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94화 (94/301)

94화

* * *

일대의 풍경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잠식되었다.

데일이 걸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통제를 벗어나, 대법정을 어둠의 호수 속에 수몰(水沒)시켰다. 오직 성녀와 데일을 제외하고, 일체의 것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칠흑의 결계.

그리고 그 결계 속에서, 산양의 뿔을 가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소녀가 아니라, 우아하고 고혹적이며 형용할 수 없는 기품을 가진 숙녀. 옛 어둠의 어머니.

“슈브.”

데일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덧 데일의 그림자 속에서, 오렐리아 역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산양의 서』가 가진 어둠에 오염되고 추락한 성처녀로서.

“아아, 옛 어둠과 검은 풍요의 어머니시여.”

그리고 그림자 성녀가, 슈브를 향해 황홀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비로소 그녀의 시야를 가린 흑색 붕대를 풀며.

“……!”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그대로 숨을 삼켰다.

붕대 너머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저 너머의 것들을 보기 위해, 때때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지요.”

두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버린 채, 그저 어둠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무저갱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깊은 어둠이.

“그리고 비로소 저에게는 보입니다.”

“…….”

“바로 이때를 기다렸답니다.”

그림자 성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묵시록의 말씀대로──천 마리 새끼를 거느린 검은 숲의 암컷 염소와 함께, 흑색의 사도가 나타나매.”

『검은 산양의 서』를 가진 흑색의 사도.

“──그가 이 세계의 마지막 불꽃을 거두고, 최후의 빛이 스러지며 그림자의 세계가 도래할지니.”

그것이 무엇을 지칭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작센의 시조이자, 제1사도 ‘불사공 프레데릭’께서 남겨주신 말씀이지요.”

제1사도.

‘과거 흑백 마탑 시절에, 그림자 교회와 흑색의 접점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겠지.’

그러나 그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고대의 일이고, 아무리 데일이라고 해서 이 세계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나아가 신(神)의 존재를 확신하고 의심해 마지않는 이 세계에서, 그림자 교회가 그 말의 무게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뜻하지 않은 데서 접점이 생겼다.’

딱히 그림자 교회의 신앙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멋대로 데일을 ‘흑색의 사도’라고 착각할 경우, 굳이 그 믿음을 저버릴 필요는 없으리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한다. 그저 그게 다였다.

“흑색의 사도로서, 이 땅에 거짓으로 가득 찬 불과 빛의 제국을 몰아내고.”

불과 빛의 제국.

“진정한 그림자의 제국을 가져오실 ‘그림자 군주’를 뵙사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림자 성녀가 데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꺼이 충성스러운 종복이 되기를 자처하며.

“후후, 저의 기도가 닿는 이 날을 기다렸답니다.”

무릎 꿇고, 그대로 데일의 발 위로 입맞춤을 했다.

“부디 그림자의 제국을 쌓기 위한 주춧돌로서, 우리를 마음껏 다루어 주세요.”

슈브의 치맛자락 밑에서 꿈틀거리는 촉수가, 스멀스멀 그림자 성녀의 몸을 휘감았다.

─ 아아, 나의 충실한 아이야.

촉수가 성녀의 몸을 휘감을 때마다, 그녀가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미소 지었다.

─ 너의 믿음은 보답받을 것이란다.

“아아, 검은 풍요의 어머니시여.”

─ 이 세계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고, 최후의 빛이 스러질 날이 가까워졌다.

다시금, 어둠이 휘몰아쳤다.

어느덧 그림자 성녀와 오렐리아가 모습을 감추었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 데일과 ‘옛 어둠의 어머니’였다.

“……그녀에게 무슨 수작을 썼지?”

데일이 슈브를 향해 물었고, 슈브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드레스 밑으로 헤아릴 수 없는 촉수들을 꿈틀거리며.

─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거야?

어느덧 데일이 알고 있는 어린 소녀가 되어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 그림자의 여신이 흑색의 사도를 보내, 그가 ‘그림자의 제국’을 쌓을 거란 계시를.

“이 세계에 신 같은 것은 없다.”

데일이 차갑게 대답했다.

신이 없는 세계. 그 말에 슈브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오빠 앞에 있는 나를 보고도 의심하는 거야?

“적어도 하늘 위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루 내내 감시하고.”

슈브의 물음에, 데일이 말을 이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갖고서, 우리를 사랑하는 스토커를 신이라고 가정할 경우.”

덤덤하게.

“이 세상에 신 같은 것은 없지.”

─ 그럼 오빠가 보기에, 우리는 뭐라고 생각해?

“개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데일이 대답했다.

“개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의 이름을 부르짖자, 그게 그저 신기하고 놀라워서 참을 수 없는 거지.”

적어도 데일이 흑색공을 통해 ‘죽음’을 보았을 때,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어느 의미에서 신과 같은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마법사들이 그토록 도달해 바라마지 않는 마신(魔神)의 영역, 핏빛공조차 알지 못하는 진정한 진리의 세계.

동시에 데일의 고향 행성을 짓밟은 피도 눈물도 없는 침략자.

그 위대한 천상의 거주자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이란 생물은 그야말로 개미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집합 무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들의 조각을 이 땅에 강림시켰을 때.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개미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데일의 고향이 그러했듯이.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며, 커다란 흥미를 끌겠지. 장차 그 행위가 갖고 오게 될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것이 이 세계에서 우리들이 신(神)이라 부르고 있는 존재들의 실체이며.”

데일의 곁에 있는 ‘옛 어둠의 어머니’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너희들이 이따금 내려주는 흥미를 멋대로 착각하고…….”

그렇기에 데일이 말을 잇는다.

“신의 계시라 부르짖으며 찬양하는 일에 불과하지.”

─ 꺄하하하핫!

데일의 말에, 슈브가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 나, 역시 오빠가 좋아.

슈브가 데일을 휘감으며, 미소 지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 그리고 이것들은, 내가 오빠에게 주는 ‘깜짝 선물’이야.

“……어차피 누가 열어도 받게 될 선물 상자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림자 성녀가 충성하고 입맞춤하게 될 자가, 꼭 데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검은 산양의 서』를 갖고 불사공의 의지를 계승하는 자. 작센의 피를 갖고, 그 마도서의 어둠을 감내할 자는 누구라도 좋았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자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으리라.

꼭 데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동시에, 데일이 아니고서는 열 수 없는 선물 상자였다.

“고마워, 슈브.”

그렇기에 데일이 미소 지었다.

“적어도 그들이 멋대로 믿고 있는 ‘계시’는 이루어지겠지.”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마지막 불꽃을 거두고, 최후의 빛이 스러지는 것.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

하늘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데일 자신의 의지로. 신이 없는 세계에서, 신을 찾는 자들의 신(神)이 되기를 자처하며.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는 무엇을 쌓아 올리게 될까.

그 해답을 얻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림자의 제국이라.’

데일의 제국.

‘그림자 군주.’

─ 내 호의가 마음에 들길 바라.

그 말을 끝으로 슈브의 모습 역시 사라졌다. 어둠이 걷히고, 데일의 그림자 망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데일이 있는 곳은 어느덧 ‘대법정’의 풍경 속이었다.

데일과 오렐리아, 그림자 성녀. 새 부리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들과 대륙 칠검의 일좌…… 살검(殺劍) 마스터 바로가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허허, 쉬이펄.”

‘마스터 바로’가 입을 열었다.

“남들 얘기에 끼지도 못하고 맥주나 홀짝거리는 홀아비 팔자 좀 봐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마스터 바로, 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의 말에, 그림자 성녀가 입을 열었다.

“불과 빛의 제국을 무너뜨려 우리를 해방하고…… 그림자의 제국을 세우게 될 흑색의 사도께서.”

여전히 흑색 붕대로 앞을 가린 채.

“드디어 우리의 앞에 나타났지요.”

그림자 성녀의 말에는 일말의 의혹조차 없었다. 광신(狂信)과 복종. 모두의 앞에서, 그녀가 다시금 데일 앞에 무릎 꿇고 발등에 입맞춤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복종의 맹약.

그녀의 행위 앞에서,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이 땅에서 빛의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싸울 경우.”

그렇기에 성녀의 입맞춤 속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림자 법정, 아니…… 그림자 교회는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이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헤아리며.

“그림자 법정의 모두가 ‘그림자 군주’의 발밑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성녀가 대답했다. 흑색과 그림자의 유대. 일찍이 데일이 바란 구상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허허, 잠시.”

그때였다.

손에 쥐고 있는 맥주를 마저 들이켜며, ‘살검’의 별호를 가진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대륙 칠검의 일좌, 마스터 바로.

“작센 가의 장남께서 물고 있는 금수저 때깔을 의심할 생각은 없으나…….”

그가 몸을 일으키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향해 팔을 움직였다.

“그래도 정말로 대가리 박을 자격이 있을지는, 붙어보고 나서 생각할 일이지.”

“…….”

그림자 법정 전체의 복종을 얻는 것은 다시 말해,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을 손에 넣는 것이고.

“내가 세상 살며 느끼는 게, 모름지기 대가리 박는 것도 잘 살펴 가며 박아야 하는 법이여.”

그중에는 데일의 앞에 있는 ‘대륙 칠검’의 강자, 살검 역시 예외가 아니게 되리라.

“설령 그게 천하의 작센 공작 가라 할지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

애초에 그림자 성녀의 보증 하나로 조직 전체를 손에 넣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들 각자의 충성을 얻는 것은 별개의 일일 테니까.

“여기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마스터 바로 앞에서 오렐리아가 발검의 자세를 취했고, 데일이 팔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그림자 법정’처럼 유서 깊은 조직을 함부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호오.”

“오히려 대륙 칠검께서 직접 저의 자격을 헤아려주신다는 것이, 참으로 영광일 따름입니다.”

“허허, 혓바닥 기름칠이 아주 그냥 청산유수가 따로 없네.”

마스터 바로가 차갑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이 악물어라, 애송아.”

칼끝을 따라 핏빛의 오러가 휘감겼다.

“계시고 나발이고.”

살검의 이름을 증명하듯이.

“까딱했다가 삼도천 프리패스 티켓 끊기 싫음 말이여.”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마스터 바로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륙 칠검의 일좌, 동시에 대륙 제일의 암살자.

카앙!

그리고 데일의 등 뒤에서 휘둘러지는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칼날에 맞부딪쳐 튕기는 소리가 났다.

“허미, 쉬펄.”

마스터 바로가 놀란 듯이 숨을 삼켰다.

“이걸 막아?”

데일은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움직이는 것은 데일이 아니었다. 파이트 클럽에서 손에 넣은 데일의 기사. 바로 그 데스나이트가, 작센의 흑검을 쥐고서 ‘살검’의 일격을 맞받아친 것이다. 칠흑빛의 오러 블레이드에, 피스메이커의 사상(事象)을 투영하며.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오러를 싣고 휘두르게 될 용사의 애검.

“이러다 내 모가지부터 날아가는 거 아니여?”

마스터 바로가 중얼거렸고, 어느덧 ‘용사의 대행자’가 ‘살검’을 향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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