사들을 앞에서,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 수 없는 살기가 스산하게 내려앉았고, 감이 좋은 기사 몇 명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촤아악!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의 목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목이 잘리고 울컥울컥 피가 흩뿌려졌고, 흩뿌려지는 피가 비로소 그 살기의 형태를 밝혀주었다. 와이어, 터무니없을 정도의 절삭력을 머금고 있는 강사(剛絲)였다.

그 실체를 깨닫기 무섭게, 피에 젖은 와이어가 다시금 휘몰아쳤다.

고립되어서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기병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휘몰아치는 죽음의 실들.

“검, 모두 검을 뽑아라!”

그 의미를 헤아린 오러 마스터 급의 강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휘하 기사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방 곳곳에서 거미줄처럼 이어져 휘몰아치는 죽음의 실들.

시가지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이 펼치는 거미줄이었다. 암살자들 하나하나가 거미집을 잇는 점이 되어 서로를 잇고, 그 거미줄이 움직이며 무적의 방어 태세를 도륙하는 것이다.

곳곳에서 핏빛의 실이 휘날렸고, 그때마다 그들의 목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고위 살수들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협동 공격. 각종 상황이 제대로 맞물리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그야말로 최강의 살상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일수.

동시에 성 막달레나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허미, 쉬펄. 이런 백주대낮에 목격자를 죄다 죽여버리는 것도 암살이라고 할 수 있나?”

살검(殺劍)이 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를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 * *

“…….”

귀검 세필리아가 그녀의 ‘철십자 기사’들과 함께, 성검의 기병대를 돕고자 소도시 폴트넘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도시 곳곳이 엉망으로 부서져 천혜의 바리케이드를 자처했고, 그 속에서 말 그대로의 도살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림자 살수들의 진법(陳法)이다.”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귀검 세필리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정답이었다.

길드 시티의 사법 집행자들, 동시에 백색 마탑을 피해 도시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있는 ‘그림자 교회’의 후신.

“어째서 놈들이 이런 곳에서 랭커스터 가를 돕고 있는 거지?”

비록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학살극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해줄 성 막달레나 기사들이 아니다. 적어도 ‘정정당당하게’ 펼쳐지는 싸움 속에서는 그러하리라.

그러나 이곳 시가지는 그들의 홈그라운드가 아니고, 상대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으며, 어느 의미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기습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하나의 물음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의 덫에 빠져들었다 하더라도 이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대륙 칠검의 일좌, 성검이 아니었나.

그 성검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데일의 기아스를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 짐작할 수 있는 하나였다.

규격 외의 강자에 맞서는 또 하나의 규격 외 강자.

“설마 살검(殺劍) 놈이…….”

거기까지 중얼거리고 나서, 귀검 세필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즉시 후작령으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할 것이다.”

어째서 그들이 이곳에서 랭커스터 가를 위해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그날, 랭커스터 공작성에서 목격한 작센 가의 ‘검은 공자’를 떠올렸다.

확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알 수 있었다. 작센 공작 가에서 보내준 것은 고작 몇백 명의 밤까마귀 기사나 고위 흑마법사 몇 명이 아니었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이라 일컬어지는 그림자 법정이, 바로 그 ‘검은 공자’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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