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 *
“작센의 데일, 공작 각하에게 보고를 올립니다.”
데일이 길드 시티에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가 손에 넣은 것들을 비로소 보고받았을 때.
“……!”
그것은 천하의 흑색공조차 감히 경악을 감출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미 그의 아들, 데일의 끝을 알 수 없는 재능과 수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일이 보여주는 것은 늘 그조차 상상할 수 없는 지평 너머의 것들이다.
그림자 교회, 시티 마스터의 장부.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나.”
무엇보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흑요석 상자를 보며, 흑색공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상자 속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겁니까?”
데일이,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에게 물었다.
“라이프 베슬(Life Vessel)이다.”
“익사공이 리치가 되었다는 겁니까?”
데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리치, 흑마법사가 어둠의 힘을 통해 불사의 생명을 손에 넣는 금기의 마법.
“이치 자체는 비슷하나, 조금 다르다.”
흑색공이 말했다. 데일이 느끼고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감상이었다.
“바다의 악마와 거래를 맺고 불사를 손에 넣었다고 했지요.”
데일의 말에 흑색공이 덤덤히 침묵을 지켰다.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로서, 짐작이 가는 지점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었으므로.
“지금 당장으로서는, 네가 그와 맺은 계약을 이행하는 데 집중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흑색공이 애써 화제를 돌린다. 데일 역시 그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 참으로 기쁘구나.”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흑색공이 비로소 아버지의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데일의 열세 살 생일이 찾아왔다.
* * *
“데일 공자님의 열세 살 생일을 감축드리옵니다!”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그레이트 홀). 열세 살의 생일을 축하하며,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무릎을 꿇었다.
“감축드리옵니다!”
그와 동시에, 실내에 있는 밤까마귀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고개를 드세요.”
데일이 멋쩍은 듯이 미소 지었다.
“경들의 충성이 있기에 비로소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데일 공자님……!”
헬무트, 바스커빌 경을 비롯한 밤까마귀 기사들이, 북받치는 충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모두의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를 표하고자 함입니다.”
공작 가의 장남, 작센의 후계자에 걸맞은 위엄과 함께.
어머니 엘레나가 아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미소를 머금었고, 작센 공작 역시 내색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오빠, 생일 축하해!”
“그래, 리제.”
끝으로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어엿한 꼬마 숙녀가 데일에게 웃었다.
지금의 데일을 있게 해준 작센 공작 가의 사람들. 그들 앞에서, 비로소 가족의 따스함을 느끼며 데일이 웃었다.
시린 냉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겨울밤의 세계를 뒤로하고.
* * *
열세 살 데일의 생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으레 제국의 대제후들이 그러는 것처럼, 대륙 곳곳의 유력자들을 초대하지도 않았으며, 귀족들 사이의 허례나 허식으로 차 있는 사교와도 거리가 멀었다.
작센 공작령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철저하게 공작 가의 사람들, 다시 말해 공작령의 모두를 위하는 것이었으니까.
작센시 전체가 축제의 흥으로 물들었다. 나아가 공작령 내에 있는 영지의 농노들 역시 ‘생일을 맞은 데일 공자의 뜻’에 따라, 특별히 그달의 세금(가령 달걀이라거나 작센의 동토에서 거두는 수확물들)을 줄이고, 적지 않은 휴식일이 주어졌다.
공작령 곳곳에서, 저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조촐한 축제가 열렸다. 하나같이 작센 공작 가의 장남, 데일의 생일을 축하하며.
어느 의미에서는 참으로 귀족답지 않은 모습이었고, 동시에 그 누구보다 귀족의 모습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 * *
그날 새벽.
밤이 깊어도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는 축제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앉은 작센 공작성에서, 늦은 시각까지 홀로 수행에 몰두하는 소녀가 있었다.
“샬롯.”
“데일!”
뜻밖의 모습에, 샬롯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또 밤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었구나.”
“응.”
부서지는 달빛 아래서,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더 강해져야 하니까.”
강함. 그렇게 말하는 샬롯이 다시금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흘끗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스릉.
마침 병기고에 놓여 있는 기사 검 하나를 집어 들며, 검집에서 칼자루를 뽑았다.
“그럼 얼마나 강해졌나, 내가 시험해줄까?”
“좋아.”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그대로 자세를 다잡았다.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타앗!
신속에 가까운 쇄도. 샬롯이 데일의 코앞으로 짓쳐 들었고, 작센의 중검(重劍)이 휘둘러졌다. 빨랐다. 데일조차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그녀의 성장을 시험해볼 요량이었으나,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격이 기습적으로 휘몰아쳤다. 데일이 다급하게 네 개의 서클을 가속했다.
깨닫고 나서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흐흥.”
샬롯이 의기양양하게 검을 겨누며 웃었다.
“못 보는 사이에 더 강해졌네.”
그 모습을 보고 데일 역시 웃었다. 일순, 샬롯의 표정에 동요가 깃들었다.
“왜 그래?”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란 사람치고 아무것도 아니란 걸 못 봤는데.”
데일의 말에, 샬롯이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렸다.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냥…….”
정적 끝에, 샬롯이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다.
“요새 들어서, 네가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가?”
“……모, 몰라, 이 바보야!”
애써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확실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미 어엿한 공작 가의 장남으로 활약하는 사이, 샬롯은 홀로 남겨져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적어도 그 시절, 온종일 성내에서 검을 맞부딪칠 때와 비교할 바는 아니리라.
“그래서…… 더 강해지고 싶어.”
샬롯이 말했다.
“지금도 대륙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검은 공자’의 곁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지킬 수 있도록.”
그저 데일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 그 말에, 데일이 숨을 삼켰다.
문득 용사의 손에 쓰러진 샬롯의 아버지, 신검 바델 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딸이, 아버지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은 자 앞에서…… 기사의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사랑스러운 딸이 적수의 실에 휘감겨 춤추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아버지 바델 경은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샬롯.”
알 수 없는 배덕감이 데일의 심장을 옥죄었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갑자기.”
이내 말을 흐리며 데일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네 생일은 아직이었지.”
“응, 아직이지. 왜?”
열세 살 생일을 맞은 데일이, 열두 살의 샬롯에게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는 오빠라고 불러야겠네.”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고, 샬롯이 얼굴을 붉히며 칼자루를 내리꽂았다. 조금 아팠다.
* * *
며칠 후, 아직 축제의 열기가 식지 않고 타오를 즈음. 일천의 용병 무리가 작센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병 특유의 천박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이, 강철 같은 군기와 규율로 무장하고서.
하나하나가 값비싼 흑갑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중장갑 보병대.
“케넷의 요네스, 대장님께 블랙아머 컴퍼니의 전과(戰果) 보고를 올립니다!”
“그래, 어떻게 됐지?”
바로 데일이 거느리고 있는 대륙 제일의 정예 용병대, 블랙아머 컴퍼니였다.
“빌헬름 백작의 영지전에서 무사히 승전의 보고를 알립니다! 아울러 우리 용병 쪽의 피해는…….”
요네스 경에 의해 전투의 전말을 보고받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데일의 손을 떠나, 부대장 요네스 경에 의해 자립하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지에서 두 배 가까운 병력 차를 극복하고 승리를 손에 넣었다.
“제법 머리를 썼네.”
나무랄 데가 없이 흡족한 전술이었고, 스승으로서 이 이상 감출 수 없는 흐뭇함이 느껴졌다.
“잘 해주었다, 요네스 경.”
“다 공자님의 가르침이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었습니다!”
데일이 직접 병사를 지휘하는 법부터 시작해 전략과 전술 일체를 가르치고 있는 수제자. 요네스 경은 데일이 애지중지하며 육성한 블랙아머 컴퍼니를 믿고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아무리 병사가 유능해도 사령(司令)의 머리가 비어 있을 경우, 부대 전체를 말아먹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아직도 가르칠 거야 산더미처럼 남아 있지.”
그 점에 있어 요네스 경은 배움의 즐거움을 아는 자였고, 그에 걸맞은 지혜도 있었다. 데일이 가르치는 전략과 전술, 병법의 하나하나를 들을 때마다 끝없이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마침 내 생일 축제가 벌어지고 있고, 너희들 몫의 술과 고기를 남겨두었으니까.”
“데, 데일 공자님!”
“실컷 마시고 나서 보자.”
데일이 말했고, 요네스 경이 무릎을 꿇고 그의 검을 내리꽂았다. 이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충성을 담아서.
* * *
“허허, 쉬펄! 금수저 때깔이 아주 기가 막히네그려!”
마스터 바로가 작센 가의 맥주를 들이켜며 호탕하게 웃었다.
“후후, 생일을 경축드리옵니다. 흑색의 사도시여.”
흑색 붕대로 시야를 가리고 있는 그림자 성녀가, 그의 곁에서 미소 지었다.
대법정(Grand Courtroom)이 있는 곳은 더 이상 길드 시티령의 중립 지대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림자 법정’이 길드 시티의 사법을 집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으로서…… 그 일거수일투족을 지휘하기 위해, 수뇌부를 데일의 곁에 직접 둘 필요가 있었으므로.
살검 마스터 바로와 그림자 성녀를 필두로 이루어져 있는 대법정의 수뇌부. 그들 조직이 새롭게 작센의 동토에 둥지를 짓고, 흑색의 보호 아래 그곳에 있었다.
블랙아머 컴퍼니, 그림자 법정. 데일이 쌓아 올린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세력들.
“마스터 바로, 하나 부탁할 것이 있다.”
“뭐, 어디 댁을 위해 따올 모가지라도 있나?”
마스터 바로가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교육을 부탁하고 싶은 자가 있다.”
“아, 거 좆빠지게 굴려줄 테니 말이나 해보시게.”
마스터 바로의 대답과 함께, 데일의 그림자 밑에서 실루엣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때나 데일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림자 속에서 주군을 지키는 침묵의 검.
“대륙 제일의 암살자로서…….”
성처녀 오렐리아.
“오렐리아 님의 검에 깃들어 있는 ‘기사도’를 없애고, 철저한 암살자의 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허미, 쉬펄. 이거 어쩌지?”
오렐리아의 모습을 보고, 마스터 바로가 짐짓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빠질 좆이 없는데.”
* * *
그로부터 얼마 후. 열세 살 생일을 맞은 데일에게, 아버지 작센 공작의 이름으로 ‘영지’가 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