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
“작센 가와 랭커스터 가의 동맹이라고 하셨습니까?”
랭커스터 대공의 집무실. 바로 그곳에 있는 뜻밖의 얼굴을 향해, 귀검 세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백 명의 밤까마귀 기사, 그리고 흑색 마탑의 흑마법사 여섯 명이 함께하고 있지요.”
노골적으로 그의 적에게 정보를 감추지 않고 꺼내 들며.
“거창한 동맹치고는 참으로 조촐한 병력이 아닙니까.”
“아,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대륙 칠검의 일좌, 귀검을 향해 ‘검은 공자’는 일말의 주눅조차 들지 않고 미소 지었다.
“제국의 다섯 전쟁 영웅 중 하나, 귀검 세필리아 경께서 ‘황실의 입장’과 별개로 요크 가를 위해 검을 쥐시는 것처럼 말이지요.”
“……빌어먹을 꼬맹이가, 잘도 그 입을 지껄이는구나.”
그제야 비로소 세필리아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표정을 뒤틀었다. 방금까지 천검 앞에서 보여준 일말의 예의나 존경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귀기 어린’ 표정을 짓고서.
“이 누나 앞에서 엉덩이라도 맞아야 울며불며 정신을 차리겠니?”
“아, 저는 벌써 다 컸습니다. 엉덩이나 맞고 있을 짬은 일찌감치 지났지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비아냥거렸다.
정적 속에서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그러나 귀검 세필리아는 결코 그녀의 칼자루 위에 손을 얹지 않았다.
“작센의 데일, 삼가 천검 랭커스터 대공 각하를 정식으로 뵙습니다.”
그의 앞에서 침묵하고 있는 저 남자, 천검의 무게감에 짓눌린 채.
“……그럼 부외자는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지요.”
귀검 세필리아가 랭커스터와 작센을 뒤로하고 등을 돌린다.
‘소울브링어(Soulbringer)’라 불리는 그녀의 검과, 그녀 주위에서 일렁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귀기를 거느리며.
* * *
“작센 가에서 오백의 밤까마귀 기사와 흑마법사를 보냈다는 소식은 들었다네.”
세필리아가 떠나고 나서, 랭커스터의 두 부자와 작센의 장남이 그곳에 있었다.
적이 사라지고, 비로소 그들의 동맹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러나 설마 ‘작센 가의 장남’이 직접 행차하는 이상, 고작 그 정도 병력에서 그칠 리가 없겠지.”
“대공 각하의 말대로입니다.”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가 직접 모습까지 드러냈으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테지요.”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특히나 상대는 요크 가의 요녀들이다. 데일이 모습을 드러낼 것조차 없이, 이 시각에 미하일이 북부의 마왕령을 찾았다는 정보 하나로 ‘두 공작 가의 동맹’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것이 그들의 지혜니까.
“그러나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그림자 속에서 휘둘러지는 검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그림자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지?”
“보이지 않는 검이지요.”
데일이 차갑게 대답했고, 랭커스터 대공 역시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아버지.”
그리고 침묵 끝에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부디 데일 공자님께서, 장차 우리 랭커스터 가와 맺고자 하는 호의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작센의 ‘검은 공자’를 믿을 수 있겠느냐?”
데일의 앞에서, 천검이 되물었다. 데일의 이명, 그 이름이 갖는 악명과 잔혹함을 그 역시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적어도 ‘검은 공자’가 그의 적들에게 주는 공포와 잔혹함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미하일이 대답했다.
“설령 그게 요크의 요녀들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 아이를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구나.”
미하일 랭커스터는 좀처럼 사람을 신뢰하는 법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랭커스터 가’의 이름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아첨하는 귀족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작센의 데일은 달랐다. 서로의 몸에 흐르는 피의 무게가 동등하다는 이유 하나가 아니었다.
“저는 공자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파이트 클럽에서 보여준 대결. 압도적 실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미하일을 굴복시켰다.
“오히려 가슴 깊이 존경하고 있지요.”
“……!”
“훗날의 제가 극복해야 할 벽이자, 동시에 더 높은 경지를 지향하는 강자로서.”
뜻밖의 말에 놀란 것은 랭커스터 대공 하나가 아니었다. 데일마저 미하일의 거리낌 없는 모습에 숨을 삼켰다.
“그날, 저는 데일 공자님에게 패배함으로써 지금의 경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미하일이 허리춤에 매달린 ‘피스메이커’의 칼자루에 흘끗 손을 올린다.
“명백한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를 자처하는 띠동갑 차이의 어린아이에게 마음을 읽혀, 모두의 앞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치욕을 떠올리며.
“제국 제일의 천재, 흑백 회전의 승리자, 브리타니아 섬의 전쟁 영웅.”
미하일이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센과의 우애는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 될 겁니다. 그리고 ‘자격을 갖춘 자’ 앞에서 예의를 표하는 데 있어, 나이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법이지요.”
자격을 갖춘 자. 그렇게 말하며 미하일이 재차 데일에게 고개를 숙였다.
랭커스터 대공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좋다, 작센의 어린 천재여.”
작센의 어린 천재.
“우리 랭커스터 가는 그대 북부의 작센과 손을 잡고, 기꺼이 그대들의 도움을 요청하겠다.”
“훌륭하신 결정입니다.”
데일이 미소 지었다. 랭커스터 대공 가가 작센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도움을 요청하고, 데일은 기꺼이 그들의 도움에 화답해줄 역량이 있었다.
두 대제후의 싸움, 칠검급의 강자가 격돌하는 그 전쟁에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데일 스스로가 칠검을 쓰러뜨리는 ‘규격 외의 강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규격 외의 강자들을 장기 말 삼아,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족했으니까.
그리고 그 부채(負債)는 절대로 잊히는 법 없이, 훗날 작센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빛을 발하리라.
대륙 제일검, 일곱 자루 검의 정점에 서 있는 천검 랭커스터 대공의 이름으로.
* * *
공식적으로 이 전투는 랭커스터 가의 후계 다툼을 놓고 벌어지는 가문의 내전(內戰)이었으나, 엄밀하게 말해 장남 리처드는 처가 ‘요크 후작 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적백의 장미, 청백의 장미를 문장으로 내세우는 두 대제후의 격돌.
대제후쯤 되는 영주들 사이의 전쟁은 하루아침에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백 년 천 년이 걸린다는 뜻도 아니다.
요크 후작 가의 휘하 가문들이 그들의 병력을 이끌고 착실하게 집결했고, 랭커스터 공작 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요크 후작 가의 기수(旗手)를 자처하는 것은 대륙 칠검의 두 자루 검, 성검 브란덴부르크 백작과 귀검 세필리아 경이다.
아울러 이것이 대귀족 사이의 ‘명분’을 걸고 벌어지는 다툼으로 성립하는 이상, 전투는 정정당당한 양측 대부대의 회전(會戰)으로써 결판 지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쟁이 길어질 때는 늘 약탈과 방화, 온갖 범죄가 잇따르고, 그것은 곧 영지 사람들과 나아가 영지 그 자체의 피해와 직결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속전속결의 결판을 냄으로써, 땅과 사람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 ‘제국의 전통’이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요크 후작 가는 결코 제국의 전통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고 있는 청백의 장미 뒤에, 흑청의 장미가 상징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지혜로움’의 방식을 택했으니까.
랭커스터 공작령과 요크 후작령이 맞닿고 있는 영지의 경계에는, 서로를 가로막아줄 강이나 산맥 같은 천혜의 요새가 없다. 그렇기에 칠검의 규격 외 강자 두 명을 필두로 하는 게릴라 부대가, 랭커스터 공작령을 침공해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의 전통을 수호하겠다는 고결한 명분치고는, 참으로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전략이었다.
* * *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집결하고 있는 랭커스터 가의 대군이 움직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기동 타격대를 조직해 요크의 게릴라들을 쫓고 있으나, 칠검 두 자루가 그들을 지키고 있는 까닭에 쉽사리…….”
“빌어먹을 요크의 계집들이 뒷통수를 치다니!”
“…….”
랭커스터 가의 수뇌들이 소리를 높였고, 그 속에서 천검 랭커스터 대공은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규격 외의 강자’는 일기당천의 기사 문학을 가능케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그러한 강자들의 존재 가치는 기사 문학 따위를 쓰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규격 외 강자를 ‘전략과 전술의 영역’에 녹여 들게 함으로써 벌어지는 전투. 기사의 긍지나 고결함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정정당당한 승부를 회피하고 약탈과 방화를 거듭하는 요크의 게릴라 전술은 결코 달가운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성검이나 귀검 역시 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실전에서 기사의 고결함이나 긍지를 무시하는 그 행동조차 결국 ‘전략과 전술’이란 이름 앞에서 합리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병법(兵法)이고, 요크 후작 가는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공자’ 역시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 * *
그 시각,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회의를 뒤로하고 데일은 홀로 랭커스터 대공성의 일실에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일대의 영지가 그려져 있는 지도가 놓여 있었다. 체스 말의 모양처럼 각각의 병종을 상징하는 기물들과 함께.
랭커스터 수뇌부의 보고에 따라, 깃펜을 들어 ‘두 자루 칠검’이 활약하는 게릴라 부대의 활동 영역을 표시한다.
랭커스터 공작령의 비옥하고 풍요로운 영지가 차례차례 짓밟히고 있다. 그에 맞서 맞불 작전으로 요크 후작 가의 영지를 약탈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결정적으로 대공 가의 발목을 잡는 문제가 있었다.
명분(名分)이다.
우습게도, 요크 후작 가가 랭커스터 공작령을 약탈하고 있는 행위에는 명분이 있었다.
바로 ‘장남 리처드를 정당한 후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공작 가의 역적들을 처형한다’는 명분이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죄 없는 영지의 사람들이, 바로 그 역적의 혐의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으나, 이 세계에서 명분이 갖는 무게는 절대로 가볍지 않다.
그리고 요크 후작 가는 바로 그 명분의 끝자락에서 줄타기하며, 랭커스터 가를 희롱하고 있었다.
‘역시 보통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랭커스터 대공과의 약속대로,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그의 검을 휘두를 때가 찾아왔으니까.
“마스터 바로.”
어둠속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고 바람이 휘몰아쳤다. 무척이나 스산하고 불길한 바람이었다.
어느새 마스터 바로를 필두로 새 부리 마스크에 흑색 코트 차림의 남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제국 유수의 대제후들이 육성하는 기사 조직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
그들 속에서 군림하는 ‘그림자 군주’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출정의 때가 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 데일과 그의 조직 하나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데일이 랭커스터의 동맹을 자처하고 있다고 하나, 그 전투의 일체를 진두지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렇기에 때를 기다리고, 그 때가 오기에 앞서 손에 넣어야 했다.
설령 천하의 랭커스터 대공조차, 데일의 체스 기물이 되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