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 *
희고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 홀로 우뚝 솟은 칠흑의 성채.
그 성의 고독한 성주가, 그곳에 있었다.
음울한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의 대회당.
중세 고딕 양식의 대성당처럼, 음울하기 그지없는 장엄으로 가득 차 있는 성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다랗게 솟은 흑금(黑金)의 옥좌가 보였다.
‘검은 공자’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시린 냉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대지 위가 아니라, 바로 그 성에 군림하는 성주로서.
고독의 성채.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새롭게 덧씌워진 사상의 세계.
폭주하는 어둠의 아티팩트와, 그것이 숙주로 삼고 있는 흑마법사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불청객을 배제하기 위해, 데일의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백의 대지 위에 세워 올린 고독의 성채, 다시 말해 이곳은 ‘데일의 제국’이었고.
“일어나라, 나의 기사들아.”
군주의 명령에 따라, 절대로 쉬지도 멈추지도 않는 불사의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죽은 기사들의 수도회》.
동시에 흑마법사의 손에 들린 칠흑의 검이 휘둘러졌고, 재차 흑색의 꽃잎을 흩날렸다.
그러나 흩뿌려지는 흑색 꽃잎이, 데일의 세계에 무엇을 덧씌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 바깥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시린 냉기와 어둠이, 대회당의 실내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주위의 기온이 하강했고, 실내 일대에 하얗게 얼어붙은 서릿발이 끼었다.
이곳은 ‘검은 공자’의 세계이자, 제국이었고, 요새였으며.
열네 살의 데일이 쌓아 올린 세계는, 폭주하는 일개 어둠의 아티팩트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데일의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어둠의 아티팩트가 폭주를 일으켰고, 그 숙주가 되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있다.
그렇기에 데일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촤아악!
사방에서 「자동화 수식」을 통해 용사의 무위를 투영하고 있는 데스나이트가 쇄도했다.
검을 쥐고 있는 흑마법사의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갔다.
숙주를 잃어버린 칠흑의 마검이, 그대로 대회당의 대리석 바닥을 향해 세로로 내리꽂혔다.
“아, 아아아……!”
팔을 잃어버린 흑마법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비로소 의식을 되찾는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그가 미처 주위를 살필 겨를조차 없이,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그대가 있을 곳이 아니다.”
데일이 말했고, 흑마법사의 존재가 ‘사상 세계의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강제 추방.
잘린 팔의 상처를 치료하고 육체를 수복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이들의 몫이 되리라.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숙주를 잃고, 바닥에 세로로 꽂혀 있는 칠흑의 검.
바로 그 마검을 향해,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데일이 꽂혀 있는 검의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키에에에엑!」
그림자 망토가 미친 듯이 펄럭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일순, 의식이 떠나갈 정도의 두통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처음 그림자 망토를 걸쳤을 때처럼…… 아니, 그 이상의 어둠을 갖고, 검에 서린 악의가 데일을 숙주로 집어삼키기 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나를 굴복시키고 싶지?”
데일이 입을 열었다.
마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에게 말을 걸듯이.
아티팩트의 칼자루가 다시금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에게 기회를 줄 테니, 어디 굴복시켜 봐라.”
칼자루의 떨림 속에서 데일이 말했다.
쥐고 있는 칼자루를, 흑백의 대리석 모자이크 타일 위로 내리꽂으며.
동시에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일대를 수몰시키듯 어둠의 호수를 생성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둠의 호수 속에서, 팔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의 형태’가 솟아올라, 데일이 내리꽂은 마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그림자 피조물, 섀도우 워커.
─ 키, 키히히히.
그림자 피조물이 마검의 칼자루를 쥐었고, 아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림자 기사(Shadow Knight)’가 데일의 앞에 있었다.
데일에게 복종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마검의 악의에 따라 움직이는 ‘또 하나의 숙주’로 거듭나서.
저 마검에게 있어서는, 일개 마법사의 육체와 비교를 불허하는 최고의 숙주였고.
악의로 가득 차 있는 아티팩트에게, 그 힘을 100% 발휘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제공해준 것이다.
참으로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
그러나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힘을 파악하는 데 이것보다 좋은 게 없지.’
오히려 데일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강자와 맞설 수 있다는 호승심이었다.
마족의 어둠으로 벼린 검.
마족이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오크 등 일정 이상의 지능을 가진 괴물들의 총칭이다.
그중에서도 보통 마족과 ‘고위 마족’을 구별하는 것은 바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냐 없냐에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불이나 물, 빛 등을 사상의 토대로 삼아 마법의 체계를 쌓아 올리듯이…….
고위 마족들도, 그들 나름의 체계를 갖고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를 사상의 토대로 삼아.
사람들이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을 두려워하고 경시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고위 마족의 사상을 받아들여 계승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림자, 어둠, 빛의 부재.
엄밀히 말해, 지금의 흑색 마탑과 작센 가를 있게 해준 것은 ‘마족의 사상’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으니까.
마왕령의 아티팩트들이 하나같이 ‘그림자의 힘’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이었다.
아마 마족이 제국에 마탑을 세울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들이 세울 마탑은 아마 ‘그림자 마탑’이 되겠지.
마탑의 마법사들이 색상에 따라 적마법사(Pyromancer)나 청마법사(Wizard), 흑마법사(Necromancer)와 백마법사(Cleric), 녹마법사(Druid)의 이름으로 불리듯이.
‘그림자술사(ShadowCaster)’라 불리는 고위 마족들의 악명을, 데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술사’들이 힘을 불어넣은 아티팩트 중 하나가 바로, 데일의 애장 ‘그림자 망토’였고.
나아가 저 앞에 있는 칠흑의 마검도 예외가 아니리라.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올 자.’
‘흑색의 사도이자, 그림자 군주.’
무심코 ‘그림자 교회’의 성녀가 데일에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어째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시커멓고 어두컴컴하냐.’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칠흑의 마검이 조종하는 ‘그림자 기사’가 쇄도했고, 데일 역시 그의 검을 뽑아 들고 맞받아쳤다.
카앙!
칼날을 따라 피스메이커의 사상을 투영하며, 용사의 검이 칠흑의 마검과 격돌했다.
일체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는 《평화의 강제》가, 일대의 법칙을 뒤틀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러나 일찍이 미궁 심층의 괴물들이 그러했듯이, 칠흑의 마검에 깃들어 있는 힘은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림자 기사의 손에 들린 마검이 미끄러지듯 쇄도했다.
‘짝퉁이 그럼 그렇지, 뭐.’
거리가 좁혀졌고, 데일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흑색 총신을 따라 어둠의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 일격이, 그림자 기사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쏟아지는 어둠의 총알들이, 마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블랙홀이 주위의 빛을 일제히 끌어당기듯이, 마검의 중력이 데일의 ‘섀도우 불릿’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직후, 그림자 기사가 허공에서 칠흑의 마검을 휘둘렀고.
블랙홀 속으로 삼켜진 수십 발의 ‘섀도우 불릿’이, 역으로 데일을 향해 쏘아졌다.
타앙!
총알 몇 발이 데일의 몸 곳곳에 벌집을 냈고,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피해, 데일의 육골(肉骨)이 무너져 내렸다.
망령화.
실체를 잃고 무너져 내린 데일의 육체가, 어둠의 유체가 되어 재빠르게 거리를 벌린다.
발밑을 따라 소용돌이치는 흑청의 마력이, 재차 그림자 기사의 ‘마검’을 향해 마법이 되어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 마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내 마법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다.’
그야말로 블랙홀처럼.
저것은 일개 그림자 따위가 아니었다.
일체의 사상을 집어삼키는 게걸스러운 탐식의 마검.
‘기아(Hunger)…….’
벌어져 있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림자 기사가 땅을 박찼다.
손에 들린 칠흑의 마검 ‘기아’가 휘둘러졌다.
카앙!
그러나 그 쇄도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흑검(黑劍)이 있었다.
아니, 하나의 흑검이 아니었다.
십수 자루의 흑검들이, 그리고 그 흑검을 쥐고 있는 죽음의 기사들이.
침묵 끝에, 그들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하나하나에 용사의 무위가 깃들어 있는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그림자 기사’를 포위하고 쇄도했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흡수할 수는 없는 것 같네.’
비록 데일의 세계에 존재하는 데스나이트는 실재가 아니라, 그저 ‘심상의 실체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위 마법사가 사상의 세계를 전개하고, 철저하게 적을 배제하기 위한 ‘무기의 형태’로 활용할 때.
역량에 따라, 마법사는 그 세계에서 신과 같은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고위 마법사들 사이의 싸움을 ‘세계와 세계의 격돌’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듯이.
시린 냉기와 어둠의 동토 속에서, 공백의 대지 위에 세워 올린 고독의 성채는 바로 그 ‘힘의 상징’이었다.
데일의 제국.
일개 기사가 국가를 상대로 승리할 수는 없다.
설령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마법을 잡아먹는 검’이라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마법을 잡아먹을 수는 있어도, 세계마저 잡아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
데일의 세계에서, 그들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투입되는 불사의 기사들.
데스나이트의 군세가, 헤아릴 수 없는 작센의 흑검이, 칠흑의 마검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곳은 데일의 제국이었고, 그 제국에 맞서는 것은 고작 ‘일개 기사 하나’에 불과하다.
그림자 기사를 향해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가 내리꽂혔고, 작센의 흑검에 그림자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피를 흘리는 일도 없이, 육골이 조각나는 일조차 없이.
손에 들린 칠흑의 마검이, 재차 대회당의 대리석 모자이크 타일 위로 내리꽂혔다.
데일이 걸음을 옮겨, 그대로 마검 ‘기아’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겁을 먹고 움츠린 아이처럼, 바늘로 찌르는 정도의 사소한 악의가 느껴질 따름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굴복.
‘마법을 흡수하는 검이라.’
어느 정도까지 집어삼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손에 넣을 가치가 있는 것은 명백했다.
사상의 세계를 해제하고, 비로소 미궁도시의 풍경이 주위로 돌아왔다.
“자, 작센 자작님께서 아티팩트를…….”
‘기아’를 쥐고 있는 데일의 모습을 보고,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티팩트의 폭주는 저지했습니다.”
칼자루를 빙글 돌려 역수로 고쳐 잡고서, 검을 바닥에 내리꽂는다.
“역시 작센 자작님이십니다……!”
“5, 5서클의 흑마법사도 어쩌지 못하는 아티팩트를!”
흑색공의 아들, 작센 가의 후계자, 누가 감히 그 이름을 의심할 수 있을까.
데일이 고개를 돌린다.
느닷없이 벌어진 소란에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서 마침 지나칠 수 없는 자가 보였다.
“괴물잡이 드레이크 경.”
마검 ‘기아’의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데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작센 자작님.”
‘괴물잡이 드레이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데일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 검, 얼마에 파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