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99화 (99/301)

99화

* * *

라나 길드의 도시. 아르테 델라 라나의 시청사.

길드를 상징하는 값비싼 모직물(毛織物) 장식이 걸린 관저의 일실에, 데일이 있었다.

“핏빛공의 대리자, 레이 유리스가 라나 길드의 마스터를 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림자 법정의 정보망을 통해, 사전에 어느 대귀족의 대리자가 어느 길드의 마스터와 접촉했는지에 대해 파악을 마치고.

“……!”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에게 벌어진 암살 미수 사태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적어도 그림자 법정이 공자님의 무죄를 보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라나 길드의 마스터가 말했고,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 길드의 마스터께서는, 제국과 적탑을 등에 업고 차기 시티 마스터가 되고자 하십니까?”

“……시티 마스터는 어디까지나, 일곱 대 길드의 공화주의적 관례에 따라 적법하게 선출될 것입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는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시티 마스터의 장부가 제국의 손에 떨어질 경우.”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길드 시티가 자랑하는 ‘공화주의적 관례’가 얼마나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일곱 도시 공화국이 멸망하고 일개 도시령(領)으로 전락한 황금의 제국이, 그 심장마저 제국의 수중에 떨어져서.”

일찍이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일곱 도시 공화국’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들이 자랑하는 천금의 재화도, 결국 용사의 검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제국이란 나라가 ‘일곱 대 길드의 공화정’을 용납할 것 같습니까?”

데일이 말을 잇는다.

“필시 제국과 적탑에 거스르는 것은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요.”

“…….”

“그러나 우리 흑색의 호의를 거절하는 행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용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참으로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겁박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강수를 내놓지 않고서는, 길드 마스터들을 움직일 수 없다. 라나 길드의 마스터는 마지막까지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 * *

그로부터 얼마 후.

블랙마켓이 열리기에 앞서, 그리고 길드 시티 내에서 돌고 있는 불온(不穩)을 수습하고 일곱 대 길드 마스터의 회동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길드 시티 내 최고의 강자들,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이 함께했으며.

──그들이 섬기는 ‘그림자 군주’의 명령에 따라, 대화 내용의 일체가 데일에게 흘러 들어갔다.

길드 마스터들을 지키기 위해 그림자 법정이 함께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작은 속삭임이라 해도 그들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으므로.

* * *

그로부터 얼마 후. 일곱 대 길드가 저마다의 셈을 마치고, 길드 시티는 크게 두 파벌로 나누어졌다.

제국, 그리고 적색 마탑과 손을 잡고자 하는 제국파.

데일이 제시하는 흑색과의 동맹에 찬동하는 흑색파.

저마다의 이합집산 속에서 비밀스러운 회동이 거듭되었고, 그때마다 그들을 지키는 것은 ‘그림자 법정’의 몫이었다.

길드 시티를 수호해야 할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이, 데일의 수족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 * *

당장 시티 마스터를 찾아가 그의 목을 조르며, 길드 시티의 장부를 빼앗을 수도 있다. 적대 파벌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을 보내 제거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데일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나아가 제국 역시 힘으로 그들의 목을 조르지 않는 것은 까닭이 있었다.

일곱 대 길드의 마스터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정보를 쥐고 있다.

나아가 시티 마스터의 장부가 갖는 진짜 가치는, 이미 쓰여 있는 내용 이상으로 ‘앞으로 기록하게 될 정보’에 핵심이 있다.

길드 시티가 대륙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제국 전역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때마다. 대륙 전체를 아우를 자금의 흐름, 어디서 어디로 칼자루가 팔리고, 어디서 어디로 갑주가 수입되고…….

어느 지역의 영주가 얼마의 부채를 짊어지고, 또 짊어지려고 하는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벌어질 대륙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축도.

그것을 상시 열람할 수 있는 상태로 확보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 데일과 제국이 필사적으로 ‘차기’ 시티 마스터를 자기 손에 넣으려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무형의 정보.

그것이 바로 길드 시티의 고개를 숙이게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 * *

일곱 대 길드의 일과 별개로, 파이트 클럽에서의 다음 승자전이 가까워졌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의 호수 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섀도우 러커》들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림자의 괴수.

뱀의 몸통에, 낫으로 이루어져 있는 팔다리를 위협적으로 과시하며. 등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가시 촉수들이 꿈틀거렸다.

“하, 하, 항ㅂ……!”

그리고 데일의 상대가 미처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푸욱!

가시 촉수들이 일제히 그의 몸을 향해 내리꽂혔다. 피가 울컥울컥 솟았고, 광기에 차 있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적에게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자’의 잔혹함을 증명하기 위한 일격. 그리고 블랙마켓의 경쟁자를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냉혹한 계산 속의 결정이었다.

* * *

작센 가의 ‘검은 공자’가 그의 무자비함을 증명하고, 나아가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지요!”

“랭커스터의 미하일! 랭커스터 공작 가의 차남, 미하일 공자님입니다!”

‘……랭커스터 공작 가?’

데일의 이목을 사로잡는 그 이름에, 경기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미남자가 있었다.

──랭커스터 가(家).

작센, 바르바로사와 더불어 제국 제일의 대제후라 일컬어지는 ‘3대 공작 가’의 일좌.

두말할 것 없이, 3대 공작 가에서 블랙마켓에 대리자를 보낼 거란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랭커스터 공작 가의 차남이, 직접 파이트 클럽에 나서다니.’

정작 자기 자신이 작센 공작 가의 장남이란 사실조차 잊고,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시 32강에도 모습을 드러냈을 터이나, 당시의 경기 전부를 감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하일 랭커스터’의 이름에 대해서는 데일 역시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전생이 아니라, 바로 작센 공작 가의 장남이 되고 나서.

차기 대륙 칠검의 경지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검의 천재. 기실, 공작 가 레벨의 아이들이 검이니 마법의 천재라고 불리는 것은 결코 이상할 일이 아니다.

어느 세상에서나 수저 잘 물고 태어나는 것처럼 확실한 삶의 보증 수표도 없으니까.

세상은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며, 태어날 때부터 그 귀천(貴賤)이 정해져 있다. 제국의 3대 공작 가는 바로 그러한 세상의 불공평함을 상징하는 화신과 같았다.

어느 의미로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이야말로 운명을 거부하는 이레귤러라 할 수 있으리라.

상념을 마치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뽑아 들었다. 칼날이 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기사 검이다.

‘혈화검(血花劍)…….’

보통의 검이 아니라, 최상급 아티팩트에 준하는 명검.

그의 상대 역시 이름 있는 백작 가의 기사였고, 마침 그의 실력을 직접 감상할 좋은 기회였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경기를 시작하는 신호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상대의 목이 어느덧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항복을 외칠 틈조차 없이, 오러 블레이드조차 휘감지 않고.

‘……!’

일검.

데일조차 용사의 무위를 투영하고, 서클을 활성화시켜 집중하지 않는 이상 좇을 수 없는 신속. 장내의 대다수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미하일 랭커스터가 검을 집어넣고 흘끗 고개를 돌렸다.

작센 가의 장남, 데일을 향해서.

바라보고 나서 정중하게 묵례를 하며, 흘끗 미소 짓는다. 공작 가의 차남이란 이름에 부족함 없이, 무척 정중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보여준 검술 역시 그러했다. 너무나도 깔끔하고 아름다워서, 그저 넋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일수.

검귀(劍鬼) 미하일 랭커스터.

그것이 그의 이명이었고, 무의식적으로 데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시대에 대륙을 호령하고 있는 강자들. 전생의 자신과 동시대에 활약한 강자들조차,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결국 노쇠하고 스러질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 공백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다음 세대의 강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할 테니까.

데일이 그러했고, 레이 유리스가 그러했고, 미하일 랭커스터가 그러하듯이.

과거의 데일이 알지 못하는 강자들이 다음 세대를 이룰 것이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과 목숨을 걸고 혈투를 펼치게 되겠지.

그 사실을 덤덤히 되새기며, 데일 역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파이트 클럽에서의 경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상대가 항복을 외칠 새도 없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이 지옥에서, 자기 주제를 알고 있는 자들은 싸우기 전에 패배를 택했다. 그렇게 추리고 추려서, 결국 네 명이 남았다.

4강.

데일, 레이 유리스, 미하일 랭커스터, 그리고 후작 가의 대리자가 하나.

‘……바르바로사 가에서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나?’

죽음의 바다 군도(群島)에 터를 잡고 무적함대를 거느리고 있는 해양의 강자. 파이트 클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블랙마켓에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리라.

적어도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파이트 클럽의 장내, 그곳에는 그 어느 때 이상으로 열기에 차 있는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피의 희열과 광기를 바라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아, 드디어 이렇게 뵙게 되었네요.”

핏빛공의 양자, 그리고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적색 마탑의 계승자. 레이 유리스가 그곳에 있었다.

어느새 울려 퍼지는 해설자들의 외침 같은 것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맞붙어야 할 상대다.’

오히려 데일의 가슴을 불태우는 것은 호승심이었다.

그렇기에 흑청(黑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그에 맞서 레이 유리스 역시 자신의 서클을 가속했다.

“울려 퍼져라.”

데일이 네 개의 서클을 가속하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청색 입자들이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청아하고,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쾌함을 가진 화음과 함께.

“블루 배럴.”

4서클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서, 세피아가 가르쳐준 《청색 불협화음》을 총신(銃身) 속에 장전하며.

경기장 일대를 어둠의 호수 속으로 수몰시키고, 그림자 속의 피조물을 꺼내 들었다. 등 뒤에 거느린 데스나이트가 작센의 흑검을 고쳐 잡았다.

상대의 마법을 봉쇄하고, 이쪽이 가진 물량으로 압도하며 승기를 잡는다. 전략을 세우고 나서, 데일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키에에에엑!」

《섀도우 러커》들이 포효하며 가시 촉수를 내뿜었다. 그림자의 괴수들이 쇄도했고, 그 앞에서 레이 유리스가 팔을 뻗었다.

여차할 때 자신의 마법을 봉쇄하기 위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청색 불협화음’을 뒤로하고.

휘몰아치는 적흑(赤黑)의 소용돌이 속에서, 레이 유리스가 입을 열었다.

“──『차가운 재의 왕』이시여.”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마도서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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