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 *
장자 상속의 규칙.
제국의 전통에 따라, 랭커스터 대공 가의 후계자는 ‘장남 리처드’의 몫이어야 했다.
그러나 천검 랭커스터 대공은 제국의 전통을 거부하고 ‘차남 미하일’을 그의 후계로 삼았으며, 제국의 전통을 깨트리는 그 행위를 명분 삼아 리처드의 처가(妻家), 요크 후작 가가 영지전을 포고했다.
요크의 지혜로서 손에 넣은 대륙 제일의 강자들을 소집하며.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벌어지는 ‘가장 커다란 규모’의 전쟁이었다.
과거 흑색공과 성검사가 하급 영주들을 통해 대리전을 수행하는 것과는 급이 다르다. 아울러 브리타니아 왕국에서 벌어지는 싸움 역시, 저 두 대제후가 전력을 다할 때의 규모 앞에서는 아이들 놀음에 불과하리라.
대륙 칠검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천검, 그에 맞서 제국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칠검의 두 자루 검이 합류했다. 그리고 ‘대륙 칠검이 나서는 것’은 결코 그들 하나에서 그치지 않는다.
칠검의 경지에 비할 바는 아니나, 훗날 그들의 자리를 대행하게 될 ‘차세대의 강자’들도 예외가 아니니까.
당장 랭커스터 가의 차남 미하일이 그러하듯이…… 귀검 세필리아나 성검도 예외가 아니리라.
나아가 공식적으로 작센 공작 가는 ‘랭커스터 대공 가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서 최소의 병력을 파병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맺게 될 동맹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며.
그러나 그림자 속에서 흑색공을 대행하고 있는 ‘검은 공자’의 세력은 그렇지 않았다.
칠검의 일좌, 마스터 바로를 비롯한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 이 정도 규모의 대제후들이 맞서는 싸움에 있어, 그들이 갖는 가치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 * *
“데일!”
그즈음, 작센 자작이 아니라 ‘검은 공자’로서 출정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데일을 불러세우는 여기사가 있었다.
흑색의 갑주로 몸을 휘감고 있는 레이디 블랙, 검희 샬롯.
“랭커스터 가의 영지전에 참여하겠다는 소리를 들었어.”
“맞아.”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샬롯이 입술을 악물었다. 북부 마왕령을 수호하기 위해, 데일이 거느린 세력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블랙아머 컴퍼니와 겨울 파수꾼, 그리고 밤까마귀 기사들은 작센 자작의 부재와 별개로 마왕령을 개척할 임무가 있으니까.
샬롯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데일의 충실한 수족 ‘그림자 법정’과 레이디 섀도우는 아니었다.
“나로서는 아직 네 곁을 지킬 수 없는 거야?”
“아직으로서는 그렇지.”
샬롯이 되물었다. 데일이 짐짓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바타를 쓸 수 없으니까.”
“…….”
“랭커스터 가에서 벌어질 싸움에는 대륙 칠검 중 네 명이 참전하고 있어. 그리고 ‘차기 칠검’의 유력한 후보들 역시 대거 참전하겠지. 일개 오러 나이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위험하다니…….”
아직 오러 나이트에 지나지 않는 샬롯으로서는, 결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오러 나이트의 가치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나, 그렇다고 그녀를 기병 돌격의 제1열에 다짜고짜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샬롯은 어디까지나 데일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여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과 잠재력을 고려할 경우, 지금 당장으로서는 데일의 발목을 잡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기사가, 역으로 주군의 걱정을 사고 있다.
그 사실에 샬롯이 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는다.
“내가 더 강하지 못해서…….”
“자책하지 마.”
“그래도 오렐리아 언니는 데려가는 거구나.”
샬롯이 씁쓸하게 말을 잇는다.
“오렐리아 님께서는 ‘차기 칠검’의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자야.”
적어도 당장 샬롯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응, 알고 있어.”
작센 자작으로서, 나아가 ‘검은 공자’로서 냉정하게 헤아린 그 말에 샬롯이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 역시 모르지 않으리라. 기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 설령 샬롯의 재능으로도 메울 수 없는 ‘아바타의 경지’에 대해서.
“나로서는 더 강해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구나.”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샬롯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데일 역시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긍정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마왕령을 잘 부탁할게.”
“믿고 있어줘.”
그러나 샬롯이 데일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해도, 이곳 마왕령에서 그녀가 수행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헬무트 경의 수제자로서, 밤까마귀 기사를 이끌고 마족의 위협에 맞서 평화를 수호하는 것.
아무리 칠검들의 싸움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하나, 그 역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중책이다.
“무사히 돌아와야 해.”
“걱정할 것 없어.”
샬롯의 말에, 데일이 여느 때처럼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비로소 샬롯 역시 미소 지었다.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미소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작센 가는 공식적으로 ‘구색을 갖추기 위한 최소의 병력’을 랭커스터 대공 가에 보냈다.
오백 명의 밤까마귀 기사와 그들이 거느린 랜스(Lnace). 나아가 5서클의 흑마법사 다섯에 6서클의 흑마법사가 하나.
일개 소영주 사이의 다툼에서는 그야말로 쐐기를 박을 정도의 압도적 전력이나, 대륙 유수의 대제후들이 격돌하는 싸움 앞에서는 이마저 구색을 갖추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검은 공자’가 거느린 조직 ‘그림자 법정’의 존재는, 결코 구색을 갖추기 위한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 * *
그즈음, 요크 후작성의 일실.
그리고 그 일실은 요크 후작성 내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금남의 구역이자, 오로지 요크 후작 가의 여성밖에 출입할 수 없는 비밀의 방. 다시 말해 공식적으로 가주라 할 수 있는 요크 후작조차 출입할 수 없는 곳.
그리고 그 방에 걸려 있는 요크 가의 문장이 보였다.
청백의 장미, 그 상징이 의미하는 것은 ‘지혜로운 고결함’이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방에 걸려 있는 장미에는, 백색이 없었다. 백색이 뜻하는 ‘고결함’을 대신해 칠해져 있는 것은 오히려 아주 뜻밖의 색이었으니까.
흑색.
흑청(Black-and-Blue)의 장미였다.
오직 요크 가의 여성들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의 상징. 그리고 랭커스터 가에 맞서 요크 후작 가의 수뇌부들이 그곳에 집결해 있었다.
남자는 없다. 심지어 가주 요크 후작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작센 가에서 공식적으로 소수의 병력을 보냈다는 첩보가 왔어요.”
요크 후작의 아내, 랭커스터 가의 장남과 혼약을 맺은 마가릿, 백작 가의 망나니를 사로잡은 캐서린…… 그들 외에도 적지 않은 영애들이 그곳에 있었다.
요크의 요녀들. 그들을 상징하는 흑청의 장미, 그 진짜 의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지혜로움’이다.
“마왕령에 체류하고 있는 작센의 ‘검은 공자’가 모습을 감추었다고 해요.”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나요?”
요크 후작의 아내 ‘티타니아’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공식적으로 ‘검은 공자’가 랭커스터 가에 합류하겠다는 이야기는 아직……”
“함께할 겁니다.”
요크의 티타니아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랭커스터 가의 차남이 마왕령에 합류한 이상, 필시 모종의 동맹이 맺어졌겠지요.”
“마더…….”
“작센의 ‘검은 공자’에게는 흑색의 잔혹함과 청색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요크의 요녀들을 상징하는 흑청의 장미처럼.
“……그러고 보니, 참으로 운 좋게도 적당한 카드가 손에 쥐어져 있네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마더 티타니아가 무엇을 떠올린 듯 미소 짓는다.
“작센의 ‘검은 공자’가 우리에 맞서 악의를 꺼내들 경우…… 현요(賢妖) 세피아께서 우리에게 지고 있는 빚을 받아낼 겁니다.”
데일의 스승이자 지혜로운 엘프 세피아가, 요크의 청색 요녀들에게 짊어지고 있는 ‘부채’를 떠올리며.
그녀의 말에, 요크의 요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들 앞에서 보여주는 교태나 순수한 미소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서.
* * *
그 시각, 랭커스터 대공의 공작성.
그곳에 있는 대공의 일실에, 무척이나 뜻밖의 얼굴이 있었다.
“세필리아 경, 보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오.”
천검 랭커스터 대공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귀검 세필리아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 황실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조직, 그중에서도 서열 2위를 손에 넣은 여기사.
“천검(天劍) 랭커스터 대공 각하.”
“이 시국에 달리 이곳까지 찾아오신 까닭을 물어도 되겠소?”
“지금의 저는 요크의 방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실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를 찾았습니다.”
“황실의 입장이라.”
“부디 지금이라도 뜻을 거두고, 장남 리처드 공자님을 후계에 세우십시오.”
“제국 황실은 우리의 결정에 대해 중립을 취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공식적으로는 그렇지요.”
“제국의 통일 전쟁, 나아가 제국이 지금의 제국으로 되기 전부터…… 우리 랭커스터 가는 황실에 충절의 의무를 다하였소.”
천검 랭커스터 대공. 이계의 용사, 성검, 귀검, 적색 마탑주와 더불어 제국의 ‘다섯 전쟁 영웅’ 중 하나. 그리고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제국의 대공 가로서 그 의무를 다하는 충성스러운 가문.
“내가 평생을 다해 제국에 바친 충성이, 고작 그들의 ‘전통’ 하나를 깨트린다는 이유로 버림받을 정도의 것이었소?”
랭커스터 대공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마치 ‘이계의 용사’가 맞이한 최후를 보는 것 같구려.”
“……!”
그 말에 세필리아가 일순 숨을 삼켰다.
“철십자 기사로서의 긍지와 제국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설령 이 싸움이 대공의 패배로 돌아가도, 저희 제국은 결코 대공의 충성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삼키고 나서, 세필리아가 말했다.
“저는 철십자 기사의 부수장 자리를 사임하고, 그 자리를 랭커스터 대공에게 드리겠습니다.”
“나의 영지 전부가 요크의 요부(妖婦)들 손아귀에 떨어지고, 고작 황실의 개가 되란 것이오?”
“…….”
“장남 리처드가 요크의 요녀에게 홀린 시점에서, 그 아이는 후계자의 자리를 상실했소.”
랭커스터 대공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 영지가 요크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꼴을 보고 있을 수 없다오.”
요크의 요녀들. 처음부터 랭커스터 대공이 장자 상속의 전통을 깨트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처드가 요크의 마가릿에게 빠져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 때, 그리고 미하일이 ‘요크의 유혹’을 벗어나 그녀를 거부했을 때.
요크 가의 야욕 앞에서, 이 후계 다툼은 처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대공 각하! 미하일 공자님께서 영주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대공의 부하 하나가 집무실 밖에서 보고를 올렸고, 랭커스터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하라.”
이 자리에 훗날 맞서게 될 적, 귀검 세필리아가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랭커스터 가의 후계자, 미하일 랭커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
귀검 세필리아가, 일순 숨을 삼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랭커스터 대공 각하.”
미하일의 곁에, 흑색 서코트 차림의 귀공자가 있었다.
“그리고 귀검 세필리아 경.”
“작센의 ‘검은 공자’께서…….”
놀란 것은 랭커스터 대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검은 공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적이 있는 곳에서 입을 열었다.
“저는 작센 가를 대표해, 랭커스터 대공 가와의 동맹을 이행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데일의 수족이지, 데일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검은 공자’의 악명은 그림자 속이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 법이니까.
비로소 전쟁의 막이 올랐고, 주역들이 차례차례 집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