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08화 (108/301)

108화

* * *

작센 공작령 너머의 북부 마왕령.

아버지 대(大) 작센 공작의 대리자로서, 소(小) 작센 자작이 다스리고 있는 영지.

“우리는 죽어서도 제자리에서 죽는다!”

“절대로 대형을 무너뜨리지 마라!”

블랙아머 컴퍼니가 자랑하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 대형’ 속에서, 홀로 걸음을 옮기는 자가 있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구울 무리를 앞두고, 작센 자작……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마왕령의 영주.

‘검은 공자’가 손가락을 튕겼고, 발밑에서 흑청의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일대가 어둠의 호수로 물들었다.

그 직후, 구울 무리가 데일의 코앞까지 다가섰을 즈음.

「키에에에엑!」

어둠의 호수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 잠복자’가 괴성을 내뱉었다.

촤아아악!

《섀도우 러커》들이 일제히 가시 촉수를 내뿜었다. 사방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가시 촉수가 구울 무리의 육골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잘려도 좀처럼 멈추는 법이 없으며, 일개 망자 이상의 속도와 힘을 자랑하는 괴물. 마왕령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그 망자들조차,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공장 믹서기 속에 넣어져 갈가리 찢어지듯이, 끝없는 파쇄(破碎)가 휘몰아쳤다. 가시 촉수가 휘몰아칠 때마다, 육체를 가동하기 위한 최소의 형태마저 남기지 않고 으스러졌다.

사람들이 말하길, 마왕령의 대지에는 알 수 없는 어둠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둠조차, 그들 앞에 있는 ‘검은 공자’가 보여주는 어둠 앞에서는 너무나도 초라할 따름이다.

어둠을 집어삼키는 더욱 커다란 어둠.

그 모습을 보고, 블랙아머 컴퍼니의 중장갑 보병대가 숨을 삼켰다. 공포, 그리고 경외.

“대장께서 적들을 소탕하셨다!”

“남아 있는 잔당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절대로 대열을 무너뜨리지 마라! 우리는 죽어도 제자리에서 죽는다!”

블랙아머 컴퍼니의 중장보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대장이며, 이 마왕령을 다스리고 있는 ‘검은 공자’의 힘이었으니까.

* * *

미궁도시 라비린토스.

일찍이 그 규모를 알지 못하는 ‘대미궁’의 범람을 저지하기 위해, 과거의 작센 공작이 쌓아 올린 요새. 새로운 마왕령의 영주로서, 데일은 그 요새를 도시의 형태로 개조 · 확장해, 작센 자작령의 주도(主都)로 삼았다.

마왕령을 개척하는 핵심 요충지이자, 작센 자작의 성이 있는 곳.

그 도시의 거리 위를, 구울 무리를 쓰러뜨린 ‘작센 자작’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작센 공작 가를 상징하는 밤까마귀 기사, 그리고 블랙아머 컴퍼니의 중장갑 보병대를 거느린 채.

이제 막 14살 생일을 맞은 어린 영주. 아버지 작센 공작과 구별하기 위해, 소(小) 작센 자작의 이름으로 불리는 작센의 데일.

그러나 미궁도시에서 감히 작센 자작, 내지는 ‘검은 공자’를 우습게 보는 자들은 없었다.

아티팩트 러시. 마왕령에서 일확천금의 보물을 좇아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 욕망의 구렁텅이는 응당 무법의 소용돌이를 자아내는 법이다.

그럼에도 미궁도시 라비린토스가 그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였다.

마왕령의 영주로서, 작센의 데일이 쌓아 올린 공포의 질서였다.

아버지 작센 공작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공포는 충성을 보장하는 법이니까.

* * *

작센 자작의 성.

‘작센 공작의 대리자’로서, 데일이 옥좌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공작성을 나와, 마왕령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이자 작센 자작성의 성주(城主)가 되어.

좌우로 늘어서 있는 것은 작센 자작을 향해 충성하는 데일의 사람들이다.

옥좌의 곁을 지키는 데일의 충성스러운 두 여기사.

레이디 블랙(Lady Black), 검희 샬롯.

레이디 섀도우(Lady Shadow), 성처녀 오렐리아.

흑색 갑주와 투구로 정체를 숨겨, 보통 사람들이 그녀들의 정체를 알 리는 없다. 그리고 설령 갑주가 여성의 굴곡을 갖고 있다고 해서, 감히 그녀들의 검을 의심하려는 자들은 없었다.

일찍이 그녀들이 ‘여기사’란 사실을 알고 술 취한 모험가들과 시비가 걸렸을 때, 그들이 맞이한 결말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누구도 아니고 천하의 ‘검은 공자’를 곁에서 호위하는 검이다. 상식이 없지 않고서야, 그녀들의 무위를 얕잡아볼 멍청이들은 없으리라.

나아가 데일의 믿음직스러운 가신(家臣)들도 그곳에 있었다.

어느 때나 데일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보좌하며, 아낌없는 충고를 해주는 엘프 마법사 세피아. 바스커빌의 베일 경을 필두로 데일에게 충성하는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들.

아울러 성장하는 것은 데일 하나가 아니었다.

베일 경 역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아바타를 손에 넣고 《그레이브 가드》의 일부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처녀 오렐리아와 더불어 ‘검은 공자’를 보좌하는 데일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아가 블랙아머 컴퍼니를 지휘하는 부대장, 케넷의 요네스 경.

북부 마왕령의 개척에 따라, 정예 척후대 ‘겨울 파수꾼’ 역시 개척의 기수를 자처하며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부대 전체가 작센 자작 직속의 첩보대로 거듭나서.

끝으로 작센 자작의 곁에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나…… 그림자 속에서 ‘검은 공자’의 뜻을 집행하며, 기꺼이 그들의 손을 더럽히길 주저하지 않는 ‘암살자의 검’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림자 법정.

모험가들 사이에서 도시 괴담처럼 퍼지고 있는 사법의 집행자.

아티팩트 러시. 모험가들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북부 개척시대’의 막이 열렸고, 마왕령의 개척 사업은 적어도 데일의 질서 속에서 무척이나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그날 새벽.

밤이 깊었고, 데일이 홀로 영주성의 일실을 빠져나왔다.

평소에는 흑색 서코트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어느덧 데일의 정체를 가리기 위한 흑색 로브의 형태로 의태하며.

후드 밑으로 그림자가 내려앉았고, 흑색 로브 차림의 남자가 성을 나섰다. 그를 지켜줄 호위 하나 없이, 작센 자작성을 빠져나와 미궁도시의 거리로 향했다.

밤이 깊었음에도 도시의 불꽃은 좀처럼 꺼지는 법이 없다. 일과를 마치고 주점에서 떠들썩하게 소리치는 용병들이 있었고, 밤이 깊은 지금이야말로 ‘일확천금’을 얻고자 대미궁 속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있었다.

적어도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에는 낮과 밤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밤에도 도시를 밝히는 불꽃이 꺼지지 않고, 낮에도 미궁 속의 어둠은 밤처럼 깊고 어둡다.

그러나 낮에는 데일 역시 ‘영주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비로소 그 일과를 마무리 짓고 혼자가 될 때. 데일 역시 그의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 대미궁의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 *

《페이스리스(Faceless)》.

적어도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느닷없이 미궁도시 제일의 실력자 중 하나로 이름을 떨치는 모험가.

그가 미궁도시의 ‘모험가 길드’에서 최초로 모험가 자격증을 손에 넣고, 최고 등급의 실력자라 불리는 S랭크에 도달하기까지는 불과 몇 주 사이의 일이었다.

파티를 맺는 일 없이 미궁도시의 심부로 들어가 차례차례 고위 괴물을 사냥하고, 최소 하나 이상의 아타팩트를 손에 넣기 전까지 절대로 미궁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설 같은 일화까지.

얼굴 없는 자.

후드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 아무도 그 너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

혹자는 그가 정체를 숨기고 수행하는 대륙 칠검(七劍)의 일좌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대륙의 이름 있는 ‘괴물 사냥꾼’ 중 하나라 믿는 자들도 있었다.

미궁도시의 사람들은 저마다 《페이스리스》의 정체에 대해 나름대로 하나씩의 심증을 갖고 있었고, 개중에는 의외로 정답을 맞춘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정답을 입에 담을 때마다, 설마 천하의 ‘검은 공자’가 호위 하나 없이 미궁에 들어가겠냐며 조롱을 받기 일쑤였다.

바로 그 설마였다.

* * *

《대미궁(Great Labyrinth)》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과거에는 마왕 발로르가 쌓은 지하 요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나, 일찍이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린 직후.

비로소 대미궁의 깊은 곳까지 진출한 제국은, 그것이 일개 마족들의 구조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나아가 용사를 비롯한 제국 제일의 강자들조차 대미궁을 정복할 수 없었다.

공략 실패의 7할 정도는 거기에 엮여 있는 정치적 상황 덕이었다. 작센 공작의 출혈을 강요해야 하는 제국으로서는, 이 일대의 어둠이 뿌리뽑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3할 정도는, 천하의 용사조차 리스크를 짊어져야 할 정도의 위협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애초에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는 대미궁의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니나, 크고 작은 미궁들이 생겨나고 있다.

개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을 얻고 있는 것은, 미궁이 ‘고대 마족들이 쌓아 올린 구조물’이란 것이며…… 지각의 융기(隆起)를 통해 지상으로 입구가 드러내는 것이, 미궁의 발생이란 추측이다.

호사가들은 지금도 미궁 심층이나 다크 랜드의 가장 깊숙한 곳에, 마왕 이상의 힘을 가진 ‘고대 마족’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짐짓 두렵게 떠들어댔다.

* * *

괴물이 있었다.

대미궁 심층의 어둠 속을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는 괴물.

이 괴물들에게는 마땅히 이름이 없다. 바다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정체불명의 심해어처럼 형태도 제각각이며, 동종(同種)의 괴물을 목격하는 일일조차 좀처럼 드무니까.

이름 그대로의 괴물. 하나같이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이형의 생김새.

이곳에서는 괴물 하나를 사냥하는 데에도 전력을 다해야 했고,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이 무리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흡사 불교에서 말하는 아수라(阿修羅)처럼, 여섯 개의 팔이 달린 괴물이었다. 그리고 여섯 개의 팔에는 저마다의 무기가 하나씩 들려 있다.

그 앞에서, S랭크 모험가 ‘페이스리스’가 그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일말의 특징조차 없는 기사 검이었고, 그 검에 깃들어 있는 사상의 형태는 그렇지 않았다.

용사의 검, 피스메이커.

카앙!

아수라의 여섯 팔에서 일격이 휘둘러졌고, 여섯 자루의 무기가 엇박자로 휘둘러졌다.

육참(六斬).

동시에 피스메이커의 힘이 일대의 물리법칙을 뒤틀었고, 그 법칙 속에서 아수라의 검은 ‘페이스리스’에게 닿지 않았다. 일체의 공격을 무효로 되돌리는 《평화의 강제》.

그러나 그 힘이 작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찰나였다.

카앙!

휘둘러지는 육참이, 피스메이커가 일대를 덧씌우고 있는 《평화의 강제》를 깨트린다. 데일의 애검에 깃들어 있는 초상의 힘을, 그에 걸맞은 ‘알 수 없는 힘’으로 맞받아쳐 깨트리는 것이다.

‘바로 이거다.’

마족이 괴물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기는 하나, 역으로 괴물 모두가 마족은 아니다. 마족이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정 이상의 지능을 가진 괴물의 총칭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이 괴물에게는 지성이 없다. 오크처럼 무리를 짓고 그들 종족의 사회를 형성하지도 않고, 유기적 전술을 보여주는 일조차 없다.

동시에 ‘일개 마족’하고 비교를 불허하는 힘을 갖고, 정처 없이 미궁을 방황하는 정체불명의 존재.

피스메이커의 능력이 소멸하고, 비로소 ‘페이스리스’…… 데일의 표정에 흥미가 깃들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이 존재들이 보여주는 알 수 없는 힘의 정체.’

나아가 대미궁에 숨겨져 있는 비밀.

작센 가의 둘도 없는 공자님이자, 작센 자작이 호위 하나 없이 홀로 이 미궁을 향하는 까닭.

일찍이, 용사 시절의 데일이 이곳에서 겪은 기억을 떠올렸다. 나아가 이 지성 없는 파괴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낯익음’을 곰곰이 되새겼다.

후웅!

휘둘러지는 여섯 자루의 검을 맞서, 데일의 피스메이커가 휘둘러졌다. 쏟아지는 검격을 맞부딪칠 때마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기억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용사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되고, 무의식의 가장 깊숙한 장소에 잠들어 있는 무엇. 지금에 와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야 할 그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금의 데일, 나아가 전생의 용사를 있게 해준 최초의 힘.

‘괴수 사냥꾼(Hunter)’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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