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 *
라나 길드의 도시.
바로 그 도시의 지하에서 벌어지는 파이트 클럽은, 일찍이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문이란 것은 발 없는 말과 같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새어날 수밖에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블랙마켓’에 참가하는 대귀족의 대리자들이 하나둘씩 길드 시티에 모이고, 암시장이 열리기에 앞서 서열을 정리하기 위한 힘 싸움이 열린다는 것.
무규칙으로 벌어지는 지하 투기장처럼 확실한 장소는 없으리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길드 시티의 이들 역시, 좀처럼 없는 볼거리를 위해 그곳에 모여들었다.
일개 용병이나 삼류 도적 따위는 얼씬댈 수조차 없는 강자들의 투기장. 대귀족의 대리자부터, 그들을 상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야심가들까지.
라나의 도시, 그 뒷골목.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슬럼이나, 그 지하에는 커다란 공동(空洞)이 파여 있다.
과거 통일 전쟁 당시에 지어진 지하 터널이자, 지금에 와서는 몇 차례의 증축과 보수 끝에 라나 길드의 어둠을 상징하는 ‘지하 콜로세움’로 거듭나 있는 곳.
데일 역시, 바로 그 어둠 속에 있었다.
“파이트 클럽의 참가 신청을 하러 왔습니다.”
“……!”
데일의 말에, 접수계로 보이는 남자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주위에 있는 용병이나 도적들의 이목이 모여들었다.
“형씨, 요즘 시기에 그 말뜻을 알고는 있는 것이오?”
험상궂은 겉모습과 달리, 데일을 걱정하는 듯 남자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습니다.”
데일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설마…….”
일말의 주저나 망설임조차 없는 그 평정을 보고, 접수계가 직감했다. 뒷세계의 사람으로서,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가, 바로 그들이 기다려 마지않은 강자들 중 하나란 사실을.
“조, 좋소이다. 여기 접수 서명을 부탁드리겠소. 아울러 대금은…….”
지하 투기장에는 몇 가지 종목이 있다.
그중 데일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블랙마켓의 강자들과 실력을 맞댈 수 있는 ‘승자전’.
어느 의미에서는 이것이 파이트 클럽의 진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었고…….
“제대로 경기에 임하기에 앞서, 가볍게 몸이나 좀 풀고 싶네요.”
“알겠소이다.”
나아가 링 위에서 싸움 끝에 패자가 내려오고, 승자는 계속해서 다음 도전자를 받아 승부를 이어가는 연승전(連勝戰)이 있다.
진짜 승부에 임하기에 앞서, 가벼운 여흥 정도는 되리라.
무엇보다 주머니 사정을 부풀리는 데 있어, 파이트 클럽처럼 적합한 곳도 없으니까. 작센 가의 자금과 별도로, 두둑하게 주머니를 채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이 뒷골목의 지하 공동을 가로질렀다.
관객들이 이용하는 곳과 별개로, 파이트 클럽의 참여자를 위한 뒷길로. 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혈투를 펼치는 검투사를 자청하며.
* * *
데일의 차례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그의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참가자들이, 대거 승부를 포기하고 줄행랑을 쳐버린 까닭이다.
‘뭐지?’
데일이 의아한 듯 대기실에서 흘끗 경기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직후, 일순 숨을 삼켰다. 피와 내장, 사람의 고깃덩어리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경기장이 아니라 흡사 도살장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마저 서슴없이 행해질 수 있는 지하 투기장의 실체.
그 피칠갑 속에서, 승자가 과장되게 자신의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흑색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중장갑 기사였다.
‘흑색 갑주?’
고막을 찢을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피의 희열, 광기의 축제. 사람의 죽음마저 유희로 전락하는 황금의 제국. 이것이 길드 시티의 진짜 모습이다.
“와아아아아!”
“도살자! 도살자!”
‘도살자(Butcher)’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남자였다.
손에는 흡사 작센 가의 그것과 같은 대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오러의 기류는 결코 삼류 기사의 그것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고 수행을 쌓은 기사의 그것에 비할 수 있는 깔끔함.
게다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도살자의 무패 행진을 가로막을 자는 도대체 누가 될까요!”
“벌써 9승! 이걸로 10승의 고지가 목전입니다!”
“아, 이거 유감입니다. 다들 저 모습을 보고 도망치기 바쁘네요!”
“도살자의 세레머니는 늘 과격하기로 유명하니까요!”
“보아하니 부전패로 10승을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겠네요!”
멀리서, 증폭 마법에 걸린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나보고 저런 괴물 녀석을 상대하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
데일의 앞에 있는 마지막 대기자가 줄행랑을 쳤다. 일천의 금화도 목숨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는 법이니까.
“아, 이런! 또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패배자가 나왔네요!”
“우우우우!”
“이걸로 남아 있는 대기자는 하나! 그가 도살자에게 도전할 배짱이 있을까요?”
“글쎄요, 수상쩍은 로브 차림을 보아하니 보통 실력자가 아닐지도 모르죠!”
비로소 데일의 차례가 다가왔다. 데일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투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파이트 클럽, 지하 투기장에는 ‘승리하기 위해 일체의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두 가지, 마법사로서 ‘사상의 세계’와 기사의 ‘아바타’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
전자의 경우는 ‘구경거리’의 의미를 상실하는 까닭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애초에 그 정도의 실력자가 전심으로 격돌할 경우, 관객들의 목숨을 보장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그 점이 바로 데일이 파이트 클럽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필시 대귀족의 대리자 중에는 아바타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기사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데일이라고 해도, 아바타 능력자를 상대로는 아직 100%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사상의 세계와 아바타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 속에서는 별개의 이야기다.
그 상대가 설령 ‘오러 마스터’의 기사라 할지라도, 지금의 데일로서는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용사의 검과 4서클. 하물며 아바타의 경지에 도달조차 하지 못한 저 도살자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공작 가의 장남이 목숨을 걸고 펼쳐지는 투기장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엘리제가 알 경우, 그야말로 졸도할 지경에 이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호오.”
바로 그 데일 앞에서, 도살자가 자신의 대검을 고쳐 잡았다.
‘역시.’
데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브레스트 플레이트에 덧칠해서 ‘소속’을 가린 흑색 갑주도 그러했고, 무엇보다 저 대검의 형태…… 여러 가지 개조가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그 토대를 몰라볼 리가 없다.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 그중에서도 오러 나이트 이상의 기사에게 하사되는 대검.
츠바이헨더(Zweihänder)다.
“작센 가에 충성해야 할 밤까마귀 기사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지?”
“……!”
그렇기에 데일이 되물었다. 일순 도살자의 표정에 동요가 어린다.
“서, 설마…….”
동요와 함께 그의 대검을 따라 흑색의 오러가 휘감겼다. 작센 가의 흑검, 밤까마귀 기사의 상징과 같은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
“와아아아아!”
그 오러를 보자마자, 다시금 관객들 사이에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자, 드디어 도살자가 그의 오러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로브 차림의 남자…… 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글쎄요, 이름을 부르기 전에 승부가 끝날지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여! 죽여! 죽여!”
“제발 이겨줘! 네 10승에 내 전 재산을 다 걸었다고!”
곳곳에서 광기에 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강물이 따듯하길 빌어야겠네.”
데일이 대답했고, 도살자가 쇄도했다. 작센 가의 흑검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미풍조차 없는 곳에서, 데일이 허리춤에 비스듬히 매달린 기사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신속의 발검(拔劍)이다.
카앙!
오러 블레이드를 휘감고 있는 일검이, 그대로 틀어막혔다.
“아, 아니, 방금 도대체 뭐가 벌어진 걸까요!”
“로브 차림의 남자가, 일개 철검으로 도살자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냈습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네요!”
보통의 강철 검이 오러 블레이드와 맞부딪칠 경우, 설령 일격에 부러지지 않더라도 검 자체에 치명적 손상이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도살자의 흑검을 마주하고 데일의 칼날이, 여전히 시퍼런 서슬을 내뿜고 있다.
검신(劍身)에는 일말의 생채기조차 없다.
지금, 데일의 기사 검에 투영되고 있는 사상은 일개 오러 그 이상의 것이었다.
──마법사가, 자신의 무구(武具)에 사상을 투영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의 결과물.
전생의 자신이 가진 용사의 검, 피스메이커(Peacemaker).
옛 애검의 투영을 매개체 삼아, 전생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링크하는 행위.
그리고 지금, 데일이 가진 것은 용사의 무위가 다가 아니었다. 심장을 따라 네 개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흑청(黑靑)의 마력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고, 그림자 망토가 광희하기 시작했다.
일검 끝에 도살자가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맹약을 저버린 기사여.”
“서, 설마 당신이 바로…….”
“어째서 작센의 맹약을 저버렸지?”
그가 어째서 작센 가를 떠나,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탈주 기사일 수도 있고, 그저 자기 의지로 작센의 검을 포기하고 탈퇴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주군의 품에서 떠나는 것 자체는 기사의 자유니까.
그러나 작센에 충성하지 않는 자가 작센의 흑검을 사용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데일이 비로소 후드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작센의 이름을 버린 자가, 어째서 ‘우리 가문’의 흑검을 쥐고 있지?”
발밑을 따라 흩날리고 있는 그림자의 망토. 열두 살의 나이에 4서클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천재 마법사.
제국 제일의 재능, 그 위명을 수식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명이었다.
“거, 검은 공자…….”
도살자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일순 장내의 소요가 멈추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검은 공자!”
“작센 가의 검은 공자다!”
“검은 공자가 파이트 클럽에 나타났다!”
머지않아 광기에 가득 차 있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요?!”
“제국 제일의 천재, 바로 그 작센 가의 장남이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증폭 마법이 걸린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어느덧 도살자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는 없었다.
“자, 작센의 애송이 따위가…….”
작센의 흑검을 쥐고, 도살자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위선자 주제에, 뭘 안다고 감히 그깟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도살자의 말에, 데일이 싸늘하게 조소했다.
“적어도 네 검이, 하늘에 닿지 못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지.”
그야말로 자기가 하늘 위의 존재라도 되는 듯이. 그림자 망토를 따라 칠흑의 칼날이 생성되며, 데일의 주위를 위성처럼 공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데일이 주검(主劍)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도살자가 쇄도했고, 데일 역시 쇄도했다. 오러 없이, 전력으로 오러를 사용하고 있는 기사를 상대로.
두 자루의 검이 부딪쳤다. 그 직후, 데일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여섯 자루의 그림자 칼날이 쇄도했다.
사람의 죽음마저 유희로 전락하는 피의 축제.
그 광기의 축제 속에서, 일말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는 ‘검은 공자’의 악명과 잔혹함을 증명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