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14화 (114/301)

114화

* * *

미하일의 손에 들린 백적색의 피스메이커가, 그림자의 검과 맞부딪쳤다.

이곳에서 더 이상 그를 지켜줄 《평화의 강제》는 없다.

그림자 군주로서, 데일이 일대를 어둠의 호수에 수몰시키며 세워 올린 피조물들. 그림자 잠복자, 그림자 기사들이 군주의 명령에 따라 쇄도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역시나 ‘검은 공자’의 그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장이네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물량 공세 속에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쇄도하는 일격을 막아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결코 초조함이나 동요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는 강하다.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고 있는 데일조차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이리라.

그러나 데일이 미하일 랭커스터를 경계하고 있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 자는 위험하다.’

이계의 용사를 향해 보여주고 있는 그의 집착, 나아가 피스메이커를 쥐고 그가 생각하는 ‘평화’의 실체에 대해서.

데일 역시 남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이 남자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위험한 사상(思想)을 갖고 있다.

평화의 괴물.

결국에는 그 역시 제국의 귀족이란 것일까. 아니, 오히려 미하일 랭커스터가 잠시나마 ‘다르다고’ 생각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우스웠다. 다르다? 아니었다. 애초에 데일은 그가 다르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파이트 클럽에서 그가 보여준 망설임이나 올곧음이, 이토록 비틀린 성질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잔혹한 고결함. 적색 마탑의 ‘힘’과 백색 마탑의 ‘위선(僞善)’을 상징하는 적백의 오러.

그 방아쇠를 당기게 해준 것은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데일 자신이었으니까.

그날의 잊을 수 없는 뼈저린 패배. 나아가 이계의 용사로서 손에 넣은 평화까지.

미하일 랭커스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데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이들과 같다. 그저 그의 ‘고결함’이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따름이지.

당장에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뒤로하고, 데일이 땅을 박찼다.

그림자 의수가 쥐고 있는 칠흑의 마검 ‘기아’가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기아의 복제품’을 쥐고 있는 《섀도우 나이트》들이 일제히 쇄도했다.

어둠의 동조를 통해 ‘그림자 망토’와 ‘기아’를 융합함으로써 창조한 그림자 기사들.

‘그림자 군주’의 명령에 따라 충성하는 어둠의 기사들이, 미하일 랭커스터를 향해 일제히 그들의 검을 내리꽂았다. 제아무리 미하일 랭커스터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일격.

바로 그때였다.

휘몰아치는 쇄도 앞에서, 미하일이 내뿜고 있는 적백의 오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우뚝. 데일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대로 조용히 숨을 삼켰다.

“아, 이것 참…….”

불과 빛의 사도가 그곳에 있었다.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화염을 흩뿌리고 있는 ‘불과 빛의 기사’가 되어서.

태양처럼 이 세계에 빛을 밝히고, 동시에 태양의 열기에 버금가는 불꽃이 휘몰아치는 기사였다.

빛이 휘몰아쳤다. 어둑새벽을 밝히는 여명의 빛이었다.

데일의 그림자 피조물들이, 일제히 그 빛 앞에서 스러졌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당장에 데일조차 미하일 랭커스터의 ‘아바타’가 내뿜고 있는 힘에 압도되어 숨을 삼켰다. 마치 대낮에 태양 빛을 마주하는 흡혈귀처럼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바로 그 태양을 집어삼키고자 어둠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작센 자작님.”

어느새 ‘검은 공자’를 보좌하는 두 여기사가 그녀들의 오러 블레이드를 들이밀고 있었다. 레이디 블랙, 그리고 레이디 섀도우.

그러나 아바타를 전개하는 기사에 맞서 ‘아바타’를 펼치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미하일 랭커스터의 검에 살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데일 역시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아바타’를 꺼내 들었을 때, 그에 맞서 사상의 세계를 전개하지 않은 것이다.

두 여기사의 칼끝이 겨누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군 앞에서의 무례’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녀들의 충성이자 메시지였다.

“──데일 공자님의 일격에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꼈습니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그의 ‘아바타’를 드러내는 것은 아주 찰나였다. 불과 빛의 사도. 어느덧 그의 몸에서 오러가 사라지고, 데일의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아바타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 일격이었지요.”

세로로 그의 검을 내리꽂으며,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미하일의 목과 가슴을 향해, 두 여기사가 겨누고 있는 핏빛과 흑색의 오러 블레이드를 뒤로하고.

“또다시, 이걸로 두 차례나 패배하고 말았네요.”

“…….”

“역시 ‘검은 공자’의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서 또다시 ‘패배자의 모습’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데일에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데일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태양이 흩뿌리는 찰나의 빛 앞에서, 어느덧 일대를 휘감고 있는 ‘그림자’가 사라져 있었다.

그림자 피조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마저 미하일의 빛 앞에서 고통을 내지르고 있었다.

성 곳곳에 남아 있는 그림자의 조각들이, 데일의 발밑을 향해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그림자 의수로 쥐고 있는 마검 ‘기아’를 도로 소드 벨트의 칼집 속에 집어넣으며, 데일이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상의 ‘평화’를 바랐다가는, 제 성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네요.”

“동감입니다.”

동시에 미하일의 검에 깃들어 있는 적백의 오러가 소멸하고, 그 역시 피스메이커를 칼집에 집어넣는다.

“랭커스터의 미하일 공자님, 작센 자작으로서 공작 가를 대표해…….”

집어넣고 나서 ‘작센 자작’ 데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왕의 대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로 이곳, 북부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 * *

작센 자작이 지배하는 마왕령의 미궁도시, 라비린토스.

‘아티팩트 러시’의 광풍에 따라,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모여 있는 도시의 새벽이 내려앉았다.

딱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일도 없이, 모험가 길드에 상세를 적어넣은 미하일 랭커스터는 즉시 S랭크의 모험가 등급을 부여받고 ‘심층’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로써 미궁의 심층에 들어갈 수 있는 S랭크의 모험가는 열두 명이 됐다. 페이스리스, 미하일 랭커스터, 괴물잡이 드레이크, 나아가 ‘귀족파 모험가’들을 이끄는 덜레스 백작 가의 차남 에드워드 외에 여덟 명. 나머지 여덟 명의 모험가들 역시, 데일의 정보망을 통해 그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상황이다.

‘그림자 법정’과 더불어 제국 각지에 거미줄처럼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길드 시티의 힘이었다.

모험가 랭크란 것은 어디까지나 작센 자작이 미궁 내에서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부여하는 자격증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티팩트 러시에 이끌려 북부에 모여들고 있는 강자를 파악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아직 대륙 칠검 급의 압도적 강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궁도시와 마왕령의 개발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국과 황실이 순순히 지켜보고 있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적어도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즈음, 주기적으로 작센 자작령을 오가는 칼리말라 길드에서 ‘아주 비밀스러운 정보’를 쥐고 있는 밀사(密使)가 찾아왔으니까.

* * *

작센 자작성, 데일의 집무실.

칼리말라 길드의 밀사가 ‘작센 자작’ 앞에서 예를 표하고 있었다.

길드 시티의 일곱 대 길드 중에서도 ‘시티 마스터’로 군림하고 있는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 바로 그가 주기적으로 데일에게 보내주려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시티 마스터의 밀사가 입을 열었다.

“사자가 울었고…… 매미가 처녀의 어깨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 말에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대가 벽돌을 쌓고, 사제들이 동물을 먹고 여행자가 바람을 겁탈하고 있습니다.”

“황금이 옷을 입었나요?”

“아니요, 황금은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여행자의 아이를 가졌습니까?”

“세쌍둥이를 가졌고, 모두 여자아이입니다.”

“사제들이 몇 마리의 동물을 먹었습니까?”

“수탉 세 마리와 달걀 다섯 개를 먹고, 두 개의 달걀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말을 훔쳐 도망쳤습니다.”

“흑색의 말입니까?”

“아니요, 두 마리의 백마와 여섯 마리의 갈색마였고, 모두 ‘전투마’였습니다.”

전투마. 그 말에 일순 데일의 표정이 움찔했다.

“종마(種馬)가 아니네요.”

“예, 모두 전투마입니다.”

마치 광자들의 대화처럼 맥을 종잡을 수 없는 대화였고, 사실 시티 마스터의 밀사조차 그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그 의미를 아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데일, 그리고 시티 마스터.

그날, 길드 시티에서 데일과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가 맺은 계약.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시티 마스터의 장부’에 적혀 있는 거래 내역이었다.

제국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길드 시티의 일곱 대 길드가, 그들의 거래 내역 일체를 기록하고 있는 정보들.

다짜고짜 ‘장부의 거래 내역’을 달달이 외우고 데일에게 사람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미리 약속해 놓은 암호의 형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 후로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대화를 듣고 데일의 깃펜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비로소 이야기가 끝이 났고, 작센 자작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울러 칼리말라 길드의 상관(商館)을 늘려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이미 길드의 거리에 자리를 확보하고 석공 조합과 교섭 중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나아가 길드의 거리에서, 머지않아 ‘세금 특혜’를 놓고 작센 자작의 이름으로 특허(特許)가 발포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칼리말라 길드가 보여주는 ‘성의’를 기억하고 있지요.”

데일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고, 시티 마스터의 밀사이자 동시에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를 대행하는 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작센 자작님!”

주는 것이 있고, 받는 것이 있다.

그리고 데일이 갖고 온 아티팩트 러시, 북부 개척시대의 바람에 휩쓸린 것은 대륙 제일의 상업 조직이라 일컬어지는 길드 시티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데일과 그들 사이의, 나아가 그중에서도 칼리말라 길드와 맺고 있는 유대는 무척이나 특별한 것이었다.

미궁도시와 북부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데일이 손에 넣고자 하는 것들.

어느덧 시티 마스터의 밀사가 물러나고, 데일이 흘끗 등 뒤의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마왕령의 동토 속에서도 여느 때처럼 태양이 떠올라, 그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불과 빛의 상징.

아직 작센 자작으로서의 업무를 마치기에는 터무니없이 이르다.

그럼에도 데일이 나직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마왕령의 지배자, 작센 자작이 아니라.

얼굴 없는 자, 어디까지나 S랭크의 모험가 《페이스리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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