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 *
“네놈 같은 애송이가 작센의 어둠에 대해 무엇을 알고서……!”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밤까마귀 기사. 그러나 그는 결코 ‘데일의 기사’도, 하물며 ‘작센의 기사’조차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머지않아 이 경기장은 ‘검은 공자의 도살장’으로 거듭날 것이고, 그의 앞에 있는 도살자는 바로 그 첫 희생양이 될 테니까.
카앙!
도살자의 흑검을 피스메이커로 쳐내고, 엇박자로 그림자 망토의 칼날들이 쇄도했다. 내리꽂히는 어둠의 칼날 앞에서 도살자가 황급히 몸을 물렸다.
기사가 스스로 마법사에게 거리를 벌린 것이다.
어느덧 데일은 즉시 그림자 칼날에 세열(細裂)의 수식을 추가하고, 부서진 그림자 조각 하나하나를 총알 형태로 세공을 마친 뒤였다. 칼날에서, 즉석으로 내리꽂을 수 있는 총알의 형태로.
3서클의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신속과 정확도를 갖고서.
‘이렇게 쉬웠나?’
자기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효율을 뒤로하고, 데일이 그대로 팔을 뻗었다. 그림자의 총알들이 내리꽂혔다.
주문의 영창조차 없이, 중기관총을 쏟아붓는 것 같은 흑색 총알의 세례.
자처해서 거리를 허락한 기사에게 섀도우 불릿이 쏘아졌고, 그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오러를 휘감아 갑주의 강도를 강화했음에도, 일말의 저지력도 갖지 못하고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작센의 흑색 갑주 위로 내리꽂히는 무수한 악의의 그림자들.
“크, 크허억!”
“다시 묻겠다. 어째서 맹약을 저버렸지?”
도살자가 비명을 내질렀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일대에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방음(防音)의 결계를 펼치며.
“내가 알지 못하는 작센의 어둠에 대해, 고해 성사라도 할 생각이신가?”
“자, 작센 가를 위해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한 동생이 있었……습니다!”
무릎 꿇고 쓰러진 도살자가, 겁에 질린 채 소리를 높였다.
“그, 그리고 바로 그 동생이, 얼마 전까지도 작센의 맹약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
데스 오더. 일시적으로 죽음에서 되살려 활용하는 데스나이트와 다르다.
마력의 지속적 공급 없이, 작센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의 대부터 쌓아 올린 불사의 군세.
“죽어서도 휴식을 얻지 못하고…….”
밤까마귀 기사의 맹약 속에 깃들어 있는 작센의 어둠.
“불사의 저주에 속박되어, 평생을 작센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제 동생을 보고.”
도살자가 겁에 질린 채 말을 더듬거린다.
“너,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 역시 모르지 않으리라. 밤까마귀 기사들의 서약. 살아서도 죽어서도 작센 가에 충성하겠다는 맹세의 의미, 나아가 그들이 가진 흑색 오러의 의미를.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각오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 맹약을 파기하고 도망쳤나?”
“자, 작센 가의 사람이 보기에 우리는 그저 데스나이트를 위한 소, 소재에 불과하겠지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가, 고작 그깟 사실이 두려워 등을 돌렸나?”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작센을 두려워하며 등을 돌린 주제에, 우리의 갑주와 흑검마저 버릴 수는 없었나?”
“제, 제발…….”
도살자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저,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오러 나이트의 기사는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기회라.”
그렇기에.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작센의 결의를, 이, 이제는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충성할 것을 맹세하나?”
“매, 맹세하겠습니다!”
도살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을 받아들이지.”
검으로 그의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약식으로 기사의 서약을 모방했다.
“내 의지로, 너를 다시금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로서 받아들이겠다.”
“가, 감사합니다! 평생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하겠습니다!”
도살자의 표정에 비로소 희망이 감돌았다. 필사적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여, 그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으며.
“일어나라.”
그 직후,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데일의 말에 따라 ‘그것’이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 망토 속에서, 성체(成體)로 거듭나 있는 《섀도우 러커》가.
어둠 속에 잠복하지 않고, 바깥세상을 향해 포식자의 위용을 드러냈다.
그 형태를 어느 생물에 비유할 수 있을까.
괴수, 그렇게밖에 형용할 수 없었다.
몇 미터짜리 뱀의 몸통에 지네처럼 여덟 개의 팔다리가 붙어 있었고, 팔다리 하나하나가 낫처럼 크고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가시 촉수들이 솟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생물의 육질(肉質)이나 갑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니까.
“히, 히익……!”
바로 그 ‘섀도우 러커’의 모습에 압도되어, 도살자가 숨을 삼켰다.
“야,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아니, 약속은 이행될 것이다.”
도살자가 겁에 질린 채 되물었고, 데일이 차갑게 그의 항의를 일축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충성하겠다고 했지.”
“……!”
“생각해 보니까, 꼭 살아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데일이 말했고, 도살자의 표정에 절망이 깃들었다.
「키에에에엑!」
섀도우 러커의 절규와 함께, 그림자 낫으로 이루어져 있는 팔다리가 휘둘러졌다. 그림자 속에 잠복하며 사냥감을 노리는 등 뒤의 가시 촉수가 아니라.
여덟 개의 낫이 휘둘러졌고, 도살자의 육체가 여덟 개의 조각으로 쪼개졌다. 섀도우 러커의 낫이, 그의 육체를 끝없이 도륙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도살자가 보여준 참상마저 아이들의 웃음거리로 느껴질 정도로.
‘대규모 회전에서 대량의 러커들을 사용할 경우, 어디까지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4서클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지금으로서는 결코 허황한 상상이 아니리라. 방음 결계를 해제하며, 데일이 등을 돌렸다.
아버지 흑색공이 그러했듯이, 작센의 ‘검은 공자’로서 그 잔혹함과 공포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일의 활약을 지켜보는 해설자나 관객들조차 할 말을 잃고 숨을 삼킬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피와 광기로 얼룩진 축제의 장이다.
“와아아아아!”
“보셨습니까! 저것이 바로 ‘검은 공자’의 잔혹함입니다!”
“압도적이네요, 너무 압도적이라고 할 말조차 없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 진짜였어!”
“대륙 제일의 천재!”
“우우우, 도살자 놈!”
데일이 보여주는 피 앞에서 열광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어나라.”
그 직후. 데일이 다시금 중얼거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흑색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도살자’가 몸을 일으켰다.
“주, 죽은 자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저것이 바로 작센 가의 흑마법일까요!”
“데스나이트, 데스나이트다!”
작센 가의 흑검을 쥐고 있는 데스나이트. 길드 시티에서 사령술로 활용할 수 있는 즉전력을 손에 넣었다.
생각 이상의 수확이었고, 흑검의 기사를 거느리며 데일이 대기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
* * *
결과적으로 데일이 다음 상대와 맞붙게 될 일은 없었다.
“나더러 저런 괴물 새끼랑 싸우라고? 엿이나 먹으라고 해!”
“주, 죽고 싶지 않아!”
“무리야! 항복, 항복!”
그대로 9차례의 부전승 끝에 10승의 보상을 쥐고 나서, 데일은 그대로 파이트 클럽을 나섰다.
어차피 아직 진짜 승부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그 승부가 시작되는 것은 곧 블랙마켓이 열릴 때니까.
일곱 명의 길드 마스터가 있고, 그중에서 시티 마스터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 그리고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가 그 자리에 오를 경우, 시티 마스터의 장부(帳簿)는 데일의 것이 되리라.
바로 그때였다.
지하 콜로세움을 나가는 길의 바로 그 통로에서, 낯이 익은 모습이 보였다.
유리스 후작의 양자, 레이 유리스였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활약은 잘 보았습니다.”
“…….”
“흑색을 저버린 자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그 모습!”
레이가 과장되게 두 팔을 들며 웃었다.
“다가올 승자전에서 공자님을 마주할 될 때가 기다려지네요!”
발밑을 따라 흑적(黑赤)의 두 마력을 과시하듯 일렁이며. 흑색과 적색.
“……!”
“그날, 흑적의 교류는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많은 배움을 주었지요.”
레이가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이지요?”
“비로소 ‘침묵의 수행’을 끝마칠 때가 되었다고.”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기 무섭게, 데일의 발밑에서 흑청(黑靑)의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데일의 곁을 호위하는 ‘데스나이트’가 흑검을 고쳐 잡았다. 그 즉시 레이는 곧바로 두 팔을 들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피력했다.
“데일 공자님 역시, 시티 마스터의 ‘장부’를 노리고 계시겠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데일이 중얼거렸고, 레이가 대답했다.
“피바람이 휘몰아치겠네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를 노린 암살 시도가 미수로 그쳤다.
길드 마스터가 거리 시찰을 펼치는 도중, 로브로 정체를 감춘 시체 몇 명이 질주했다. 그리고 그 시체가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테러.
폭사(爆死)에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다행히 길드 마스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잿더미가 되어 있는 풍경.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흑마법의 증거. 그것들이 가리키는 ‘용의자’는 오직 하나였다.
* * *
칼리말라 길드의 도시에서 벌어진 암살 미수 사태. 시체를 이용하는 폭발 테러.
그 이야기가 ‘라나 길드의 도시’까지 퍼지는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폭발 테러와 암살 미수를 흑마법의 소행으로 규정 짓고, 그 화살표가 어디를 가리킬지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렇게나 빨리 뒤통수를 칠 줄이야.’
이야기를 듣자마자, 데일은 그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로소 침묵이 끝이 났다는 레이 유리스의 말을 떠올리며.
‘그림자 법정이 움직이겠지.’
그림자 법정. 일곱 대 길드와 함께, 실질적으로 도시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세력. 길드 시티의 사법 집행자들.
데일이 암살 미수의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이상, 그들의 거미줄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란 말이 있듯이, 데일 역시 순순하게 당해줄 생각은 아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뒷골목 속에서, 그대로 후드를 벗는다.
그림자 속에 성처녀 오렐리아가 몸을 숨기고, 파이트 클럽에서 손에 넣은 데스나이트를 곁에 거느린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벗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저는 그림자 법정에서 제 무죄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바람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남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중세의 역병 의사처럼, 흑색 코트 차림에 새 부리 마스크로 정체를 감춘 자들.
“부디 저의 결백함을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데일이 말했다.
“따라오거라, 피고자여.”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설령 그 앞에 있는 것이 작센 가의 ‘검은 공자’란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들의 목소리나 위엄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그림자의 여신께 달려 있으니.”
그림자 법정.
길드 시티의 사법 집행자이자, 대륙 제일의 암살자 조직이자…….
자매신을 ‘자비와 자애의 이위일체(二位一體) 일신교’로 해석하는 교회의 해석과 달리, 그 이름처럼 빛과 그림자의 두 여신으로 해석하는 이교 종파 ‘그림자 교회’의 후신.
바로 그 그림자 속을 향해,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