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02화 (102/301)

102화

* * *

시린 냉기와 어둠을 뒤로하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그림자의 피조물, 나아가 그가 거느린 데스나이트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발밑을 따라 흑청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흑색 로브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데일이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평화의 중재자. 그 터무니없는 모습에, 미하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흑마법사가 자신의 피조물을 스스로 물리고, 달랑 검 하나를 쥐고서 맞서겠다고?

“너무나도 무모합니다.”

작센이 그러하듯, 랭커스터 가 역시 함부로 작센의 핏줄에 검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이곳에 있는 자들이 가진 ‘피의 무게’였으니까.

“저를 죽이는 것이 두렵습니까?”

“…….”

데일이 재차 되물었다.

“여기서 저를 죽이고, 저의 아버지와 북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후폭풍이 두렵습니까?”

미하일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공자님을 죽이고 싶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 검에 섬광처럼 목이 잘린 기사가, 저승에서 통곡하겠네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비아냥거렸다.

“우리 모두, 이 세계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하일 랭커스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국 제일의 대제후, 바로 그 3대 공작 가의 적자로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니, 참으로 다행이네요.”

데일이 칼자루를 고쳐 잡고 말을 잇는다.

“이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와 동시에, 데일의 4서클이 가속을 시작했다. 흑청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시린 냉기를 담아서. 급속도로 주위의 기온이 하강하기 시작했고, 일대에 하얗게 얼어붙은 서릿발이 끼기 시작했다.

영하의 영하로 이어지는 절대영도.

“슈브.”

데일이 입을 열었고, 그 말에 ‘옛 어둠의 어머니’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가느다란 촉수 하나가, 그대로 데일의 귀를 통해 청신경을 거쳐 뇌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계가 일전했다.

시린 냉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겨울밤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저, 슈브가 데일의 뇌를 조작하며 파이트 클럽 위에 덧씌우고 있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족했다.

마법사의 사상이란 것은, 결국 얼마나 확실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니까. 설령 그것이 터무니없는 망상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대로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데일은 자기 세뇌의 세계 속에 빠져 있었다.

슈브의 힘이, 자칫 데일의 뇌에 영구적으로 ‘비가역적 손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이계의 용사,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의 사냥개가…….

그의 검을 고쳐 잡았다.

* * *

오싹.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그저 파이트 클럽 일대에 끼기 시작하는 서릿발의 탓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그의 앞에 있는 ‘작센의 데일’이……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섬뜩하기 그지없는 기백을 내뿜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흑마법사가 데스나이트를 물리고, 그림자 피조물을 거두고, 그림자 망토를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검 하나를 쥐고, 오러 대용으로 네 개의 서클을 가속하며 이쪽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최악의 자충수이자, 일말의 승산조차 없는 싸움이리라.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미하일 랭커스터가 쌓아 올린 검객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위험하다.’

무엇이? 그의 앞에 있는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오러조차 쓰지 못하는 주제에, 검 하나를 달랑 쥐고 있는 마법사가?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일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청색의 동공이,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동시에, 데일이 땅을 박찼다. 시린 냉기를 휘감고 있는 검이 휘둘러졌고, 미하일의 혈화검이 칼날 채찍의 형태로 그의 검을 휘감았다.

아니, 휘감으려고 했다.

그러나 서로의 검이 부딪치기에 앞서, 미하일이 걸음을 물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압도되어서.

무심코, 데일의 의복에 새겨져 있는 작센 공작 가의 상징이 시야에 들어왔다.

밤까마귀(Night Raven). 죽음의 사자.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미하일 랭커스터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죽음의 공포’였다.

그대로 거리를 벌리고, 미하일이 재차 보이지 않는 검기를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흩뿌려지는 검기의 폭풍 속에서, 혈화검의 칼날 채찍이 휘둘러졌다.

카앙!

데일 역시, 검을 휘둘렀다. 미하일의 혈화검을 그대로 튕겨내며 역으로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다시금 무형의 칼날이 예측할 수 없는 경로를 그리며 휘둘러졌고,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오러를 쓸 수조차 없는 일개 마법사가, 차기 대륙 칠검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기사를 상대로.

일말의 동요나 미동조차 없이, 너무나도 덤덤하게.

카앙!

흐드러져야 할 혈화(血花)가 덧없이 지고, 냉기의 꽃이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카앙!

데일의 일격을 미끄러지듯 흘리며, 사복검의 칼끝이 비로소 데일의 허점을 향해 내리꽂혔다.

동시에, 데일이 팔을 뻗었다.

‘오러’가 깃들어 있는 미하일 랭커스터의 검을, 그대로 낚아채기 위해.

이대로 작센 공작 가의 장남이, 자신의 사복검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미래가 그려졌다. 나아가 그 행위가 가져오게 될 두 공작 가 사이의 정치적 후폭풍 역시도.

바로 그 상상이 일순 미하일의 움직임에 동요를 깃들게 했고, 그러나 데일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칼날의 채찍을 낚아챘다.

공장의 칼날 믹서기에 자기 손을 집어넣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

우뚝.

미하일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사복검의 칼날에 갈기갈기 찢어져야 할 데일의 팔이, 너무나도 멀쩡하게 그의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생채기 하나 없이.

《평화의 강제》.

상대의 공격을 ‘명백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가정 속에서, 일체의 공격을 무효로 되돌릴 수 있는 무적의 결계. 그리고 극도의 자기 세뇌 속에서, 고도로 날카롭게 서 있는 감각이 미하일의 검을 감지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며,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데일이 무형의 검을 명백하게 의식하고 있는 이상, 그 속에서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검이 사람의 살을 찢지 못하고, 불꽃이 사람을 태울 수 없다.

청색 마법이 마법사의 천적이라고 가정할 경우, 피스메이커는 일체의 물리 공격을 봉쇄하는 기사의 천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미하일이 경악했고, 동시에 데일이 움직였다. 미하일의 사복검을 움켜잡고, 피스메이커가 휘둘러졌다.

흡사 사신의 낫이 휘둘러지는 것 같은 죽음의 공포가, 미하일의 등줄기를 휘감았다.

도망칠 수 없는 죽음의 공포.

바로 그때, 데일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 비로소 의식을 되찾았다. 설상가상으로 피스메이커가 발동하고 있는 《평화의 강제》 역시 그대로 소멸했고, 다시 말해서.

촤아악!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검을 움켜쥐고 있는 데일의 손이, 믹서기에 갈리듯 갈가리 찢겨나갔다.

다섯 개의 손가락부터 팔꿈치가, 살과 피와 뼈를 흩뿌리며.

그러나 알기 쉬운 비명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이, 믹서기에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팔의 고통을 뒤로하고. 또 하나의 팔로 쥐고 있는 검이, 확실하게 미하일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어째서 곧바로 목을 치지 않았습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팔 하나가 갈가리 찢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평정을 지키며. 차기 대륙 칠검의 목젖에 서슬 퍼런 칼끝을 들이밀며.

“팔을 베고 나서, 망설임 없이 제 목을 치려 했을 경우.”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저는 필시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작센의 데일,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피의 무게’에 짓눌려서.

“……처음부터 제가 동요할 거란 사실을 계산에 넣었습니까?”

“적어도 이 세계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었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

미하일이 침묵을 지켰다. 자기가 전력을 다해 데일을 죽이려 했을 경우, 이 싸움은 확실하게 미하일의 승리로 끝이 났을 것이다.

상대의 팔을 갈가리 찢어버린 시점에서, 다음 일격을 넣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나 미하일 랭커스터에게는 그 정도의 각오가 없었다.

찰나의 망설임. 바로 그 각오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심리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말 그대로 종이 하나 차이였으나, 승부의 세계에 ‘혹시’ 같은 가정법은 아무 의미도 없다. 오로지 패자가 있고, 승자가 있다. 그게 다였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그릇 차이.

생채기 하나 없는 미하일 랭커스터, 그리고 당장이라도 출혈 과다로 쓰러질 것 같은 데일의 처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의 추는 명확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피로 물들어 있는 흑색의 승리였다.

“저, 랭커스터의 미하일.”

침묵 끝에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작센의 데일 공자님과 맞서고 있는 이 자리에서.”

무형의 오러를 폭발하듯 방출시켜, 그의 애검(愛劍)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리며.

“……!”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저의 패배를 고하겠습니다.”

기사가 스스로 제 검을 부러뜨리는 것. 파이트 클럽의 우승자 앞에서, 공작 가의 차남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치욕을 자처했다.

“……그대의 패배를 받아들이지요.”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대답했다.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살과 피와 뼈, 그리고 쇳조각 사이에서.

일말의 흐트러짐조차 없이.

* * *

‘팔 하나를 내주고, 뇌에 빨대까지 꽂아가며 손에 넣은 우승이라.’

그날 밤.

졸지에 팔 하나를 잃어버린 데일이, 침대에 걸터앉아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참으로 상처밖에 없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데일의 표정에, 사지(四肢) 하나를 영영 잃어버린 절망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덤덤하다 못해 태평할 정도의 포커페이스.

‘작센 공작이 욕심을 가질 정도의 상품.’

살과 뼈를 내주고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상품이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길드 시티의 말이 허풍으로 그칠 경우, 흑색공의 손을 거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데일이 팔을 뻗었다.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갈기갈기 찢어져, 불구가 되어 있는 외팔을.

동시에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외팔의 공백 속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 의미에서는 육체 일부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니었고, 그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었다.

어둠이 실체를 갖고 육체의 형상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의수(義手)를 시험 삼아 움직여 보았다.

‘기가 막히게 잘 움직이네.’

그림자와 육체의 신경을 접합시켜, 악의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는 팔.

‘공작령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대로 지내야겠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적어도 ‘흑색 마탑의 기준’에서 팔다리 몇 짝을 잃는 것은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흑색 마탑의 기술로 육체 몇 조각을 수복 · 대체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그것도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공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아들로서는 더더욱.

바로 그 사고방식이 작센 가와 흑색을 ‘어둠의 일족’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장에 백색 마탑조차 그런 치유 행위를 ‘여신의 기적’이라 포장하며, 십일조를 갈퀴째 쓸어 담고 있지 않나.

그처럼 살과 뼈를 내주는 리스크조차 기꺼이 감내할 보험이 있기에 비로소, 데일 역시 도박을 시도할 수 있었다.

기사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마도(魔道)의 사고방식.

하물며 마법과 접점이 없는 랭커스터 가로서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미하일의 생각과 달리, 처음부터 도박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데일의 쪽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데일이라고 해도, 대책 없이 무작정 팔다리를 배팅할 배짱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팔다리를 잃는 고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 속에서 데일이 입술을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걸로 버틸 수밖에.’

아무리 태평하게 평정을 가정하려 해도, 데일 역시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므로.

* * *

데일이 고통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고, 그림자 속의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디 섀도우.

꿈속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데일을 보며, 오렐리아가 팔을 뻗었다. 제국의 기수가 되어, 그녀의 조국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검은 공자’에게.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데일의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성처녀의 그것처럼 상냥하고 자비롭게.

어째서일까.

그토록 증오스럽고 미워해야 할 상대가, 이렇게나 작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다니.

그저 데일의 그림자 속에서, 그가 짊어지고 있는 어둠과 고통을 지켜볼 때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아, 나의 주군이시여…….”

하늘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포기하고, 비로소 감정을 하나씩 알아가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서.

여자의 기쁨, 살육의 열락(悅樂). 오렐리아가 조심스럽게 데일의 뺨에 입맞춤했다. 그녀의 가슴을 휘감는 욕망과 쾌락을 부정하지 않고.

“부디 저의 몸에, 꼭두각시의 실을 감아주세요.”

평생을 그의 그림자 속에서 휘둘러지는 ‘암살자의 검’이 되리라 맹세를 올린다.

고통 속에서 가빠지는 데일의 호흡이, 아주 조금 누그러들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파이트 클럽의 경기가 마무리 지어지고, 비로소 블랙마켓의 장이 막을 열었다.

대륙 제일의 귀족과 부호들에게 허락되는 비밀의 암시장. 사물이나 생명을 가리지 않고, 제국에서 가장 추악한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축생도(畜生道).

축생들의 마스커레이드.

데일 역시 바로 그 짐승들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 있었다.

파이트 클럽의 우승자로서, 하나의 상품을 ‘즉석에서 확정 낙찰할 수 있는 특전’을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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