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96화 (96/301)

96화

* * *

─ 그림자 법정의 사람들이 길드 마스터를 지켜드릴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데일이 모습을 감추었다.

홀로 남겨져 있는 칼리말라의 길드 마스터는, 다가올 피바람 앞에서 몸을 떨어야 했다.

길드 시티. 일곱 대 길드와 그림자 법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황금의 제국.

그리고 길드 시티의 심장이나 다를 바 없는 시티 마스터의 장부(帳簿)를 놓고 펼쳐지는 강자들의 다툼.

그들이 보여주는 압도적 힘 앞에서,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는 처음으로 황금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 * *

그 시각, 데일은 그림자 법정의 아지트에 있었다.

그림자 대법정. 지하 예배당을 떠올리게 하는 그곳에서, 대륙 제일의 암살자를 앞에 두고.

“크흐, 시펄. 맥주 맛 죽여주네.”

살검, 마스터 바로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다. 그림자 법정의 격식이나 예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걸친 채.

“……보아하니 그림자 교회를 향한 신심이 깊어 보이지는 않는데.”

데일 역시, 딱히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을 낮추었다.

“허허, 그걸 말이라고 하쇼.”

마스터 바로가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 등에 칼 박아넣고 도망친 나 같은 새끼를 받아줄 데가, 뭐 그렇게 많지는 않지.”

“어째서 그의 등에 칼을 박아넣었지?”

주군을 배신하는 것은 기사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금기 중의 금기다.

“글쎄다,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렸지.”

마스터 바로가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주군이 제 어린 딸에게 악마가 씌었다며 길길이 날뛰더라고.”

“…….”

“그리고 나더러 딸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지.”

덤덤하게.

“그래서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맥주잔을 마저 들이켜고 나서, 마스터 바로가 말했다.

“그 돌아버린 주군께서, 자기 손으로 딸의 눈동자를 파버렸지.”

“설마…….”

“바로 그 설마이올시다.”

데일이 숨을 삼켰다.

“그 딸이 댁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 성녀님이여.”

“…….”

“그 아이를 데리고 길드 시티로 튀었고, 그림자 법정의 종교쟁이들이 ‘성녀가 나타났다’며 꼴이 말도 아니었지.”

“적어도 그녀에게 모종의 형태로 ‘여신의 계시’가 내려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 자매신이고 나발이고.”

데일의 말에, 마스터 바로가 차갑게 조소했다.

“저 구름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어? 졸라 쩌는 존재들이 있다고 치자는 말이여.”

“…….”

“그 졸라 쩌는 존재들에게,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 같나?”

“없겠지.”

“호오.”

마스터 바로가 의외란 듯이 숨을 삼켰다.

“그래서, 그 아이를 위해 신앙도 없이 그림자 법정의 검이 되길 자처했나?”

“이 광신도 새끼들 사이에 놔두는 게 보통 찜찜해야지.”

“그 아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신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제 아비 손에 눈깔 잃어버린 애가, 신을 찾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마스터 바로가 짐짓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딱히 그 아이의 믿음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수다.”

데일은 무심코, 자신과 슈브를 향하는 그림자 성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그저 그 애 곁을 지키는 거로 족하니까.”

신앙도 무엇도 없이, 성녀의 곁을 지키는 그림자 법정의 검이 되어서. 그 처지에 데일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보아하니 말이 통할 것 같은데.”

“허허, 이 어린 친구 혓바닥이 아주 그냥 청산유수여.”

마스터 바로가 즐겁다는 듯이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그래서, 뭘 위해 이 종교쟁이 새끼들의 신이 되기를 자처하셨나?”

“그림자 법정의 검이 필요했으니까.”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대륙 칠검, 살검(殺劍)의 별호를 가진 암살자.”

그 존재가 갖는 의미는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게 다였나?”

“그게 다였다.”

데일의 대답에, 마스터 바로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댁이, 이 머저리 새끼들의 메시아가 될 거란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

* * *

블랙마켓의 장이 열리기에 앞서, 파이트 클럽의 ‘승자전 게임’이 가까워졌다.

대륙 제일의 대귀족들을 대리하는 자들이, 저마다의 야욕과 야심을 감추고 모여들기 시작하는 힘 싸움의 장.

그것은 작센 가의 ‘검은 공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 * *

파이트 클럽.

바로 그 지하 투기장에 데일이 있었다. 등 뒤로 바로 이곳에서 손에 넣은 데스나이트를 거느리고. 그 모습에서,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정체는 오직 하나였다.

“작센 가의 ‘검은 공자’가 나타났습니다!”

“첫 경기부터 상상 이상의 거물이 나타났네요!”

사상의 세계와 아바타를 제외하고, 전력을 다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무규칙의 장. 그리고 지금부터 데일과 맞서게 될 이들 역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리라.

지금까지의 피라미와 격을 달리하는 강자들. 제국 유수의 대귀족들을 대신해, 블랙마켓에 참여하는 대리자들.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리하기 위한 힘 싸움의 장으로서, 데일의 앞에 있는 상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그 갑주의 정체를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갑주를 보십시오!”

“미스릴로 벼린 순백의 갑주…… 필시 성 막달레나 기사의 그것입니다!”

브란덴부르크 백작령에 있는 ‘미스릴 광산’의 존재는, 지금의 백작 가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미스릴로 벼린 순백의 갑주는 ‘성 막달레나 기사’의 상징과 같았다.

성검사의 대리자.

“천하의 브란덴부르크 대백께서, 이런 음침한 이교도들의 시장에 달리 볼일이 있으셨나?”

그야말로 외다리나무 위의 적수가 따로 없으리라.

“네놈…….”

데일의 조소에, 성 막달레나 기사의 칼끝을 따라 순백의 오러가 서렸다. 직접 성검사의 대리자를 자처할 정도의 기사다. 흑백 회전에 참전한 오러 나이트조차도 비교를 불허하는 강자겠지.

아무리 못해도 오러 마스터, 그 이상의 강자.

그러나, 파이트 클럽의 규칙상 아바타를 쓸 수는 없다. 데일이 사상의 세계를 펼칠 수 없다는 제약에 묶여 있는 것처럼.

아바타나 사상의 세계를 사용하는 강자들이 전력으로 격돌하는 이상, 그 유혈은 쉽게 감당할 성질의 게 아니니까.

“흑백 회전에서, 네놈의 손에 죽은 기사들의 넋을 기억하고 있다.”

성 막달레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증오를 담아서.

“아,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

“뭐라고?”

그 말에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라, 필립 공자님께서 죽였다고 해야 맞는 말이니까.”

백작 가의 망나니.

“그렇게 기사들을 말아먹는 것도 보통 재능으로 될 일이 아니고.”

적어도 그가 보여준 행적은 패배의 천재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니었다.

“브리타니아 섬에서 말아먹은 제국군 5할 앞에서는, 그마저도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

“네놈이 감히……!”

데일의 도발에 성 막달레나 기사의 검에 살기가 깃들었다. 데일이 거느린 데스나이트 역시, 작센 가의 흑검을 고쳐 잡았다.

‘어느 쪽에 피스메이커를 투영해야 할까.’

대치 끝에, 데일이 냉정하게 생각했다.

데스나이트에 전력을 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상대는 아마 진심으로 자기를 죽이려 들 테고, 호위에 전부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시험하려는 마스터 바로의 때와는 다르다.

스릉.

그렇기에 데일이, 허리춤의 기사 검을 뽑았다.

“흑백 회전에서 지고, 브리타니아 섬에서도 지고…….”

검신을 따라 피스메이커의 사상을 투영하며, 데일이 말했다.

“여기서도 또 지겠네.”

그 이상 대화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째 그쪽 집구석은 볼 때마다 박살이 나는 것 같은데.”

타앗!

비록 아바타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로서. 성 막달레나 기사가 전심을 담아 쇄도했다.

빨랐다. 3서클 시절의 데일로서는 감히 그 움직임을 받아치지 못하고, 일격에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데일은 달랐다.

일개 마법사가 아니라, 피스메이커를 쥐고 용사의 편린(片鱗)이 깃들어 있는 기사이자, 제국 제일의 재능이라 일컬어지는 4서클의 마법사.

두 가지를 융합하고,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데일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데스나이트가 쇄도했다.

작센의 흑검이 성검사의 일격을 맞받아쳤고, 데일 역시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피스메이커를 고쳐 잡고,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쇄도했다.

용사가 추구하는 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살검’ 마스터 바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열할 정도로 철저하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암살자의 검.

살육에 이르는 길.

성 막달레나 기사와 데스나이트의 흑검이 맞부딪쳤다. 흑백의 빛이 맞물리는 동시에 데일이 기사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피스메이커를 찔러 넣었다.

카앙!

기사는 당황하는 일 없이 데스나이트의 검을 흘리고, 동시에 휘둘러지는 데일의 검을 비끼듯 막아냈다.

“……!”

그 즉시 역습이 들어왔다.

강하다. 그러나 지금의 데일이 가진 것은 결코 검이 다가 아니었다. 데일의 검을 흘리고 쇄도하는 성 막달레나 기사를 향해, 그림자 망토가 펄럭였다. 발밑에서 「개틀링식」의 수식을 투영하고 있는 그림자의 총알이 쏘아졌다.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는 총알의 세례가 내리꽂혔고, 그 앞에서 성 막달레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일검을 따라 그의 체내에서 용솟음치는 오러가 ‘방패’의 형태를 쌓아 올렸다.

호신강기.

마법사의 그것과 같은 일종의 오러 실드로, 바로 그 실드가 데일의 섀도우 불릿을 튕겨내고 있었다.

‘오러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다.’

오러 마스터의 기사를 마법사의 경지로 비유할 경우, 최소 6서클에 준하는 실력자나 다름없다.

탑의 장로.

그러나 서클이 같다고 해서 싸움 실력마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기사는 학자가 아니니까.

탑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적을 베고 살아남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

그리고 살육을 거듭하며 경지를 쌓아 올린 검의 극의, 아바타의 경지란 바로 그렇게 해서 손에 넣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령 아바타를 쓰지 않더라도, 저 앞에 있는 기사는 지금의 데일조차 100%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슴이 뛰었다.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을 사냥하고, 손에 넣게 될 다음 경지. 강자들을 사냥할 때마다, 착실하게 피스메이커에 깃들어 있는 전생의 기억이 깨어날 테니까.

격돌 끝에 거리를 벌린다. 벌리고 나서, 데일이 중얼거렸다.

“여기는 나의 영역이다.”

펄럭이는 그림자 망토의 음영을 따라, 일대를 어둠의 호수 속으로 수몰시키며…… 그림자 속에 잠복하고 있는 포식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섀도우 러커》.

「키에에에엑!」

그림자 속에서 가시 촉수들이 솟아났다. 동시에 성체로 거듭나 있는 몇 마리 《섀도우 러커》들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몇 미터짜리 뱀의 몸통에, 낫으로 이루어져 있는 여덟 개의 팔다리. 등을 따라 꿈틀거리고 있는 가시 촉수들.

바로 그 괴수들이 데일의 앞을 가로막고, 방패를 자처했다.

십수 대 일.

압도적 물량에서 비롯되는 힘. 이것이 바로 흑색 마탑의 흑마법사, 사령술사의 힘이다.

“……!”

그 괴물들을 앞에 두고, 성 막달레나 기사의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일체의 공격을 무시하고 땅을 박찼다.

일점 돌파. 기사가 마법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정공법.

기사에게 거리를 내준 마법사의 결말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니까.

데일의 피조물들을 뒤로하고 성 막달레나 기사가 쇄도했다. 거리가 좁혀졌다. 그러나 데일은 결코 ‘일개 마법사’가 아니었다.

기사에게 거리를 내준 이유 하나로 패배하는 마법사 따위는, 결코 이 세계의 강자들과 맞서 살아남을 수 없다.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성 막달레나 기사의 검을, 데일의 검이 막아내고 있었다. 오러조차 없이, 일개 철검(鐵劍)이.

일검.

그러나 성 막달레나 기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작센 가의 장남이, 검에 있어 천재적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했고, 그렇게 일검을 막는 것 정도는 상정 이내였으니까.

카앙! 카앙!

그러나 순백의 오러에 맞서, 일개 철검이 몇 차례나 그의 검격을 튕겨냈을 때.

“어떻게……!”

성 막달레나 기사는 비로소 경악을 참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가 애써 무시하고 등을 돌린 ‘섀도우 러커’들이, 성 막달레나 기사를 향해 일제히 가시 촉수를 내리꽂았다.

콰직!

뒤늦게 오러의 방패를 세워 올려 즉사는 피할 수 있었으나, 오러 실드는 결코 무적의 방패가 아니다.

카앙!

방패가 부서지고, 섀도우 러커의 촉수들이 내리꽂혔다. 데일 역시,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귀족의 대리자들이 앞다투어 파이트 클럽에 참여하는 진짜 이유. 파이트 클럽의 승부가 꼭 어느 하나의 죽음으로 맺어질 필요는 없다.

그저 항복을 소리치는 것으로 족하니까.

그러나, 대리자들이 파이트 클럽에 참가하는 것은 결코 상대에게서 ‘항복 소리’를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상대를 죽임으로써 블랙마켓의 경쟁자를 가장 확실하고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것.

그것이 이 파이트 클럽의 ‘승자전’이 갖는 진짜 의미였고, 데일 역시 바로 그 의미를 수행하기 위해 검을 내리꽂았다.

아니, 내리꽂으려고 했다.

콰앙!

동시에,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성 막달레나 기사의 육체에서.

‘폭발? 아니, 아니다.’

보통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양의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벌어지는 충격파였다.

그리고 그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

순백의 기사가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말 그대로 순백의 기사였다.

‘아바타!’

성 막달레나 기사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전투 형태.

아바타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가 갖고 올 파급력을 생각할 때, 이곳 장내 일대에 가져올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파이트 클럽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방지책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파이트 클럽의 규칙을 깨트린 자를 처벌하기 위해, 마스터 바로를 필두로 대기하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고위 암살자’들이 움직이려 했고…….

그보다 앞서, 데일의 발밑으로 흑청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경기장 일대를 휘감았다.

후우웅!

데일과 성 막달레나 기사, 두 사람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마법사의 세계.

그날,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이계(異界)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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