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가령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쇠뇌(볼트)의 심상과 메커니즘을 투영해 ‘볼트 마법’을 사용하듯, 데일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볼트액션, 「7.62mm」.”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법사의 주문이었다. 시대와 문화를 통틀어 사람들이 확실하게 공유하는 ‘보편적 이미지’이자, 동시에 이 세계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이계의 심상.
소도시 폴버넘의 종탑 위에 엎드린 채, 데일이 그림자 망토를 움직여 총기의 형태를 모방했다. 네 개의 서클이 가속하며 데일의 머릿속에 있는 ‘이계의 심상’이 그의 손끝을 따라 투영되었다.
스나이퍼 라이플, 저격용 소총.
타앙!
미풍조차 불지 않는 곳에서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데일의 의지에 따라 총기의 형태를 갖추었다.
《섀도우 라이플》.
이미 애장(愛裝)의 영역을 넘어서 육체 일부로 거듭나 있는 어둠의 아티팩트. 그리고 그 아티팩트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필요로 하는 것을 창조하는 데일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자술사’라 불리는 고위 마족 그 자체였다.
어둠에 실체를 부여하는 고위 마족의 힘. 데일이 ‘그림자 의수’를 매개로 어둠의 아티팩트와 일체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손에 넣은 경지.
“재장전.”
종탑 위의 저격수가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어둠의 총열을 따라, 일발의 ‘섀도우 불릿’이 저 멀리 있는 성 막달레나 기사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투구가 깨지고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수가 흩뿌려졌다.
볼트액션, 노리쇠에 붙어 있는 볼트를 젖혀 당김으로써 수동으로 조작하는 재장전 방식. 일일이 손으로 조작해야 하는 까닭에 속사(速射)의 장점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험지나 습지 등에서 총기의 고장을 최소화하는 특유의 내구성과 더불어, 확실한 장거리 저격이란 이점을 갖는다.
즉석에서 섀도우 불릿을 영창할 때와 달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파괴력이나 속도, 정확성에서 비할 바가 아니다. 당장에 오러 나이트의 기사들조차 그 살상의 정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차례차례 쓰러지고 있으니까.
성 막달레나 기병대가 급히 기수를 돌리려 했으나, 앞서 그림자 법정의 살수들이 도시의 거리 곳곳에 설치해 놓은 작약(炸藥)이 폭발했다.
타앙!
도시에 울려 퍼지는 소요 속에서,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섀도우 라이플’의 노리쇠를 조작했다. 묵묵히 장전을 마치고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기계처럼 데일이 동작을 거듭할 때마다, 성 막달레나의 기사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당혹 속에서 ‘성검’을 필두로 하는 오러 마스터의 기사들이 차례차례 그들의 전력을 내뿜는다.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미스릴의 육체, 순백의 기사들과 그들을 거느린 《돼지의 왕》이 그곳에 있었다.
어금니가 뿔처럼 우뚝 솟은 멧돼지의 두상, 수컷으로서 전력을 다하겠다는 짐승의 투기를 감추지 않으며.
투신(鬪神)이 그곳에 있었다.
‘오러 마스터가 셋, 그 외에는 오러 나이트거나 그 아래의 수준이다.’
다시금 데일이 그림자 라이플의 노리쇠를 조작하고, 재장전 끝에 일발을 내리꽂았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일격. 그랬어야 했다.
카앙!
그러나 저격용 소총의 심상을 투영하며 내리꽂히는 데일의 ‘섀도우 불릿’이, 무엇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성검의 칼날이다. 나아가 총알이 쏘아지는 방향을 역으로 헤아리며 《돼지의 왕》이 고개를 돌렸다.
종탑 위에서 몸을 숨기고 엎드린 ‘검은 공자’의 모습이, 일순이나마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작센의 애송이 놈이…….”
기동의 이점을 살린 삼백 남짓의 기동대. 동시에 ‘규격 외의 강자’로서 성검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
타앙!
다시금 내리꽂히는 죽음의 일격. 데일의 섀도우 불릿을 막아내기 위해 성검사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고지를 점하고, 데일이 노리는 것은 철저하게 기병대의 후위였다. 게다가 도시 특유의 석재 구조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시가지에서는, 부대의 기수를 돌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 정도 일격으로 성검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적의 전력을 착실하게 깎아내리는 것은 가능하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세례.
성 막달레나 기병들이 동요하며 기수를 돌리고, 부대의 대오가 엉망으로 엉키기 시작했다. 이미 도시의 입구와 거리 곳곳이 무너지고, 부서진 석재 구조물들이 천혜의 바리케이드를 자처하고 있다. 그것이 설령 천하의 성 막달레나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뾰족한 수는 없으리라.
오직 하나, 성 막달레나 기사들의 수장을 제외하고.
수없이 쏘아지는 ‘섀도우 불릿’의 궤적을 읽고, 종탑 위에 몸을 엎드린 ‘저격수’의 존재는 파악했다. 그렇기에 상대의 저격에 이 이상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검이 해야 할 행동은 오직 하나였다.
멧돼지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멧돼지가 일체의 것들을 파쇄하며 질주하는 것처럼, 수컷의 투쟁심을 내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석재 바리케이드에 그대로 몸을 부딪쳐 돌파하고, 데일이 있는 종탑을 향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수백 미터 이상의 거리. 그것도 시가지 내에서 석재 바리케이드가 일대를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타앙!
그렇기에 최후의 일발을 꽂아 넣고 나서 데일 역시 지체하지 않았다. 설령 지금의 데일이라고 해도 대륙 칠검의 강자, 성검을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투 모두가 정정당당하게 치러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종탑 위에서 몸을 숨기고 ‘그림자 라이플’로 성 막달레나 기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듯이.
도시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 그 종탑 위에서 데일이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동시에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가 데일의 몸을 휘감았고, 그대로 그림자의 유체가 되어 도시 너머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망령화(Wraith Form).
멧돼지의 추적을 뿌리치듯이 데일이 흡사 망령처럼 도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석재 바리케이드를, 마치 유령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며.
바로 그때였다.
쿠웅!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작센의 애송아.”
기척조차 없이, 어느덧 데일의 앞을 《돼지의 왕》이 가로막고 있었다.
추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의 외모와 별개로, 손에 들린 성검이 그 무엇보다 고결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누가 도망을 치고 있다고?”
그 모습을 보고 ‘검은 공자’가 덤덤하게 되물었다.
“……나를 홀로 끌어들이고, 매복하고 있는 네놈의 조무래기들로 이 몸을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데일의 노림수를 헤아린 듯, 성검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일대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너무 우쭐하지 마라. 이 세상 전부가, 하나부터 열까지 네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거란 착각은 오산이니까.”
“잘 알고 있지.”
어느덧 데일은 그림자 의수, 나아가 그 손에 들린 칠흑의 마검 ‘기아’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있었다. 두 어둠의 아티팩트가 동조하며 끝없는 악의를 내뿜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다고 일컬어지는 성검의 빛이 휘몰아쳤다.
네 개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고 있었다.
상대는 지금까지 데일이 맞서 싸운 이들과 격을 달리하는 강자다. 찰나의 방심이 곧 죽음과 직결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브리타니아 섬에서의 전쟁을 기억하고 있나?”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벌어질 일체의 작전 과정에서,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기아스를 새겼지.”
“…….”
데일의 말에, 비로소 성검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네.”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기 무섭게, 어느덧 데일이 품에서 ‘두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제국군 최고 책임자로서 데일의 서명이 적혀 있는 문서, 나아가 브리타니아 왕국의 국왕 샤를 7세의 옥쇄가 찍혀 있는 문서.
“네놈이 설마……!”
제국과 브리타니아 왕국 사이에 체결한 ‘무기한의 휴전 협정서’였다.
설령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이 멸망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샤를 7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법리(法理)란 것은 도무지 융통성이란 게 없다. 그리고 기아스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 법적 효력이다.
“제국군의 최고 책임자로서 너에게 묻겠다. 그대의 기병대가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움을 줄 후속 부대가 있나?”
그렇기에 데일이 물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부하’를 향해서. 심장에 새겨져 있는 맹약의 호소.
“귀, 귀, 귀, 귀검……!”
《돼지의 왕》이 필사적으로 그의 입을 꿈틀거렸다. 결코 쉽게 말해줄 수 없다는 듯이. 동시에 심장을 압박하고 있는 기아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로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 귀검 세필리아 경의 철십자 기병대와 주기적으로 교신을 주고받는 여, 연락병들이 있다……!”
“그들이 이 도시의 상황을 파악했나?”
“네, 네놈의 조무래기들이 도시의 작약을 터뜨린 시, 시점에서……! 그들이 곧바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귀검 세필리아 경의 기병대로 향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이 올 때까지 얼마의 여유가 남았지?”
“곧, 곧이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성검사의 대답에, 데일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군의 최고 지휘자로서, 그대가 이행하고 있는 신명의 계약에 이르겠다.”
그렇기에 데일로서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성검으로 그대의 심장을 찔러넣고, 자결해라.”
“……!”
“이것으로 우리 사이의 기아스는 파기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데일이 손에 들린 두 장의 ‘휴전 협정서’를 찢었다. 그림자 망토의 칼날이 파쇄기처럼 휘둘러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브리타니아 왕국과의 휴전 협정서를 남겨두고 성검을 협박했다는 증거가 될 경우, 그것은 역으로 데일의 목을 조르게 될 테니까.
협정서를 찢고 나서 데일이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성검사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손에 들려 있는 성검(聖劍)을 역수로 고쳐 잡고……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설임은 찰나였다.
《돼지의 왕》이, 그의 심장을 향해 성검의 칼날을 내리꽂았다.
푸욱!
성검의 칼끝이 가슴을 뚫고 등 뒤를 향해 튀어나왔다. 동시에 초대 백색 마탑주가 벼린 성검의 가호, 여신의 빛이 그의 육체를 휘감았다.
검을 쥐는 자에게 여신의 가호와 빛의 힘을 부여해주어야 할 성스러운 검이, 역으로 소유자의 심장을 찌르며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그리고 모순(矛盾)을 버티지 못하고, 성검의 칼끝을 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순백과 잿빛이 교차하듯 일렁이며, 그 칼날이 찌르고 있는 ‘성검사의 심장’을 비추고 있었다.
쨍그랑!
바로 그때, 성검의 칼날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졌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강화 유리가 부서지듯, 칼날 하나하나가 유리 알갱이처럼 미세한 입자가 되어 부서져 내렸고…… 빛의 입자들이 성검사의 육체를 향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검의 생명과 맞바꾸어, 성검의 소유자를 지키기 위해 즉사(卽死)의 일격을 막아주는 절대 방어의 힘.
콰아앙!
“아, 아아아…….”
일대를 휘감는 폭발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그곳에 있었다. 이제는 ‘성검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그를 향해.
“아, 아아아, 나의 피앙세여, 나의 사랑이……!”
심장에 칼날을 찔러 넣었음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있다. 그야말로 ‘여신의 가호’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기적.
“네놈, 네놈이 감히…….”
기아스는 풀렸다. 그러나 부서진 성검을 뒤로하고, 돼지머리의 남자가 힘없이 중얼거린다.
“내가 이대로 네놈에게 순순히 죽어줄 것 같으냐……! 잊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도 네놈을 증오하고, 죽어서도 네놈을 증오하고 지옥에서 저주할 것이다……!”
‘검은 공자’를 향해 《돼지의 왕》이 최후의 투지를 불태운다.
“아,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러나 범상치 않게 휘몰아치는 투기 앞에서도,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성검을 잃고 치명적 부상을 입었음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애초에 데일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으니까.
죽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고통이 아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삶 대신 죽음을 택하듯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은 비로소 살아 있을 때밖에 겪을 수 없는 것이다.
데일이 칠흑의 마검 ‘기아’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겁나서라도 쉽게는 못 죽여주겠네.”
데일이 말했고, 최후의 기력을 쥐어짜며 《돼지의 왕》이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