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98화 (98/301)

98화

* * *

“승리, 작센의 ‘검은 공자’가 승리했습니다!”

“파이트 클럽의 룰을 깨트리고, 아바타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없었다는 걸까요!”

“제국 제일의 천재란 말이 허명이 아니었나 봅니다!”

관중들의 열광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를 뒤로하고.

“……벌써 의식적으로 ‘사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나?”

새 부리 마스크에 흑색의 코트를 두르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살검, 마스터 바로의 목소리였다.

“그 정도의 역량조차 없이, 파이트 클럽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허허, 쉬이펄. 참으로 보통 애새끼가 아닐세.”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고, 마스터 바로가 경이롭다는 듯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새 부리 마스크의 암살자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다. 길드 시티가 자랑하는 사법 집행자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데일의 수족으로 거듭나 있는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

암살자들이 물러나고 데일이 등을 돌렸다. 32강의 승리. 나아가 성검사의 대행자를 쓰러뜨리고 그것으로 블랙마켓의 경쟁자 하나가 줄어들었다.

데일이 덤덤히 걸음을 옮겨, 기사의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금의 해골 장식, 다시 말해 성검사가 그의 대리자에게 넘겨준 블랙마켓의 초청장이었다.

콰직!

그것을 있는 힘껏 쥐어 부서뜨렸다.

파이트 클럽에, 대귀족의 대리자들이 목숨을 걸고 참전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 경쟁자는 적을수록 좋다. 설령 꼭 죽일 필요가 없더라도, 가급적 죽이는 것이 좋다.

상대가 목숨을 애걸하며 항복을 부르짖는 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대귀족의 대리자가 비참하게 목숨을 애걸하고 항복하는 것처럼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결말도 없을 테니까.

데일이 그대로 등을 돌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다음 차례가 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릴 것이고, 적수들의 모습을 봐두어 나쁠 것은 없으리라.

* * *

상대가 아바타를 사용해 룰을 깨트리고, 데일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의 형태로 사상의 세계를 펼치기는 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이례에 속하는 경우다.

룰을 깨트리는 시점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림자 법정’이 움직일 것이고, 살검이 직접 휘하의 암살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대륙 칠검의 일좌. 힘 있는 대귀족이 직접 나서는 레벨이 아니고서야, 일개 대리자로서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파이트 클럽에 참가하는 이들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이성이란 것은 생각보다 쓸모가 없다. 무릎 꿇고 항복하는 것은 기사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 수도 없다. 기사에게 있어 항복이란 죽음 이상의 수치니까.

데일에 이어 또 하나의 32강 결투.

그렇기에 대귀족의 대리자 하나가 이성을 잃고, 파이트 클럽의 금기(禁忌) 아바타를 펼쳤고…….

“허허, 이 개념 없는 쉬펄 새끼 좀 보게.”

바로 그 강자에 맞서, 살검 ‘마스터 바로’가 움직였다.

새 부리 마스크에 흑색 코트를 두르고, 각각 두 자루의 칼자루를 쥐고서. 쌍검, 이도류(二刀流)다.

아바타를 펼치고 있는 기사를 상대로, 두 자루 검에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휘감겼다.

그가 거느린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과 함께.

아바타를 아바타로 맞설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을까.

급소를 노리고 쇄도하는 살수들의 검이 내리꽂혔고, 그보다 몇 발짝 앞서 핏빛 오러를 싣고 있는 암기 세례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암살자들 하나하나가, 마스터 바로가 자랑하는 핏빛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 압도적 숫자의 실력자들 앞에서는, 제아무리 아바타를 쓰고 있는 기사라 할지라도 별수 없으리라.

“컥, 커헉……!”

사방에서 핏빛의 암기들이 내리꽂혔다. 급소 곳곳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고, 비릿한 혈향(血香)이 피어났다.

‘……!’

그 모습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 마스터 바로가 거느리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 결코 뒷골목의 일개 암살자 따위가 아니었다. 정식으로 대륙 칠검의 일좌, 살검의 검과 유파를 계승하고 있다.

대귀족이 육성하는 기사 전력에 조금도 뒤지지 않고, 동시에 그들에게 기사의 신념 같은 것도 없다.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기사가 아니라, 비열할 정도로 철저하게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암살자가 되어서.

철저하게 그림자의 여신을 섬기는 숭배자이자, 데일을 ‘흑색의 사도’로 떠받들고 있는 자들.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것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리고 우애보다는 황금이, 황금보다는 충성이, 충성보다는 광신(狂信)이 낫다. 그 점에 있어 ‘그림자 법정’의 신뢰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리라.

‘이것이 내가 갖게 될 그림자 법정의 힘…….’

그 모습을 보자 데일의 가슴이 더더욱 빠르게 뛰었다.

광검 헬무트 경이 자랑하는 밤까마귀 기사와 더불어, 살검 마스터 바로가 육성하는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전력(戰力)이 손에 들어왔다.

“귓구멍 씻고 잘들 들으쇼.”

급소 곳곳이 칼에 찔려 무릎 꿇고 있는 기사를 보며,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 ‘마스터 바로’가 입을 열었다.

“함부로 깝죽거리다 삼도천 프리패스 끊기 전에, 싸게싸게 대가리 박고 항복하는 게 좋을 거요.”

파이트 클럽의 참가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경고하며. 핏빛의 일검이 휘둘러졌고 그것이 최후의 일수였다.

피가 울컥울컥 솟구치며, 잘린 목이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고, 바람이 불었다. 어느덧 마스터 바로와 그림자 암살자들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 * *

마법사가 펼치는 사상의 세계가 결코 전능(全能)의 힘이 아니듯이, 그것은 기사가 펼치는 아바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아바타나 사상의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거기에 투영하고 있는 사상의 강함이다.

가령 데일과 싸운 성 막달레나 기사의 아바타가, 그들을 상징하는 순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그 형태를 조직의 사상이라 부를 수 있어도, 결코 기사 개개의 사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검의 사상이 강해질수록, 아바타 역시 점점 그에 맞는 개성과 힘을 손에 넣는다.

‘조직의 사상’이 아니라, 그의 검으로 쌓아 올린 독자적 사상.

역설적으로 성검사가 갖는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돼지의 몰골이, 그의 경지를 말해주듯이.

* * *

그로부터 얼마 후. 파이트 클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핏빛공의 양자, 레이 유리스.

황도와 적색 마탑 내에서는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절대적 입지를 갖고 있으나, 작센 가의 ‘검은 공자’와 달리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며 때를 기다린 괴물.

그리고 바로 그 레이 유리스가, 자기 입으로 침묵에 끝을 맺었다.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에게 흑마법을 이용하는 테러는 바로 그 서막에 불과했다.

“이거 또 참으로 진귀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네요!”

“설마 작센 가의 장남 말고도, 저토록 어린아이가 파이트 클럽에 참전할 줄이야!”

“천하의 ‘핏빛공’이 거둔 양자가 아닙니까! 아무 까닭도 없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요.”

해설가들의 기대에 차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그의 상대가 검을 고쳐 잡았다. 파이트 클럽에 참가하는 것은 대개 기사들의 몫이다. 마법사와 기사의 싸움이 ‘보통의 형태’로 흘러갈 경우, 특히나 경기장 내에서 치러지는 결투의 경우. 압도적으로 마법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형태니까.

그러나 레이 유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밑을 따라 적흑(赤黑)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일찍이, 흑색과 적색의 유대를 통해 손에 넣었다고 하는 흑색의 힘. 거기에 그가 자랑하는 적색의 힘을 더해, 심장의 서클을 가속시켰다.

서클의 RPM이 급격하게 상승하며, 거기에서 뿜어지기 시작하는 흑색과 적색의 소용돌이에.

‘3서클……!’

데일이 직감할 수 있었다. 레이 유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기사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화염이 불타올랐다.

‘거리를 내어주지 않기 위한 잽 펀치.’

그렇게 생각했고, 데일의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다.

화르륵!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고 있는 화염이, 무엇의 실루엣을 이루기 시작했다.

──불꽃의 데스나이트였다.

그저 화염의 피조물이라고 보기에, 그 속에 깃들어 있는 ‘흑색의 힘’이 너무 강하다.

말 그대로 흑색 마탑의 오의를 자신의 적색 마법과 융합시켜 세워 올린 것이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갑주, 그 속에 있는 화염 해골마저도 ‘흑마법사의 데스나이트’ 그 자체였다. 게다가 기사의 손에 들린 불꽃의 대검.

‘적색 마법으로 데스나이트를……!’

무엇보다도 하나가 아니었다. 불꽃이 끝없이 이글거리며, 죽음의 기사들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으로, 호흡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열을 불태우고 있는 죽음의 기사들이. 사람의 육골(肉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글거리는 불꽃의 형상으로 이루어져서.

제아무리 데일이라 할지라도 경악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아가, 불꽃의 데스나이트가 쥐고 있는 것은 일개 화염의 대검이 아니었다.

오러를…… 투영하고 있었다.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흑적색. 흑색과 적색이 뒤섞여 있는 어둠과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 바로 그 적흑(赤黑)의 데스나이트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 직후. 불꽃의 데스나이트와 몇 차례 검을 맞대기 무섭게, 기사가 재빨리 무릎 꿇고 항복을 소리쳤다.

“항복,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수치스럽고 죽을 것처럼 괴로워도, 죽는 것보다 낫다. 이대로 개죽음을 맞이해 ‘블랙마켓’에 참여조차 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보다야.

적어도 그에게는 그 정도의 사리를 헤아릴 능력이 있었다.

“항복을 받아들이지요.”

레이 유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항복을 소리치는 시점에서 공격하는 것은 금지 행위다. 불꽃의 데스나이트가, 일제히 그를 포위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컥, 커헉, 케흑!”

갑작스럽게, 기사가 자기 목을 부여잡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레이 유리스는 의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고 있었다.

──화재에서 비롯되는 유독가스.

불꽃의 데스나이트를 통해, 일대를 불태우며 발생하는 유독가스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일산화탄소(CO)의 중독 기전을 이용해, 혈색소의 산소 결합을 방해함으로써.

질식사 끝에, 기사의 육체가 힘없이 쓰러졌다.

무색, 무취, 무미의 암살자.

“아, 이것 참.”

레이 유리스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실수로 죽여버렸네요.”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시치미를 떼며.

“목숨을 걸고 펼쳐지는 투기장에서는,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파이트 클럽에서 추구하는 피의 희열, 광기의 축제. 항복하는 자를 공격할 수 없는 규칙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는,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모두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고, 그렇기에 레이 유리스의 모습을 보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데일은 웃을 수 없었다.

데스나이트 하나하나에 투영하고 있는 사상의 정교함. 그것을 불꽃의 형태로 이룰 정도의 역량.

거기에 그가 투영하고 있는 오러 블레이드 역시, 검(劍)의 소양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저것은 결코 ‘일개 3서클의 마법사’가 보여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일찍이 데일이 그러했듯이.

‘모처럼 제대로 붙어볼 가치가 있겠어.’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 * *

그 직후.

32강의 경기가 마무리 지어지고, 데일은 그 즉시 파이트 클럽을 나섰다. 이곳, 파이트 클럽이 세워진 도시의 심장.

‘아르테 델라 라나’.

일곱 대 길드 중 하나, 라나 길드의 마스터가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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