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 *
‘시스티나 자매신’의 이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교회 역사의 가장 커다란 교리적 쟁점 중 하나였다.
자비와 자애의 개념을 자매에 비유하는 하나의 여신이냐. 내지는 빛과 그림자, 각각 음양의 두 영(靈)을 가진 이름 그대로의 ‘자매신’이냐.
그러나 일찍이 작센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과 흑색파가 봉기를 일으켜, 당시 하나의 흑백 마탑이 ‘흑백 대전’을 거쳐 흑색과 백색의 마탑으로 나누어지고…….
백색 마탑은 시스티나 자매신이 ‘자비와 자애의 이위일체’라는 해석을 채택했다.
말할 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흑색의 잔재를 지우려는 철저한 정치적 의도였다.
그림자 교회는 당시 백색 마탑의 주류 해석을 거부하고, 여전히 자매신을 빛과 그림자의 두 여신으로 섬기는 독립 교파였다.
이미 이 땅에 빛의 여신을 향하는 신심(信心)은 뿌리 깊게 내려져 있으므로, 그림자 교회의 역할은 철저하게 그림자의 여신을 섬김으로써 그 저울추를 평형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시스티나 자매신의 그림자.
자비와 자애로 상징되는 빛의 여신과 달리, 잔혹하고 무자비한 어둠의 여신.
그리고 지금, 데일이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의 예배당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림자 법정’의 이름을 가진 그들 조직의 지하 공동. 새 부리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가, 데일의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피고를 데리고 왔습니다.”
여전히 데일의 곁에는, 파이트 클럽에서 손에 넣은 데스나이트가 있다. 아울러 데일의 그림자 속에 잠복하고 있는 ‘섀도우 레이디’ 역시도.
마음먹을 경우, 그들과 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저의 무고와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법정에 섰습니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는 흑마법에 의한 암살 미수, 나아가 폭발 테러에 휘말렸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흑색의 마법임을 부정하는 것이냐?”
마찬가지로 새 부리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자들이 위에서 데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경사를 준 높은 위치에서, 흡사 피고를 내려다보는 판사들처럼.
“제가 마음먹고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를 죽이려 했을 경우.”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그렇게 허술한 방식으로 죽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대로, 자신의 손가락을 향해 흑색 마력을 집중시키며.
“「M24 SWS」, 「7.62x51mm NATO」.”
SWS(Snpier Weapon System).
일체형 저격전용화기 소총. 그 확실한 이계의 영창과 더불어, 데일이 그림자의 총알을 내리꽂았다.
“……!”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자 법정의 판사들 사이로.
내리꽂기 무섭게,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들이 데일의 목과 가슴, 등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데일의 마법에서는 살기(殺氣)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림자 법정의 암살자들을 속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조차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말로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뜻이겠지.
“지금 거리의 몇십 배에서도, 저는 정확하게 사람의 급소를 맞출 자신이 있습니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믿지 못하실 경우, 직접 그 사실을 증명해 드리지요.”
“…….”
“이런 볼트 마법을 갖고도, 조악하기 그지없는 시체를 움직이려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대의 행위가 갖는 무례를 알고는 있는 것이냐?”
“백날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더 와닿을 것 같아서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확실히 데일이 보여준 그 일발(一發)의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흑색공이 말하듯이, 공포를 과시하는 것은 늘 흑색 마탑의 방식이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보여준 것이 ‘살상의 목적’이 아니라, 그저 흑색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작센 가의 장남이 홀로 그림자 법정과 맞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데일이 역으로 되물었다.
“흑색이 추구하는 ‘공포’는 그렇게 천박하고 조악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공포에도 품격이 있다고 말하듯이.
“우아함도 기품도 없는 무차별 테러 따위가, 감히 우리 흑색이 추구하는 ‘공포’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달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있느냐?”
“말해도 믿지 않으실 겁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레이 유리스.”
“…….”
일순, 그림자 법정의 사내들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블랙마켓에 앞서, 이곳에 모여 있는 ‘대리자’들의 목적이 무엇일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데일이 말했다.
“차기 시티 마스터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아, 길드 시티의 ‘장부’를 손에 넣으려는 겁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비밀이다.
지금 데일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 제국 제일의 대제후들, 적색 마탑, 황실, 온갖 강자들의 아귀도(餓鬼道) 속에서, 그것은 비밀조차 되지 못하리라.
“그리고 레이 유리스는 제가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지요.”
“…….”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침묵 끝에, 그림자 법정의 판사들이 입을 열었다.
“그대 역시 ‘길드 시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야심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나?”
“그렇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저 하나가 손을 놓는다고 해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겠지요.”
덤덤하게.
“일찍이 ‘그림자 교회’가 추방당하고 길드 시티의 기생충으로 전락했듯이.”
그림자 법정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이름을 담으며.
“……!”
일순,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말을 조심해라.”
데일의 급소 곳곳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는 암살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칼끝을 따라 시린 살기를 담으며.
“그림자 법정에게 있어, 길드 시티는 그저 일개 숙주(宿主)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길드 시티가 숙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가치를 가졌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고 있지요.”
그들조차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입에 담으며.
“그러나 숙주의 생명은 끝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길드 시티가 가진 힘은 머지않아 제국과 황실의 손아귀에 떨어질 테니까요.”
그림자 법정이 우려하는 최악의 사태를 입에 담았다.
“우리가 아무 대책도 없이 이 도시를 넘겨주리라 생각하나?”
“그들의 야망을 저지해주시는 것은 저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바람입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일곱 대 길드의 마스터들은 저마다의 야심으로 맹목이 되어 있지요.”
터진 둑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욕망이란 터진 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저는 흑색과 그림자 법정의 동맹을 제의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입에 담는구나.”
“우리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과 흑색파 역시 ‘그림자 교회’와 같은 의지를 공유했지요.”
데일이 대답했다.
“제국과 백색 마탑의 폭거에 맞서, 흑색과 그림자의 유대는 생각 이상으로 그 역사가 깊습니다.”
“…….”
“제국과 황실, 적색과 백색 마탑이 손을 잡고 길드 시티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적.
“그에 맞서, 적의 적과 손을 잡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흑색에게 그들과 맞설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이냐?”
“그림자 법정에게는 그들과 맞설 힘이 있습니까?”
데일이 역으로 되물었다.
“그들 역시 ‘그림자 법정’의 정체를 모르지 않겠지요.”
제국이 길드 시티를 손에 넣고, 백색 마탑 역시 눈엣가시 같은 이교(異敎)의 뿌리를 뽑으려 할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그림자 법정의 판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두 그쯤 하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투명하고 청아하며, 옥이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서, 성녀님!”
“그림자 성녀님께서 어찌 이리 누추한 법정에!”
새 부리 마스크의 판사들이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칠흑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백발의 소녀였다.
앞이 보이지 않도록 흑색 붕대를 칭칭 감아,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보통의 붕대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강력한 마법의 힘이 느껴지는 아티팩트였다.
‘성녀……?’
그림자 성녀. 그것은 데일조차 알지 못하는 이름이다.
“이곳에 계시는 손님께서는, 결코 우리 법정의 피고(被告)가 아닙니다.”
바로 그녀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오히려 그림자의 여신께서, 그녀의 의지로 그를 이곳에 도달하게 했지요.”
“하, 하오나 성녀님!”
“작센 가의 공자님을 ‘그림자의 대법정’으로 모실 겁니다.”
성녀가 말했고, 그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대법정. 그 의미를 헤아리기 무섭게, 새 부리 마스크의 암살자들이 일제히 칼날을 거두었다.
* * *
그림자 법정의 이들이 향하는 곳은 일곱 대 길드의 도시 중 어디도 아니었다. 도시 바깥으로 나와, 길드 시티령(領) 내에 있는 어느 커다란 지하 요새였다.
흡사 로마 제국 시절에 핍박받는 기독교 예배당을 보는 듯한 풍경.
정작 그곳에 있는 사람의 숫자는 얼마 없다. 그림자 법정은 점조직 형태로 일곱 도시와 제국 각지에 퍼져 있었고, 이곳은 어디까지나 그 점조직을 하나로 맺는 수뇌부의 역할일 테니까.
어느 의미에서는 가장 높은 자들이 모여 있는 아지트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데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림자 성녀. 그리고 그림자 법정이,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준 남자.
‘……!’
“허미, 쉬이펄.”
격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금수저 열댓 개는 물고 태어나신 공자님이, 어쩌다 이런 좆 같은 곳에 오셨대?”
품격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데일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어디서 종적을 감추었나 했는데, 설마 여기 있었을 줄이야.’
대륙 칠검의 일좌, ‘살검(殺劍)’의 칭호를 가진 검객.
마스터 바로.
일찍이 대륙 최고의 일곱 기사 중 하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륙 최강의 암살자로 거듭나 있는 남자.
그림자 법정의 ‘대법정’에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데일 공자님.”
바로 그들 사이에서, 그림자 성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흑색 붕대로 시야를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데일을 주시하며.
“그리고 성처녀 오렐리아 님.”
뜻밖의 말에,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림자 여신의 보살핌 아래, 우리는 비로소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림자 성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 어둠의 어머니시여.”
“……!”
“이아 슈브 니구라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말을.
그와 동시에.
─ 아아, 나의 아이야.
‘슈브’의 성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일대의 풍경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잠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