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 *
“……작센에 흥미로운 애송이가 있다는 것이, 마냥 허황한 이야기는 아니었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공기 속에서, 익사공이 입을 열었다.
“애송아, 네놈의 제의를 받아들이마.”
“……!”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일말의 주저도 없는 즉답. 그 말에 데일조차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 내가, 네놈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놀아날 거란 착각은 오산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기꺼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데일이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결정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석에 몰린 쥐는 기꺼이 고양이를 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익사공의 심장을 쥐고 행해지는 겁박 앞에서, 그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버리고 그 대가로 무자비한 피의 복수를 자행하겠지.
그러나 구석에 몰린 쥐에게 도망칠 수 있는 활로가 생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설령 제아무리 익사공이라고 해서 순순히 자기 목숨을 내버릴 수는 없으리라. 데일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고, 익사공 역시 데일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그럼 이것으로 결정되었네요.”
시티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작센의 데일 공자님께서는, 파이트 클럽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을 통해 ‘익사공의 심장’을 입찰하셨으며.”
그의 뒤에서,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섯 명의 길드 마스터를 뒤로하고.
“팔백삼십하고, 아홉 개의 블랙 칩에 상품을 낙찰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 유리스, 미하일 랭커스터.
훗날 ‘지금 세대의 강자들’이 차례차례 스러지고 ‘다음 세대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될 이들 속에서, 최초의 승리를 손에 넣은 것은 작센의 데일이었다.
* * *
해골에 두 개의 대퇴부를 교차하고 있는 바르바로사 가의 문장(紋章). 바로 그 해적기가 그려져 있는 함대의 돛이, 밤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캄비오의 도시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익사공 바르바로사의 무적함대가, 기수를 돌려 칠흑의 수평 너머로 물러나고 있었다.
황금의 제국이라 일컬어지는 길드 시티. 그중에서 금융을 업으로 삼는 캄비오의 도시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손에 넣은 ‘막대한 전리품’을 갖고서.
해적으로서 그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도시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지는 않을 정도의 타격을 남기되, 결코 쉽게 지워질 수 없는 흉터 자국이 새겨졌다.
캄비오의 도시에 있는 ‘길드 뱅크’를 습격하고, 그곳에 있는 금고를 모조리 털어버린 것이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순순히 굽혀줄 수 없다는 익사공 나름의 메시지였으며, 데일 역시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다에 마주하는 도시 구획 일대가, 약탈과 방화 끝에 잿더미가 되어 스러졌다.
그것은 익사공 프란시스 바르바로사가 다녀갔다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길드 시티에서, 일곱 명의 대 길드 마스터가 하나의 장소에 집결했다.
차기 시티 마스터를 결정하는 투표의 장.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여섯 대 길드 마스터의 몰표를 통해 ‘차기 시티 마스터’가 결정되었다.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였다.
* * *
“무엇을 꾸미고 있습니까?”
캄비오의 도시. 아르테 델 캄비오의 시청사 관저.
바로 그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입가가 초승달처럼 기괴하게 찢어져 있는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서.
“딱히 아무것도 꾸미고 있지 않습니다.”
데일의 말에, 시티 마스터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저 알고 있을 따름이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데일 공자님이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를 겁박하고, 그림자 법정을 손에 넣었으며…… 강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날 이 도시의 미래를.”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시티 마스터가 파악하고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길드 시티의 사법 집행자, 그림자 법정이 데일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
그들이 작센의 수족으로 거듭났고,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데일로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림자 법정 내에 첩자를 심어두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시티 마스터가 대답했다.
“그저 ‘그림자 교회’가 작센의 어둠 사이에서, 짧지 않은 유대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거래가 이루어지고 나서, 익사공은 당신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아, 그 사실 역시 알고 있지요.”
시티 마스터가 남의 일처럼 웃었다.
“저는 정말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답니다.”
또 그 말이다.
“익사공의 심장이 작센의 손에 떨어지고, 그 사실을 제국과 적색 마탑, 그리고 랭커스터의 대리자가 목격했으며…… 그 이후에 무엇이 벌어질지.”
그렇게 말하며, 시티 마스터가 테이블의 서랍장 속에서 무엇을 빼 들었다. 길드 시티의 장부였다.
“데일 공자님께서 이 장부를 탐내는 것 역시,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기 위함이겠지요.”
“…….”
“몇 자루의 검이 어디로 팔렸고, 어디로 팔릴 예정이며, 어디서 누가 몇 자루의 검을 사기 위해 채무를 짊어졌나. 그 정보를 토대로, 대륙에서 벌어질 일들을 앞서 파악하고 움직이기 위해.”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가령 길드 시티의 장부를 보고 우리가 대륙의 정세와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듯이…….”
시티 마스터가 말을 잇는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정보를 기록하는 장부가 있고, 그걸 토대로 ‘이 세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악마’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전지(全知)의 악마.
“이 미래에 벌어질 일체의 일들을 예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라플라스의 악마…….”
우주에 있는 분자 하나하나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까지 알고 있는 존재.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아, 저는 그저 일개 장사치입니다.”
《웃는 남자》의 마스크 속에서, 시티 마스터가 능청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저 남들보다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린 장사치에 불과하지요.”
“설마.”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티 마스터가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가령 저에게 다가올 죽음 역시 예외가 아니지요.”
익사공의 심장이 거래되고, 그가 시티 마스터를 살려둘 리가 없으니까.
“당대의 시티 마스터가 사망할 경우, 길드 시티는 의무적으로 다음으로 득표수가 높은 길드 마스터를 후임으로 지정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시티 마스터가 말했다. 테이블의 서랍 속에서, 시퍼런 서슬을 빛내는 스틸레토를 꺼내 들며.
“여섯 명의 길드 마스터가 저를 뽑았으며, 저는 하나의 표를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에게 넘겼지요.”
“……!”
동시에, 시티 마스터가 스틸레토를 그의 손목 위로 내리그었다.
일순 데일이 숨을 삼켰다.
“이 세계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잘린 동맥 위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저 운명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니까요.”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뒤로하고, 시티 마스터가 말했다.
“일찍이 데일 공자님이 ‘제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듯이.”
“……!”
데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시티 마스터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처럼 시시한 것도 달리 없겠지요.”
“그 결말이 무엇입니까.”
“영업 비밀입니다.”
《웃는 남자(Laughing Man)》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생기가 빠져나가고, 시티 마스터의 몸이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 모습 앞에서, 데일은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그림자 법정을 손에 넣고,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는 시티 마스터가 되었다. 《웃는 남자》가 데일의 앞에서 자결을 택함으로써.
시티 마스터가 죽고, 그러나 그에 앞서 준비해 놓은 장치들이 ‘그림자 법정’에서 데일의 무죄를 증명해주었다.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새로운 길드 시티의 수장 앞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그를 시티 마스터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약속.
“이제는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 그리고 시티 마스터께서 약속을 이행하실 차례입니다.”
쌍방의 거래. 그를 시티 마스터에 앉힐 경우, 길드 시티의 심장…… 시티 마스터의 장부(帳簿)를 공유하겠다는 약속.
‘검은 공자’는 그의 약속을 이행했다.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시티 마스터의 자리에서 그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 * *
길드 시티령의 어느 도시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그림자 법정의 아지트.
“허허, 시펄.”
바로 그곳에서, 마스터 바로가 맥주를 들이켜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좆 같은 일들을 마무리 짓고 나서 마시는 맥주처럼 맛있는 게 또 없지.”
길드 시티를 수라장으로 몰아넣은 폭풍이 물러갔고, 도시에는 비로소 새로운 질서가 찾아왔다.
공식적으로 길드 시티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였으나, 이 도시의 정점에 서는 진짜 지배자는 달리 있었다.
“이 세계의 마지막 불꽃을 거두고, 최후의 빛을 꺼뜨릴 흑색의 사도이시여.”
그의 앞에서, 흑색 붕대로 시야를 가리고 있는 그림자 성녀가 입을 열었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 ‘그림자 법정’의 충성과 함께, 작센 가의 ‘검은 공자’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부디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림자의 제국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세요.”
그녀가 말하듯이, 이름 그대로의 ‘그림자 군주’가 그곳에 있었다.
* * *
뼈저린 패배감이 레이 유리스의 가슴을 옥죄었다.
침묵을 깨트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 그리고 그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를 쓰러뜨린 것은 작센의 ‘검은 공자’였다.
위대한 일족의 유지를 잇는 자로서,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 그 자체. 나아가 블랙마켓에서의 사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익사공’이 보여주는 그 압도적 힘 앞에서, 레이 유리스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우물 속 개구리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우물 바깥의 세계에 나와 있었다.
* * *
부러진 검이, 미하일 랭커스터의 앞에 놓여 있었다.
혈화검. 핏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칼날의 채찍.
그날, 파이트 클럽에서 ‘검은 공자’가 보여준 검을 떠올린다.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마치 대륙 칠검 이상의 강자를 조우하는 것 같은 압박감. 비록 ‘아바타’의 전력을 다하지 않는 그였다고 하나, 상대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가 ‘사상의 세계’를 발동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직감할 수 있었다.
이깟 검으로는 결코 ‘검은 공자’에게 닿을 수 없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그 괴물을 넘을 수 없다.
일찍이 ‘검에 있어 제국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재능’이라 일컬어지는 미하일이.
띠동갑 차의 어린아이, 그것도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 앞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패배는 결코 미하일의 마음을 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작센의 데일. 그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이를 담아, 쓰러뜨려야 할 호적수.
결의를 마치고, 미하일 랭커스터가 허리춤의 칼자루 위로 손을 얹었다. 일말의 특징조차 없는 보통의 기사 검이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작센의 ‘검은 공자’가 무사히 길드 시티를 벗어나, 작센 공작령으로 돌아왔다.
작센 공작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무니없는 것들을 손에 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