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저는 그저 일개 괴물잡이에 불과합니다.”
괴물잡이 드레이크가 대답했다.
“그 검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는, 오히려 작센 자작님께서 부르시는 값이 더욱 정확하겠지요.”
짐짓 덤덤하게.
“어디서 이 검을 손에 넣으신 겁니까?”
“그저 운 좋게 손에 넣었을 따름입니다.”
“…….”
데일은 일순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운이 좋아서? 그럴 리가.’
S랭크의 모험가 ‘페이스리스’로서, 그가 이 마검을 가지고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5서클의 흑마법사조차 감당하지 못할 어둠의 아티팩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는 그 모습을.
짐짓 겸손을 가장하며,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나의 힘을 쓰지 않는 대륙 제일의 괴물 사냥꾼.
여러 가지 의미에서 보통내기의 남자가 아니었다.
“모험가 길드에 사람을 보내, 드레이크 경의 앞으로 대금을 지급해드릴 겁니다.”
데일이 말을 잇는다. 바닥에 세로로 꽂혀 있는 ‘기아’의 칼자루를 뽑아 들며.
“혹시라도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실 때는,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괴물잡이 드레이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작센 자작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저로서는 그저 영광일 따름입니다.”
“…….”
그 후 몇 마디의 짤막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데일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작센 자작이자 ‘검은 공자’의 이름에 걸맞은 외경을 뒤로하고.
데일의 손에는 굶주림의 마검…… ‘기아’의 칼자루가 들린 채였다.
* * *
그날 밤.
데일이 늦게까지 성의 집무실에서 마왕령의 업무를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데일.”
노크와 함께, 수정처럼 차갑게 빛나는 미모를 가진 여성 모습을 드러냈다.
사파이어색 머리카락 사이로 두 귀가 쫑긋 솟아 있는,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스승님.”
“이렇게 늦게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구나.”
세피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램프의 어스름 속에서 데일이 미소 지었다.
“혹시 내가 방해를 했느냐?”
“그럴 리가요.”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짤막하게 침묵이 내려앉았고, 침묵 끝에 세피아가 말했다.
“참으로 어엿하게 성장하고 있구나.”
해가 지나며 성장하는 데일의 모습에서, 어느덧 처음 보았을 때의 애티 어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마워요, 스승님.”
흐뭇함을 숨기지 않는 세피아의 미소에, 데일이 말없이 웃었다.
“이제 조금은 스승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었을까요?”
웃고 나서, 짐짓 짓궂게 되물었다.
“그, 그런 점이 아직도 어린아이란 거다.”
어둠 속에서 세피아의 뺨이 일순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부끄러움을 애써 뒤로하고, 세피아가 말을 잇는다.
“처음 아홉 살의 너를 보았을 때, 그리고 너의 재능을 깨달았을 때.”
제국 제일의 천재로서, 데일이 가진 재능의 형태.
데일이 처음 보여준 ‘아이스 볼트’를 세피아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일평생을 바친 이들이 쌓아 올린 그 이상의 살상력, 군용 수식(修飾)의 황금비.
사람을 죽이는 재능.
“너의 모습에서, 내가 알고 있는 어느 ‘괴물’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지.”
“…….”
“이계의 용사에 대해 알고 있느냐?”
그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끌려와 평생을 제국의 사냥개로 사육되고──.”
삼키고 나서, 데일이 대답했다.
“사냥이 끝나자 개처럼 버려졌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요.”
“그래.”
세피아 역시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가엾은 괴물이었지.”
“……!”
이어지는 세피아의 말은, 데일조차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동정이었고.
“동시에,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학살의 신’이었다.”
대학살의 신.
“나는 아직도 그가 보여준 지옥도를 잊을 수 없구나.”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에게 그 남자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나요?”
침묵 끝에, 짐짓 남의 일처럼 되물었다.
“글쎄다.”
세피아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흐렸다.
사람을 죽이는 재능.
얼핏 보기에 거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재능이나, 의외로 이 세계에 ‘살육의 재능’을 가진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당장에 기사가 검을 갈고닦는 것부터, 보다 사람을 잘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그 맥락에서 샬롯이 가진 검의 재능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자에게는 ‘보통의 강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었다.”
세피아가 말했다.
보통의 강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함.
“나도 정확히 그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구나.”
“…….”
“그저, 네가 가진 재능에서 그가 가진 ‘특별함’이 느껴졌다.”
데일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세피아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웃는다.
“적어도 너는 그 ‘특별함’을, 일찍이 그 남자처럼 그릇되게 사용하지 않으리란 것을.”
무심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데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세피아 님이 제 곁에 있어 주셨으니까요.”
데일이 대답했다.
“……네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세피아가 수줍은 듯이 미소 지었고, 그 모습에 데일도 말없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피아를 품고 싶은 욕망을 뒤로하고.
램프가 자아내는 어스름 속에서, 그날의 희고 어두운 겨울밤을 떠올리며.
* * *
데일이 그의 새로운 아티팩트이자 애검 ‘기아’를 손에 넣고, 그로부터 얼마 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뜻밖의 거물이, 북부 마왕령을 찾아왔다.
마왕령의 지배자, 작센 자작의 성.
“다시 뵙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네요.”
바로 그곳의 대회당에서, 잊을 수 없는 금발의 미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랭커스터의 미하일, 이곳에서 ‘검은 공자’…… 아니, 작센 자작님을 뵙습니다.”
랭커스터 가를 상징하는 문장(紋章), 백적의 장미가 새겨져 있는 금색 서코트를 흩날리며.
잔혹한 고결함.
“미하일 공자님.”
데일 역시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그럴 리가요.”
랭커스터의 미하일이 웃었다.
소드 벨트에 비스듬하게 차고 있는 칼자루 위로 손을 얹으며.
그러나 미하일이 미처 검을 뽑을 틈도 없이.
“……!”
데일의 곁을 보좌하는 두 여기사가 쇄도했다.
레이디 블랙, 검희 샬롯.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수제자이자, 신검의 딸로서 그 재능을 마음껏 꽃피우고 있는 여기사.
레이디 섀도우, 성처녀 오렐리아.
살검 마스터 바로의 가르침을 통해 ‘기사도’를 버리고, 철저한 암살자의 살검으로 거듭나 있는 여기사.
흑색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두 여기사가, 미하일이 발검(拔劍)할 틈조차 주지 않고 목과 가슴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샬롯의 손에 들린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 그리고 오렐리아의 손에 들린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두 사람 모두, 검을 거두어라.”
그러나 데일이 이내 팔을 뻗어, 두 여기사를 제지했다.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기사들을 두셨네요.”
미하일 역시 동요하지 않고, 미동조차 없이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다.
“아직도 그날, 파이트 클럽에서의 패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미소와 함께 미하일이 말을 잇는다.
“그날의 패배를 뒤로하고, 끝없이 저의 검을 갈고닦으며…… 공자님의 검과 마법을 마주하게 될 때를 기다렸지요.”
스릉.
“다시금, 작센 자작님에게 몇 수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미하일이 검을 뽑았다.
일말의 특징조차 없는 기사 검이, 창백한 서슬을 흩뿌렸다.
“……!”
동시에 그 검을 보고 데일이 숨을 삼켰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사상을 투영하는 일개 모조품 따위가 아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리지널이 그곳에 있었다.
평화의 중재자.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가…… 미하일 랭커스터의 손에서 서슬을 흩뿌린다.
“이 검에 대해 알고 계시는 모양이네요.”
데일의 동요를 깨닫고, 미하일이 의외란 듯이 대답했다.
“그 검의 명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부터 찾는 게 빠르겠지요.”
데일이 짐짓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어떻게 그 검이 이 남자의 손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국이 그들의 야망을 드러내기 전부터, 일찍이 제국에 충성을 바친 랭커스터 대공 가다.
제국의 전쟁 영웅 중 하나로서, 천검(天劍) 랭커스터 대공에게 ‘사냥개의 검’이 하사되고, 그 검을 그의 아들이 갖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마침 잘 되었네요.”
작센 자작성의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데일이 미소 지었다.
즉석에서 미하일의 결투 요청을 받아들이며.
“저 역시 새로운 애검을 막 손에 넣은 참이니까요.”
“호오.”
그날, 아티팩트의 폭주를 저지하고 손에 넣은 칠흑의 마검.
데일이 소드 벨트에 비스듬히 매달린 ‘기아’의 칼자루를 뽑았다.
작센 가의 흑검을 방불케 하는, 칠흑의 검신(劍身)이 어둡고 불길한 서슬을 흩뿌렸다.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날, 파이트 클럽에서 승리를 손에 넣은 데일이었으나.
엄밀히 말해 그날의 승리는 순수하게 실력으로 쟁취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성장하는 것은 데일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하루하루 속에서, 성장의 속도마저 동등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걱정스러운 듯 데일을 말리려는 두 여기사를 뒤로하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데일이 ‘기아’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때처럼 아바타나 사상의 세계를 전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여흥의 일부로서 펼쳐지는 결투다.
그러나 두 사람 정도의 강자가 격돌하는 결투는, 결코 알기 쉬운 형태의 모의 결투가 아니었다.
찰나의 방심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진검 승부.
“그날, 잃어버린 팔을 되찾으신 모양이네요.”
무심코, 검을 쥐고 있는 데일의 팔을 보며 미하일이 말했다.
“아, 그럴 리가요.”
그러나 그 말에 데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날, 파이트 클럽의 결승에서 승리를 넣기 위해 희생한 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적어도 ‘흑색 마탑의 기준’에서 팔다리 몇 짝을 잃는 것은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흑색 마탑의 기술로 육체 몇 조각을 수복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아직까지도 그날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지요.”
“……!”
‘기아’를 쥐고 있는 데일의 팔이, 마치 검의 어둠에 동화하듯 흑색의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팔.
마음먹을 경우, 흑색 마탑의 기술로 팔을 수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길드 시티에서 체류하는 사이, 데일의 육체 일부로 거듭나 있는 ‘그림자 의수’의 가치를 비로소 이해했기에.
데일의 그림자 의수가, 마검 ‘기아’와 동화하며 어둠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미하일 랭커스터의 손에 들린 데일의 옛 애검, 피스메이커가 평화의 빛을 내뿜었다.
기억을 더듬고 사상을 투영해 그 힘을 흉내 내고 있는 모방품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힘에 깃들어 있는 위력.
작센 자작성의 대회당 위에서, 미하일 랭커스터가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데일의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일대를 어둠의 호수 속으로 수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