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 *
어둠의 동조(Synchronize).
각각 그림자 망토와 기아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두 어둠의 아티팩트가, 하나의 아티팩트로 융합하고 있다.
데일의 그림자 의수가, 두 개의 아티팩트를 맞물리게 하는 톱니바퀴 장치를 자처함으로써.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리듯 두 개의 아티팩트가 하나로 맞물리며, 그 이상의 시너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나아가 어둠의 아티팩트를 융합하고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데일의 강력한 의지 덕이기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톱니바퀴를 묶어줄 하나의 확실한 구심점이 있는 까닭이었다.
데일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네 개의 서클, 그리고 그 심장과 서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칠흑의 촉수. 마법사로서 데일이 보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흑색 원천.
『검은 산양의 서』다.
보유하고 있는 힘을 최적의 형태로 맞물리며,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일찍이 그의 옛 애검, 피스메이커가 쇄도하고 있었다.
체내의 오러를 활용해 휘둘러지는 기사의 검. 그것도 대륙 칠검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검의 천재, 미하일 랭커스터의 일격이다.
기사에게 거리를 내준 마법사. 아니,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보통의 마법사에게 있어 패배를 확정 짓고도 남을 정도의 거리였다.
카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적어도 이곳 작센 자작성에서, 데일의 터무니없는 재능을 의심하는 자는 없다. 그러나 상대 역시, 검에 있어 제국 제일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그 미하일 랭커스터가 아니었나!
대륙 칠검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기사에 맞서, 이 정도의 거리에서 검을 맞받아치다니.
“오러가…….”
‘기아’와 피스메이커의 칼날이 맞부딪쳤고, 힘겨루기 속에서 데일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피스메이커의 칼날을 휘감고 있는 오러의 빛깔을 보며.
그것은 과거, 파이트 클럽에서 데일이 기억하고 있는 무형의 오러가 아니었다.
“색을 머금고 있네요.”
백적의 오러 블레이드였다.
랭커스터 대공 가를 상징하는 잔혹한 고결함의 색.
“데일 공자님의 덕이지요.”
힘겨루기 속에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미소 지었다.
“그날의 잊을 수 없는 패배가, 저에게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
그대로 거리를 벌렸고, 다시금 거리가 좁혀졌다. 두 자루의 검이 부딪쳤고 데일의 그림자 망토가 여섯 자루의 검이 되어 미하일 랭커스터에게 내리꽂혔다.
흩뿌려지는 칼날의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 속에 잠복하고 있는 《섀도우 러커》가 가시 촉수를 내뿜었다.
촤아악!
그러나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데일의 공격을, 미하일의 손에 들린 백적의 검이 소용돌이처럼 휘둘러졌다.
비록 피스메이커의 능력을 오롯이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검의 이능력에 의지할 필요 따위는 없다는 듯, 미하일의 검이 데일의 그림자를 모조리 튕겨냈다.
‘역시 강하다.’
지금 세대의 강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데일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 차세대의 강자로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보여주는 재능이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데일이 더더욱 놀란 것은 달리 있었다.
파이트 클럽에서 미하일과 맞섰을 당시. 그의 특기는 무형의 오러와 사복검의 리치를 이용해 뱀처럼 사각(死角)을 노리는 ‘암살자의 검’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 데일의 앞에 있는 미하일 랭커스터는 달랐다. 무형의 검이 아니라, 백적색의 오러에 휘감겨 빛나고 있는 기사 검.
“새로운 검식을 구사하고 계시네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검술을 버리고, 다시금 ‘자신의 검’을 기초부터 새롭게 쌓아 올린 것이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이란 말조차 부족하다.
다소 과장을 보태서, 데일이 흑청(黑靑)의 마법을 버리고 새 속성을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백적색의 기사 검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고, 미하일이 말했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그날, 저를 쓰러뜨린 ‘검은 공자’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제국 제일의 천재로서 쌓아 올린 성취를.”
도발에 가까운 미하일의 말에, 데일이 침묵했다.
손에 들린 마검 ‘기아’는 어디까지나 마법을 잡아먹는 검이다. 마법이 아니라 오러를 활용하고 있는 기사에게는 어디까지나 보통의 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개의 흑색 아티팩트가 맞물린 지금, 데일이 꺼낼 수 있는 카드를 그로서는 상상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그 정도의 카드를 꺼내지 않고서는,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어차피 맞서게 될 상대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알기 쉬운 소꿉놀이가 아니겠지.
그렇기에 어설프게 카드를 감추고 패배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을 때 전력을 다하는 것이 낫다.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는 어둠의 호수에서, 새로운 그림자 피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복자(Lurker)가 아니었다.
《섀도우 나이트》…… 그림자의 기사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마검 ‘기아의 악의’였다.
두 어둠의 아티팩트를 맞물리며, 칠흑의 마검에 깃들어 있는 힘과 악의를 그림자 망토의 피조물에 덧씌운 것이다.
마검의 복제.
그렇게 복제한 마검 하나하나를 그림자 망토의 피조물에 쥐게 함으로써, 즉석에서 데스나이트에 맞먹는 전력을 꺼내 들었다.
게다가 《섀도우 러커》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데일이 펼치고 있는 어둠의 호수 밑에서, 미하일의 틈을 노리며 가시 촉수를 조준하고 있으니까.
작센 공작성의 대리석 바닥 일대를 어둠의 호수 속으로 수몰시키고, 그 위에서 솟아나는 그림자 기사와 잠복자들.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의 군세를 거느린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제 도발이 너무 지나쳤나 보네요.”
물량으로 압도하는 검은 공자의 군세 앞에서, 미하일이 흥미롭다는 듯이 대답했다.
쇄도하는 그림자 피조물들을 뒤로하고, 그 자리에 검을 세로로 내리꽂는다.
처음에는 일순 항복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백적의 오러가 깃들어 있는 피스메이커가, 미하일의 발밑을 중심으로 ‘어둠의 호수’를 걷어내고 있었다.
동시에 피스메이커에 깃들어 있는 평화의 빛이, 일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일체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평화의 강제》.
휘둘러지는 검이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화염이 살점을 불태우지 못하는 상처 없는 세계.
그것도 사상의 투영 같은 모조품이 아니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리지널의 힘이다.
엇박자로 휘둘러지는 데일의 그림자 피조물이, 마치 덧없는 허상처럼 미하일 랭커스터의 육체를 통과했다.
“평화의 중재자.”
피스메이커의 힘을 뿌리며, 미하일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손에 들린 애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이 검에 깃들어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이 세계의 평화를 손에 넣을 힘이지요.”
미하일의 말에 데일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소했다.
“그 평화의 중재자가 이 세계에 얼마나 커다란 피를 흘리게 했는지,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평화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미하일이 말을 이었다.
“일찍이 이 검을 가진 이계의 용사는, 저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지요.”
이계의 용사. 일순, 데일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꼭 이계의 용사가 우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어릴 때부터 저는 그를 동경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국의 영웅이니까요.”
미하일이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우리는 그가 손에 넣은 평화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용사가 손에 넣은 평화의 세계라고 하셨습니까?”
“평화를 바라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적어도 용사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지요.”
피스메이커가 흩뿌리고 있는 평화의 빛을 뒤로하고, 미하일이 말했다. 데일이 입술을 악물었다.
“이계의 용사를 너무 고평가하시는 것 같네요.”
“아니요, 이계의 용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제국의 평화를 바란 애국자였습니다.”
미하일이 말했다.
“그리고 저에게 희생 없는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지요.”
자신의 믿음에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올곧음을 갖고서.
“평화는 오로지 전쟁으로써 손에 넣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언제부터 평화란 말이 피바다의 이음동의어가 되었습니까?”
“틀립니까?”
미하일이 되물었다. 그 당당함에 데일은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피를 흘리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는 평화 따위가,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무심코, 일찍이 황도의 아카데미에 체류하고 있을 당시. 데일과 세피아를 향해 악의를 쏟아붓는 적색 마탑의 장로가 떠올랐다.
6서클의 적마법사, 염혈의 월터. 그가 부르짖는 광기에 찬 신념을 데일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피, 피, 오로지 피다!
──이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오로지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화는 오로지 전쟁으로써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남자의 광기와 무엇이 다를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데일 자신조차, 브리타니아 왕국의 국왕 샤를 7세를 조롱하며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기에 저는, 이 검으로 용사의 의지를 이어받아 완벽한 평화를 손에 넣기로 맹세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제국의 사냥개. 도살자. 일찍이 이계의 용사를 두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미하일 역시 모르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미하일의 표정에는 일말의 주저함조차 없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불과 빛의 제국. 미하일 랭커스터의 검, 피스메이커에 깃들어 있는 적백(赤白)의 오러야말로 ‘불과 빛의 색’ 그 자체였음을.
이것이 바로 제국의 정의였고, 평화였으며, 랭커스터 대공 가가 줄기차게 부르짖는 ‘잔혹한 고결함’의 실체였다.
흑색의 사도, 그림자 군주에 맞서…… 불과 빛의 사도가 그곳에 있었다.
“아무리 천하의 ‘검은 공자’님이라 해도, 이 검의 사상(思想)을 깨트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피스메이커의 힘을 과시하듯 흩뿌리며, 미하일 랭커스터가 말했다.
피스메이커의 사상. 평화의 힘. 보통의 검이 아니다. 그야말로 고위 마법사가 세계에 사상을 덧씌우는 것처럼, 마법에 가까운 힘을 행사하는 초상의 검.
‘마법에 가까운 힘……?’
바로 그때, 일순 데일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시험해볼 가치는 있다.’
그리고 망설일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피스메이커가 흩뿌리는 평화 속에서, 데일이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일체의 공격 행위를 무위로 되돌리는 피스메이커의 결계 속에서, 손에 들린 칠흑의 마검 ‘기아’가 휘둘러졌다.
데일은 일찍이 마검 ‘기아’가 보여준 능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을 잡아먹는 게걸스러운 탐식의 검.
피스메이커가 보여주는 초상의 힘은 결코 오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마법과 같은 힘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쨍그랑!
그렇기에,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게……!”
“미하일 공자님의 말대로입니다.”
미하일 랭커스터의 표정에 경악이 물들었다.
“평화를 바라십니까?”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데일이 대답했다.
“그럼 전쟁을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