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 *
“너에게 작센 공작령의 영지를 하사할 생각이다.”
열세 살 생일을 맞은 데일에게, 작센 공작이 내려준 것은 그야말로 공작 가의 수저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영지를…….”
이미 작센 공작의 대리자로서, 자작의 작위를 가진 데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활동을 위한 포석이었지, 실질적으로 데일에게 영지가 내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영지에 묶여 있는 것보다, 데일에게는 대륙을 돌아다니며 수행해야 할 역할이 더 중요했으니까.
‘검은 공자’의 이름을 알리고 끝없이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 나아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수중에 넣기 위해.
그러나 열세 살 생일을 맞아, 작센 공작이 ‘데일의 영지’를 이야기했을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 그림자 법정의 수뇌부가 손에 들어왔으며…… 일천 명의 중장갑 보병대로 이루어져 있는 무적의 흑갑(黑鉀) 용병대, 블랙아머 컴퍼니를 거느린 대장이었고.
검희 샬롯, 성처녀 오렐리아를 비롯한 믿음직스러운 검들이 데일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바스커빌의 베일 경을 비롯한 데일 직속의 밤까마귀 기사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어느 때나 의심 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는 스승, 엘프 마법사 세피아까지.
작센 공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데일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터무니없는 수준의 전력을 갖추고 있는 데일의 세력. 어느덧 작센 가의 장남이 가진 것은 일개 중소 귀족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것을 헤아린 작센 공작이 그에 맞추어 영지를 하사하려는 것이다.
데일의 세력이 자리 잡고 뿌리내릴 수 있는 터를. 그렇기에 망설일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공작령 내에 달리 마음에 두고 있는 곳이라도 있느냐?”
“네, 무척 탐이 나는 곳이 있습니다.”
“호오, 말해보아라.”
테이블 위에 제국의 지도가 놓여 있었고, 바로 그 지도의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작센 공작령’이 보였다. 시야를 위로 옮기자, 작센 공작령의 위를 가로막고 있는 하얀 산맥 일대가 드러났다.
하얀 산맥 위로는 ‘구 마왕령’을 시작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암흑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다크 랜드(Dark Land).
일찍이 용사가 ‘마왕’이라 불린 존재를 토벌했을 때, 대륙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제국 수뇌부가 깨달은 것은, 마족 중 일부가 ‘다크 랜드’의 척박한 환경으로부터 살아남고자 대이동을 감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황실은 작센 공작령에게 ‘마왕령’을 봉토로 수여하고, 제국의 땅으로 개척하란 억지에 가까운 명령을 내리고 있다.
데일이 어릴 적에는 마왕령을 개척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시도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개척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에 와서는 하얀 산맥에 겨울 파수꾼을 주둔시켜 마왕령 일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천하의 작센 공작조차 손에 넣지 못한 불모(不毛)의 대지.
“이곳, 마왕령 일대의 영지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 땅을 가리키며, 데일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그러나 데일의 말에, 작센 공작은 당황하는 일조차 없이 쓴웃음을 지을 따름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놀라지 않으시네요.”
“이 정도로 일일이 놀라기에는, 이미 네가 보여준 놀라움들이 너무나도 많구나.”
작센 공작의 출혈을 강요하기 위해, 황실은 의도적으로 마왕령의 어둠을 뿌리 뽑지 않았다.
“이곳 마왕령을 손에 넣어서, 어떻게 할 셈이냐?”
“이곳에 저의 자작령(子爵領)을 세우고, 마족의 위협을 방어하는 방패가 될 겁니다.”
“마왕령에는 지금도 헤아릴 수 없는 미궁과 방황하고 있는 괴물들이 있다. 요새를 쌓는 것은 몰라도, 그 영토에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쌓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겠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나 대륙에는 지금도 일확천금의 기회를 좇아 방황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실력자들이 있습니다.”
길잡이(Pathfinder), 괴물 사냥꾼, 용병, 이 세계에서 길 위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기약 없는 살아가는 모험가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꼭 농작물을 수확하는 형태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일찍이 ‘마왕령’의 어둠을 가장 앞서 파헤치고, 마왕을 쓰러뜨린 데일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보물들의 가치가 알려질 경우, 말 그대로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러시를 방불케 하리라.
“그 행위가 갖는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작센 공작이 무겁게 되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령에 잠들어 있는 재보를 세상에 알리고, 대륙의 모험가들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
“그러나 그럴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작센 공작의 고립주의를 깨트리고, 개방주의로 나아가는 것.
“저희는 어디까지나 모험가들을 보조하고,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을 지켜주는 데서 그칠 겁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구상이구나.”
“사람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생물이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대륙의 수많은 모험가들을 일제히 설득할 방법이 있는 것이냐?”
“있습니다.”
작센 공작의 물음에, 데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길드 시티에서 열리는 거대 장터에, 적지 않은 숫자의 모험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센 공작령 너머, 마왕의 땅에서 목숨을 걸고 손에 넣은 아티팩트와 보석들을 쥐고서.
바로 그 어둠의 재보를 놓고 길드 시티의 일곱 마스터들이 앞다투어 천금의 입찰 경쟁을 벌였으며,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모험가들이 손에 넣은 마왕령의 재보들이, 일곱 도시와 대 길드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길드 시티가 제국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는 조직망을 타고, 천 리를 내달리는 발 없는 말이 되어서.
‘작센 공작령에서 실력 있는 모험가들을 모집하고 있고.’
‘북부 마왕령에는 아직도 헤아릴 수 없는 미궁과 아티팩트들이 잠들어 있다.’
‘아티팩트 하나를 손에 넣는 것으로, 3대가 놀고먹을 정도의 떼부자가 될 수 있다.’
‘설령 실력 없는 모험가라도, 하급 괴물을 사냥하는 것부터 천천히 성장할 수 있다.’
‘괴물을 피해, 운 좋게 미궁에 있는 보석 하나를 캐내도 평생을 풍족히 먹고 살 수 있다.’
시티 마스터의 특명에 따라, 일곱 대 길드가 지부를 두고 있는 곳마다 ‘마왕령의 보물’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길드 시티의 조직망을 통해, 나아가 용병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목숨을 걸고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기회의 땅. 아티팩트 러시.
‘북부 개척시대(Wild North)’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 * *
이듬해, 데일의 열네 살 생일이 찾아왔다.
* * *
미궁도시 라비린토스.
북부 마왕령의 ‘대미궁’ 위로 쌓아 올린 기회의 도시.
거리마다 북적거리는 모험가들이 있었고, 미궁도시 일대에는 바로 그 모험가들이 ‘개척 농부’를 겸업하며 겨울 작물로 동토를 일구기 시작했다.
게다가 교회 역시 ‘마왕의 땅을 개척하는 것은 여신께서 바라는 행위’라며, 여신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다수의 개척 수도사들이 차례차례 합류했다. 니콜라이 추기경의 불꽃과 같은 열정에 감복해, 자매신의 사역자(四役者)를 자청하며.
사람이 모이고, 도시가 생기며, 재화가 돌고 있다. 이제는 누구도 이곳을 감히 북부의 벽지라 부르지 않았다.
길드 시티를 비롯해 대륙 각지의 거대 상회들이, 곳곳에 그들의 지부를 세워 올리고 있다. 미궁도시의 거리마다 빼곡하게 층을 쌓아 올린 주점 등의 각종 시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이 작센 공작이 마왕령을 개척하기 위한 거점 요새를 개조해, 도시의 형태로 확장을 거듭함으로써.
그리고 그날, 미궁도시 라비린토스에 있는 ‘소(小) 작센 자작’의 영주성.
바로 그 영주성의 옥좌에, 데일이 앉아 있었다. 정식으로 북부 마왕령 일대를 지배하는 ‘작센 자작’이 되어서.
데일이 아버지 대(大) 작센 공작의 대리자로서 하사받은 작위.
블랙아머 컴퍼니는 작센 자작…… 데일과 정식으로 장기 계약을 맺고, 마왕령(작센 자작령) 일대를 정식으로 수호하는 경비대로 거듭났다.
해를 거쳐, 데일이 구상하고 있는 북부의 개척 사업은 날이 갈수록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립이 아니라, 개방을 택함으로써.
작센 공작의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데일이 이처럼 개방을 택하고 영지의 부흥을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 흑색공이 고립을 택하며 쌓아 올린 작센 가의 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니까.
아버지가 쌓아 올린 것을 받아 계승하는 것은 아들의 몫이었다.
마왕령의 지배자.
정식으로 그곳이 작센 자작령의 이름을 갖고 있음에도, 이 땅의 이름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곳 영지를 지배하고 있는 ‘검은 공자’의 악명과 공포를 경외하며.
그리고 데일 역시, 그의 영지를 ‘마왕령’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작센 자작님.”
그즈음. 데일을 향해, 마왕령 일대를 감시하는 ‘겨울 파수꾼’이 보고를 올렸다.
산속에 주둔하고 있는 일개 산악 경비대의 처지에서 벗어나, 작센 자작 직속의 첩보대(諜報隊)로 거듭나서.
“도시 북쪽의 개척 수도회를 노리고, 구울 무리가 대규모 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보고를 듣고, 바스커빌의 베일 경이 입을 열었다.
“기사령(騎士領) 일대에 소집을 내릴까요?”
“구울들의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일천 남짓의 수준입니다.”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베일 경, 성내에 있는 가신 기사들을 호출하세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요네스 경, 블랙아머 컴퍼니에서 중장보병 이백 명을.”
“대장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모험가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감당하고, 그렇지 못한 위협을 지키는 것은 ‘작센 가’의 몫이다. 그렇기에 데일이 몸을 일으켰다.
작센 자작성의 성주이자, 이곳 마왕령의 지배자로서.
데일의 곁을 보좌하며, 흑색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검희가 그 뒤를 따랐다.
레이디 샬롯.
비록 투구에 가려져 그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밤까마귀 기사를 상징하는 흑색 갑주 위로, 숨기지 못하고 부풀어 있는 가슴에서 알 수 있었다. 열네 살의 나이를 맞아 성장하고 있는 그녀에게, 더 이상 그 시절의 애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좌우로 늘어서 있는 작센 자작령의 가신(家臣)들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데일의 첫 구상, 이곳 마왕령에 데일의 세력이 터를 잡고 ‘기회의 도시’를 세워 올리는 것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다.
기실, 도시가 부흥하고 모험가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은 고작 몇 달 사이의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괴물,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갈등이 하루가 멀다고 데일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으니까.
어둠의 힘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땅에서, 데일이 마주하게 될 위협 역시 이제 맛보기에 불과하다.
아무 이유 없이 천하의 작센 공작이 ‘마왕령’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 ‘작센 자작’의 작위를 하사받고, 마왕령을 개척하는 영주로서 데일의 행보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