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00화 (100/301)

100화

* * *

─ 이 피를 마셔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레이 유리스는 핏빛공의 ‘일개 양아들’이 아니었다.

─ 이것으로 너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위대한 일족의 일부로 거듭날 터이니.

위대한 일족이 쌓아 올린 피의 유지를 계승하는 자.

《영 블러드(Young Blood)》.

레이 유리스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그들 일족이 쌓아 올린 피의 역사이자, 혈계(血繼)의 힘이었고, 그것은 일개 부모 자식 사이의 유대와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절대로 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기에 각오를 마치고,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작센 가의 장남, 바로 그 ‘검은 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 흑백 회전의 승리자, 브리타니아 섬의 전쟁 영웅…….

그야말로 이 세상의 불공평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부조리의 화신.

“──『차가운 재의 왕』이시여.”

침묵은 여기까지다. 작센의 검은 공자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레이 유리스는 ‘일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되리라.

일찍이 용사의 손에 쓰러진 ‘마왕 발로르’의 마도서.

불과 어둠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족(魔族)의 수장이 가진 사상의 힘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의 호수 속에서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들이 내리꽂혔고, 레이 유리스의 몸이 잿더미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직 그 힘을 오롯이 끌어낼 수 없음에도, 적어도 작센의 일개 어린아이를 쓰러뜨리는 데에는 족하리라.

레이의 피에 깃들어 있는 역사는, 작센의 검은 공자가 가진 ‘일개 재능’ 따위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곳에서 제국 제일의 천재를 쓰러뜨릴 것이다.’

불과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데스나이트의 형체를 이루었다.

그날, 흑색 마탑의 장로를 잡아먹고 손에 넣은 흑색의 힘.

바로 그 힘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불꽃의 데스나이트가, 흑적의 검을 고쳐 잡았다. 불과 어둠의 검이 휘둘러졌고, 검에 깃들어 있는 흑색 불꽃이 어둠의 호수를 증발시켰다.

호수 속에서, 그림자 잠복자가 그 끔찍한 실체를 드러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섀도우 러커》들.

어둠 속의 포식자가, 성체를 드러내며 불꽃의 데스나이트와 맞서려는 찰나.

데일이 입을 열었다.

“「쿼드 배럴(Quad Barrel)」, 「12게이지 버드샷」.”

레이로서는 알 수 없는 이계의 영창이 울려 퍼졌다. 네 개의 총열, 그리고 버드샷.

벅샷이 사슴이나 소 등의 거대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하나의 산탄(Shell) 속에 질량이 크고 확실한 살상력을 가진 납 구슬 예닐곱 개를 넣는 데 비해…… 새 등의 작은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샷쉘 하나에 수백 개의 작은 납 구슬을 발사하는 버드샷.

그리고 지금, 데일이 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이 아니었다.

네 개의 청색 총신(銃身)이 등 뒤에서 일렁이며, 그 속에 들어 있는 《청색 불협화음》이 흩뿌려졌다.

“어째서 불꽃이나 냉기로 데스나이트를 쌓아 올리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나?”

“……!”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피조물을 유지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으니까.”

가령 지금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보통의 데스나이트일 경우. 데일이 흩뿌린 《청색 불협화음》의 영향을 받을 리가 없다.

불협화음이 깨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력 구조이지, 죽은 자의 육골이나 갑주가 아니므로. 시체 속에 정교하게 깃들어 있는 흑색 입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레이 유리스의 데스나이트에게는 실체가 없었다. 그것을 이루고 있는 화염과 어둠 자체가, 그의 마법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력 구조물이니까.

다시 말해, 마력 구조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불협화음 앞에서는 아무 힘도 쓸 수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청마법사들이 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레이가 거느린 화염의 데스나이트를 이토록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청색의 마법사’밖에 없으며.

참으로 불행하게도, 바로 그 청마법사가 레이 유리스의 앞에 있었다.

“흑색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막무가내로 술식을 모방해서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나?”

데일이 되물었다.

어느덧 레이 유리스의 육체는 재가 되어 장내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그곳에 사람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시에, 죽음의 재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흩뿌려지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재가 장내에 내려앉았고, 그 자리가 마치 시계를 빠르게 되감는 것처럼 부식되고 풍화되기 시작했다.

마족의 수장, 마왕 발로르의 마도서──『차가운 재의 왕』.

죽음의 재가 데일을 향해 휘날리기 시작했고, 데일이 허리춤의 기사 검을 뽑아 들었다. 뽑아 들고 나서, 칼날을 따라 그의 사상을 투여했다.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에 깃들어 있는 힘을.

평화의 중재자(Peacemaker).

동시에 죽음의 재가 데일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는 소멸의 입자가 데일을 휘감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데일의 육체, 아니, 레이 유리스가 흩뿌리고 있는 재의 힘이 사라졌다.

그것은 그저 평범하게 흩날리는 잿더미에 불과했다.

레이 유리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지금 이곳에서 데일이 펼친 피스메이커의 힘.

《평화의 강제(Forced Peace)》.

그리고 그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일대에서 벌어지는 「비가역적이고, 되돌이킬 수 없는 일체의 공격 행위」를 무효로 되돌리는 결계.

검이 사람의 살을 찢을 수 없다. 화염이 무엇을 불태울 수도 없고, 무엇을 소멸시키거나 없앨 수도 없다. 적어도 피스메이커의 힘이 미치고 있는 이 결계 속에서, 그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마저도 용사의 힘이 가진 편린에 불과하나, 마찬가지로 레이 유리스가 쓰고 있는 마왕의 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아니, 그것은 ‘조각’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미숙하고 어리숙했다. 적어도 데일이 기억하고 있는 마왕의 힘, 그가 가진 마도서는 이 정도에서 그칠 게 아니었으니까.

데일의 손에 들린 피스메이커가 그러하듯이.

‘함부로 용사의 힘을 드러내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그러나 방금 《청색 불협화음》을 흩뿌렸듯이, 데일은 청마법사의 소양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따라서 설령 레이 유리스의 비기를 무위로 되돌린다고 해서, 그쪽으로 의심을 사게 될 일은 없으리라.

제국 제일의 천재가 상대의 마법을 무위로 되돌리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고,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집행하고 있는 평화 속에서는, 데일이 자랑하는 데스나이트나 《섀도우 러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 바로 그 평화의 집행자를 제외하고서.

레이 유리스의 육체는 잿더미가 되어 일대에 흩어져 있고, 그러나 데일에게 그것은 대수로울 것 없는 일이었다.

“얼어붙어라.”

데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흑색이 아니라, 철저한 청색의 힘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데일의 세계 속에 깃들어 있는 시린 냉기와 어둠을 투영하며, 경기장 일대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는 레이 유리스의 육체가,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었다.

불과 어둠을 몸에 휘감고서, 레이 유리스가 이쪽을 응시했다.

기괴하게 뒤틀린 생체 융합형 아티팩트 ‘용의 턱뼈’를 발동하며. 용의 아가리처럼 기이하게 뒤틀린 그의 입이 움직였다.

“어떻게…….”

불꽃의 데스나이트, 그리고 죽음의 재.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내리꽂는 비장의 일격이, 모두 무효로 돌아갔다.

그 앞에서 ‘검은 공자’는 일말의 주저조차 없었다.

“흑청의 마력을 보고도, 내가 청마법사의 힘을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나?”

데일이 태평하게 시치미를 떼며 블러핑을 했고, 레이 유리스가 침묵을 지켰다.

“이 마도서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 마도서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침묵 끝에 레이가 되물었고, 데일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네가 감당할 힘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지.”

레이 유리스는 지금 당장 『차가운 재의 왕』을 다룰 역량이 없다. 당장의 데일조차, 3서클 시절 『검은 산양의 서』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어째서 마도서를 꺼내지 않았습니까?”

“아직 마도서를 갖지 않았으니까.”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레이 유리스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필시 ‘모두의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마도서’가 아니겠지요.”

“마왕의 마도서를 가진 사람이 할 말 같지는 않은데.”

“──『검은 산양의 서』입니까?”

일순 데일이 숨을 삼켰다.

“우리 적색 마탑의 정보력을 너무 얕보고 계시네요.”

“…….”

“그러나 ‘검은 공자’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애써 평정을 지키는 데일에게, 레이가 말을 이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무엇을 알겠다는 거지?”

“제국 제일의 천재란 말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지금의 저로서는 감히 닿을 수 없는 벽이란 것도.”

그러나 레이 유리스의 표정에, 지금까지 데일을 상대한 이들 같은 좌절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조리의 화신 앞에서 느끼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토록 갈구하는 호적수를 찾은 것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용의 턱뼈가, 알 수 없는 희열을 머금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넘어야 할 벽을 앞둔 도전자의 표정을 지으며.

“이 승부는 저의 패배입니다.”

레이 유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슈브.”

데일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신의 심장에 촉수를 뿌리내리고 있는 『검은 산양의 서』를 부르며.

이곳, 파이트 클럽의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 와, 사람들이 잔뜩 있어!

슈브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리고 레이 유리스를 비롯해 파이트 클럽의 모두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끔찍한 흉물이 그곳에 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촉수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뭉쳐 있는 이계의 흉물.

촉수를 따라 콜타르처럼 검고 어두운 점액질이 뚝뚝 떨어졌다.

촤아악!

바로 그 칠흑의 촉수들이, 경기장 일대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흡사 모두의 앞에서 『검은 산양의 서』가 가진 힘을 과시하듯이.

콰앙!

촉수들이 일대의 경기장을 내리찍고 부수고,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괴수가 날뛰는 것 같은 공포가 내려앉았다.

쨍그랑!

휘둘러지는 촉수 앞에서, 파이트 클럽의 보호 결계가 맥없이 깨져나갔다.

비명과 경악, 그 와중에도 광기에 차 있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어차피 적색 마탑이 『검은 산양의 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렇게까지 예상 밖의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이 ‘의심을 품는 시점’에서 그 진위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며, 지금쯤 시스티나 교회령이 발칵 뒤집혀 있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두의 앞에서 보여주는 것이 낫다. 작센의 ‘검은 공자’가 가진 마도서의 힘을.

슈브의 힘을 보란 듯이 펼치고 나서, 데일이 『검은 산양의 서』를 거두었다.

“너의 패배를 받아들이겠다.”

아무리 파이트 클럽이라고 해도, 이 자리에서 핏빛공의 아들이자 적색 마탑의 후계자를 죽일 수는 없다. 당장 제국과 적색 마탑이 경계하는 것이, 아직은 어린 데일이 아니라 ‘흑색공’이듯이.

적색 마탑의 어린 후계자를 처치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명분(名分)을 쥐여주는 악수밖에 되지 않으리라.

패배를 받아들이며, 레이 유리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두 다리를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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