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03화 (103/301)

103화

* * *

길드 시티령의 끝자락. 밤바다가 창백하게 쏟아지는 별빛을 머금고 넘실거린다.

대륙 남해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이자, 제국 제일의 무역항이라 할 수 있는 ‘캄비오의 도시’.

아르테 델 캄비오(Arte del Cambio).

환전 및 금융업을 담당하는 대 길드 중 하나이자, 일곱 도시와 대 길드를 총괄하는 ‘시티 마스터’가 소속되어 있는 길드. 바로 그 길드의 도시에서, 가장 추악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축생도.

돼지나 새, 말이나 소. 비유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온갖 짐승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카니발 축제처럼 저마다 의장용 마스크를 두르고, 황성의 그것마저 부럽지 않을 호사스러운 파티를 즐기며.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페라의 유령에 나올 것 같은 백색 마스크를 두르고, 그림자 망토를 흑색 로브로 의태시켜 정체를 감춘다.

대륙 제일의 암시장, 블랙마켓이 열리는 그날.

짐승들의 가장무도회 속에서, 데일이 고개를 돌린다.

마켓이란 이름답게,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상품들이 늘어서 있었다.

흡사 백화점의 유리 진열장처럼.

경매에 부칠 정도로 값어치가 있지 않고, 그러나 블랙마켓의 흥을 돋우기에 적합한 가치가 있는 상품들. 살아 있는 생명부터, 모험가들이 미궁에서 목숨을 걸고 손에 넣은 희귀 아티팩트까지. 하급 귀족의 재산과 영지 전부를 팔아도 살 수 없는 천금의 재보들이, 이곳에서는 그저 시장통에 굴러다니고 있는 요깃거리에 불과하다.

제국 유수의 대귀족들조차 ‘출혈’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참여할 수 없는 황금의 전장.

“신사, 숙녀…….”

바로 그곳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신사 숙녀의 꼭두각시 여러분.”

초승달처럼 기괴하게 찢어져 있는 입가의 무늬를 뒤로하고.

《웃는 남자(Laughing Man)》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자였다.

일곱 길드 마스터 중 하나이자, 동시에 나머지 여섯 길드 마스터와 일곱 도시를 대표하는 자.

“우리 길드 시티가 자랑하는 ‘블랙마켓’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길드 시티의 정점. 시티 마스터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흑색 칩(Chip), 세 개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네 개.”

“다섯 개.”

“일곱 개!”

“아, 일곱 개, 일곱 개까지 나왔습니다!”

시티 마스터가 즐겁다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입이 초승달처럼 기괴하게 찢어져 있는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쓰고서.

대륙 최대 규모의 암시장이라 부르기에, 그들이 소리치고 있는 화폐의 숫자는 터무니없이 작다. 그러나 그들이 소리치고 있는 칩 하나에 걸린 가격은, 그야말로 천금의 무게와 같다.

어느 의미에서는 카지노 칩의 그것과 같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상품이 있었고, 값어치가 매겨지며, 상품의 소유주가 정해졌다. 그저 그게 다였다.

하나의 상품이 팔리고, 다음 상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칩을 내걸었고, 다음 상품 역시 일곱 개의 칩을 불러준 자에게 돌아갔다.

데일에게 일말의 흥미조차 끌지 못하는 것들.

여전히 밤은 길다.

로브 속에 감춘 ‘수백 개짜리 흑색 칩’의 묵직함을 느끼며,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새 부리 마스크와 흑색 코트 차림.

축생들의 가장무도회 속에, 위화감 없이 녹아들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수족들을 뒤로하고서.

* * *

“일백 개.”

남자가 입을 열었고,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시티 마스터’의 박수 소리였다.

“참으로 탁월하신 결정입니다.”

대리자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칩을 내고 나서, 실제로 그들이 값을 치르는 것은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캄비오 길드’의 지부를 통해서다.

약속어음(Promissory Note).

다시 말해 상품을 손에 수령하는 것 역시, 이 자리가 아니라 상품의 대금이 치러진 후의 일이란 소리다. 값비싼 재화와 보물을 하나의 장소에 몰아넣을 정도로, 길드 시티는 바보가 아니니까.

칩을 모조리 털어내고 나서, 귀족의 대리자들이 하나둘씩 장내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미동조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작센 가의 ‘검은 공자’를 필두로 제국의 대행자 레이 유리스, 랭커스터 공작 가의 미하일, 그 외에도 마스크에 가려져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이들까지.

그러나 끝없이 쏟아지는 상품들 속에서 그들의 숫자는 착실히 줄어들었고, 동시에 그 무엇도 데일과 흑색공의 탐욕을 자극하지 못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카드를 숨길 생각일까. 아무래도 좋다. 욱신거리는 통각 속에서, 데일이 그림자의 의수(義手)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슬슬 때가 되었겠지요.”

그즈음,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끝에 시티 마스터가 말을 잇는다.

최후의 상품.

“……!”

데일의 표정이, 아니,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 * *

그 시각.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밤바다가 출렁거린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뒤로하고, 보트 몇 대가 물살을 가르며 뭍에 닿았다.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항구도시 ‘캄비오’의 성벽 위로, 소리 없이 공성 갈고리가 걸린다. 석벽을 타고 그림자들이 질주했다.

촤아악!

초소 겸 망루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 하나를 향해, 칼날이 내리그어졌다.

“컥, 커헉……!”

잘린 목을 따라 울컥울컥 피가 솟았고, 그 틈으로 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초소를 수호해야 할 경비들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칠흑의 수평 너머에서, 괴수처럼 거대한 실루엣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살을 가르며 함대의 뱃머리가 그 위용을 드러냈고, 돛이 밤바람을 받아 펄럭이고 있었다.

돛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해골에 두 개의 대퇴골을 교차하고 있는 해적기.

졸리 로저.

이 세계에서 그 상징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작센 가, 랭커스터 가와 더불어 제국의 ‘3대 공작 가’라 일컬어지는 바르바로사 가의 문장(紋章)이다.

죽음의 바다 군도에 터를 잡고, 무적의 함대를 거느린 해양의 강자.

촤르륵!

배가 닻줄을 풀고, 닻들이 일제히 바닷속을 향해 내리꽂혔다. ‘익사공(溺死公)’ 프란시스 바르바로사가 거느린 최강의 함대가.

흡사 바닷속의 괴수들이 육지로 올라오듯, 침묵의 함대가 뭍을 향해 느릿느릿 정지했다.

그러나 망루에서 그들의 상륙을 보고하고, 봉화를 올릴 감시병 따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 * *

“시, 시티 마스터 님!”

철통처럼 지켜져야 할 블랙마켓의 장내에, 일순 침묵을 깨트리는 천박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병사 하나가 달려와, 시티 마스터를 비롯한 길드 마스터들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익사공 바, 바르바로사의 함대가 도시 일대에 상륙하고 있습니다!”

“……!”

블랙마켓을 습격하는 것. 그 행위가 갖는 무게를 모를 리가 없는 까닭에.

길드 시티 하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황실과 황제, 그리고 제국 그 자체를 대리하고 있는 적색 마탑. 제국의 두 공작 가, 나아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귀족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다.

말 그대로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마켓에 있는 누구도 감히 그 사실에 동요하지 않았다.

일곱 명의 길드 마스터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대리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 얼마의 가격으로 상품의 경매를 시작할까요?”

시티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정확하게 데일을 바라보며.

흑색공이 그토록 탐을 내 마지않을 거란 길드 시티의 말이 옳았다.

아니, 흑색공 하나가 아니다. 제국의 어느 누가 감히 이 상품을 놓고 탐욕을 느끼지 않을까. 파이트 클럽에서 잃어버린 팔 하나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설령 팔 하나를 영영 잃는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이것은 저로서도 감히 그 값어치를 어림짐작할 수조차 없네요.”

“……무엇을 바라지?”

비로소,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대체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지?”

쓰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 마스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영업 비밀입니다.”

《웃는 남자》의 마스크 속에서, 시티 마스터가 능청스럽게 미소 짓는다.

“어째서 ‘그것’을 자기 손에 넣지 않고, 우리에게 넘기려 하는 거지?”

“필요가 없으니까요.”

시티 마스터가 대답했다.

“제가 ‘그것’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달리 그것이 저에게 줄 이득이 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럼 물음을 바꾸지요.”

시티 마스터가 말을 잇는다.

“그것이 우리 길드 시티의 손에 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데일 공자님이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를 협박하고, 그림자 법정마저 손에 넣었으며…… 레이 공자님이 라나 길드의 마스터를 겁박하고, 또 미하일 공자님이 산티아고 길드를 포섭하고 있는 상황에서…….”

“……!”

길드 시티에서 벌어지는 암투(暗鬪)의 상세를 차례차례 입에 담으며.

여섯 길드 마스터 사이에서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동요가 드러났다. 나아가 그림자 법정의 이름이 입에 담겼을 때는, 천하의 데일조차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허미, 쉬펄.”

당장 마스터 바로를 비롯해, 블랙마켓을 지키고 있는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강자들의 각축장이 되어 결속이 무너질 이 도시의 미래가,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콰앙!

그 무엇보다도 엄중하게 지켜져야 할 블랙마켓의 입구에서, 커다란 소요가 울려 퍼졌다. 살검 마스터 바로를 필두로 ‘그림자 법정’의 최고 실력자들이 칼자루에 손을 올린다.

제국의 VVIP들이 참가하고 있는 블랙마켓을 지키기 위한, 길드 시티 제일의 강자들이.

뚜벅, 뚜벅.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멀리서,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그것’을 제국에 넘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시티 마스터가 말을 이었다.

“이 상품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은 처음부터, 오직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작센, 그리고 랭커스터.”

제국의 3대 공작 가, 그중 둘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리고 저는 데일 공자님이야말로, 이 상품을 손에 넣기에 가장 적합한 자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파이트 클럽에서 공자님의 활약을 보고,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이지?”

“검과 마법에 있어, 제국 제일의 재능이라 일컬어지는 천재.”

시티 마스터가 말했다.

“나아가 압도적 역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도박수를 걸 수 있는 배짱과 통찰력까지.”

“…….”

“데일 공자님께서는 ‘자격’이 있습니다.”

“무슨 자격을 말하는 거지?”

“──이 세상을 손에 넣을 자격.”

“……!”

처음부터 이것은 경매 따위가 아니었다. 시험이었다.

파이트 클럽의 승부를 통해 ‘그것’을 손에 넣을 자격을 가리기 위한 시험.

제국 유수의 재능이라 일컬어지는 천재들 속에서, 최후의 승리를 손에 넣은 자를 찾기 위해.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힘의 저울추가 기울어지고, 질서가 깨지며, 정말로 많은 것들이 달라질 테지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저 남자, 시티 마스터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거지?

발소리가 더더욱 가까워졌다.

콰앙!

비로소 블랙마켓의 철통같은 입구가 부서지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비에 젖은 생쥐 꼴의 남자.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 하나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땅을 박찼다. 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를 역수로 고쳐 잡으며.

“이 머저리 새끼야, 당장 멈춰!”

동시에, 마스터 바로가 경악하며 소리를 높였다.

우뚝.

암살자의 몸이 그대로 정지했다.

보글.

어디서 거품이 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남자를 향해 쇄도해야 할 암살자의 몸이,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컥, 커헉…… 컥!”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치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버둥거리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실내의 밑바닥이, 흡사 바닷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럼 상품을 소개하도록 하지요.”

《웃는 남자》의 마스크를 뒤로하고, 시티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작센, 랭커스터, 그리고 바르바로사가 모두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제국의 3대 공작 중 하나이자, 익사공 프란시스 바르바로사.”

“…….”

“흑색 칩 하나부터, 익사공의 심장이 담겨 있는 상자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익사공의 심장이 담겨 있는 상자.

과거, 해적공(海賊公)이란 이명으로 불릴 시절의 바르바로사가, 영생을 얻고자 바다의 ‘악마’와 거래를 맺고…… 자기 심장을 흑요석 상자에 담아, 바다 밑바닥에 숨겨놓았다는 전설 같은 일화.

그리고 바로 그 일화의 당사자 ‘익사공’이, 휘하의 함대를 모조리 이끌고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시티 마스터의 말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블랙마켓에 걸려 있는 최후의 상품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 함을 손에 넣을 경우, 제국의 3대 공작 중 하나…… 익사공의 목숨줄을 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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