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 *
블랙마켓의 초청장이 대륙 전체에 흩뿌려졌고, 하나둘씩 그들의 ‘대리자’들이 길드 시티를 찾아오고 있었다.
대륙 제일의 힘과 부를 가진 귀족들.
그중에는 작센 공작 가의 ‘흑색공’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성검사나 핏빛공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비록 그들 자신이 직접 블랙마켓으로 향할 수는 없으나, 누구보다 그들의 주군이 갖는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대리자를 보냄으로써.
제국 제일의 천재, 흑색공의 아들 ‘검은 공자’ 역시 바로 그 대리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데일이 그저 블랙마켓의 참가에서 그치지 않고, 대 길드의 고위층과 접촉하고자 하는 의사를 피력했을 때. 《칼리말라 길드》는 기꺼이 ‘검은 공자’를 위한 자리를 주선했다.
‘아르테 디 칼리말라’.
길드 시티의 일곱 도시를 지배하는 대 길드 중 하나이자, 직물업을 비롯한 의류 산업을 담당하는 길드.
과거의 흑색 마탑은 길드로부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실험체’를 납품받기를 꺼리지 않았다. 어느 의미에서는 그들의 가장 힘 있는 고객 중 하나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흑색공 체제의 흑색 마탑이 그들과의 교류를 거부했을 때, 그들 ‘대 길드’의 타격 역시 결코 우습게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일은 바로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칼리말라의 도시’로 향했다. 그린우드에서 자신을 맞이한 대 길드의 인신매매 업자와 함께.
‘직물 산업과 인신매매 사업이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아울러 그들이 손을 뻗치고 있는 범죄 사업은 인신매매 하나에서 그치지 않으리라.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파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니까.
그러나 지금 당장, 데일은 정의를 위해 그들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길드 시티의 일곱 도시 중 하나, 칼리말라 길드의 도시. 일곱 대 길드의 일좌(一座) ─ 아르테 디 칼리말라의 시청사. 그들의 부와 힘을 상징하는 호사스러운 관저의 일실.
“설마 흑색 마탑주님의 대리자께서 앞서 저희를 찾아주실 줄이야.”
칼리말라 길드는 작센 공작 가의 이름에 걸맞은 예우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길드 마스터’가 직접 데일을 맞이한 것이다.
이 도시의 지배자이자, 대 길드의 일곱 정점 중 하나.
그것은 결코 검이나 마법으로 손에 넣은 직위가 아니다. 거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는 벨벳 코트가 바로 그 증거였다.
“블랙마켓의 참여를 위해, 공자님께서 직접 행차하신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찍이 공자님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답니다!”
그 뒤로, 길드 마스터는 ‘검은 공자’의 활약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제국 제일의 천재. 흑백 회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마족 대이동을 저지하고, 브리타니아 섬의 전쟁 영웅이 되어 보여준 무용담. 귀에 못이 박이다 못해 피가 날 정도의 지긋지긋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데일이 ‘검은 공자’로서 갖는 악명(惡名). 그 이름의 무게. 흑색공의 말처럼 공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듣자 하니, 공작 각하께서 탐을 내실 정도의 흥미로운 상품이 있다지요.”
데일의 말에, 길드 마스터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감히 작센 공작 각하의 기대에 부응하리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흑색공 각하의 기대를 배신할 경우…….”
데일이 짐짓 위협스럽게 되물었다.
“길드 시티 역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
데일이 말했다. 작센 가와 흑색 마탑의 악명을 방패로 삼아.
“저희 길드 시티는 그 무엇보다 신뢰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드 마스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의 범죄 사업이나 수전노 같은 성질과 별개로…… 환어음을 비롯해 대륙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들의 금융 네트워크는, 철저한 신뢰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황금의 신뢰는 절대적이고, 적어도 그 점에 있어 길드 시티는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참으로 기대가 되네요.”
“아직 암시장이 열리기까지는 제법 시일이 남아 있습니다.”
데일이 덤덤히 미소 지었고, 길드 마스터가 말을 이었다.
“천천히 도시의 구경을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금화 앞에서 일체의 것들이 정당화되는 황금의 제국. 길드 마스터의 말처럼, 이곳에서는 참으로 여러 가지의 ‘볼거리’들이 있었다.
파이트 클럽(Fight Club). 참가자의 목숨을 걸고 치러지는 지하 투기장이라거나.
“두말할 것 없이 기대되는 일이지요.”
데일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제가 ‘대 길드’의 마스터를 찾은 까닭은 달리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일이 비로소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다. 일개 블랙마켓의 참가자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이행하고자.
“길드 시티의 사업에, 작센 공작께서는 적잖이 흥미를 보이고 계십니다.”
“…….”
데일이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투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길드 마스터가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어느 때나 저희 길드 시티에 투자하는 것은, 참으로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아, 보통의 투자가 아니랍니다.”
데일이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열리게 될 블랙마켓 이후…… 차기 ‘시티 마스터’를 결정하는 자리가 열리겠지요.”
시티 마스터(City Master).
일곱 길드 마스터 위에 군림하며, 길드 시티 전체를 총괄하는 정점의 자리.
그 말에 일순, 칼리말라 길드 마스터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시티 마스터를 결정하는 것은 길드 시티 내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로, 그것이 ‘블랙마켓’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는 사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 정보를 어떻게 작센 공작 가에서…….’
그러나 길드 마스터는 내색하지 않았고, 데일이 말을 이었다.
“길드 시티의 신뢰는 더할 나위 없이 두텁고, 참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공자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곱 대 길드 사이의 신뢰 역시 그럴까요?”
“……!”
데일이 말했다. 지금도 길드 시티의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는 일곱 대 길드, 그들의 암투(暗鬪)에 대해서.
“말씀드렸듯이, 저희 작센 공작 가는 적지 않은 투자를 감수할 의지가 있습니다.”
작센 공작 가의 적지 않은 투자. 그 말의 무게를 헤아린 길드 마스터가 숨을 삼켰다.
“어디까지나 차기 ‘시티 마스터’가 될, 일곱 길드의 마스터 중 하나에게 말이지요.”
“설마……!”
“그리고 보아하니, 칼리말라 길드의 마스터께서는 무척 흥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시네요.”
겉으로 보기에 ‘길드 시티’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신뢰의 상징이다.
“야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일곱 조직이 서로의 밥그릇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 불과하다.
“주는 것이 있고, 받는 것이 있을 겁니다.”
데일이 말했다. 자기 앞에 있는 남자를 ‘시티 마스터’의 자리에 앉힐 수 있는 확신과 함께.
“그럼 부디,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생각하길 바라지요.”
의미심장하게 말을 남기고, 데일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무, 무엇을.”
바로 그때였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십니까?”
길드 마스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일이 작센 공작 가의 힘을 등에 업고, 그에게 ‘시티 마스터’의 자리를 넘겨줄 경우. 그 대가로 데일과 작센 공작 가가 바라고자 하는 것.
“장부(帳簿)를 바랍니다.”
“……!”
“길드 시티의 ‘시티 마스터’가 되어 손에 넣게 될 장부를.”
시티 마스터의 장부.
금품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일. 길드 시티, 나아가 일곱 대 길드 전체가 가진 재화의 흐름. 얼핏 보기에는 별 것 아니게 들려도,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길드 시티에게 있어 신뢰는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장부는 곧 신뢰의 심장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 그것을 넘겨주는 것은 길드 시티의 심장 그 자체를 넘겨주는 것과 같으리라.
적어도 길드 마스터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의 저울이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가 함께할 경우, 작센 가는 마음을 놓고 더욱 커다란 투자를 하겠지요.”
데일이 말했다.
“제가 거느린 ‘블랙아머 컴퍼니’와 더불어, 작센의 군세가 길드 시티와 함께할 겁니다.”
북부에 웅크리고 있는 흑곰. 대륙 제일의 대제후, 작센 공작 가의 이름이 갖는 힘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데일은 바로 그 뒷배를 아끼지 않고 활용하고 있었다.
“저는 공식적으로 작센 공작 가와 길드 시티가, 하나의 배에 타기를 바랍니다.”
“…….”
“그럼 길드 마스터께서 결정을 내리실 사이에.”
데일이 말을 잇는다.
“잠시, 도시 구경이라도 다녀와야겠네요.”
길드 시티와의 확고한 동맹. 그 제의를 당대 ‘시티 마스터’가 아니라, 일개 길드 마스터에게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손으로 실을 묶어 왕좌에 올리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으니까.
* * *
그 시각.
“차, 차기 시티 마스터라고 하셨습니까?”
‘아르테 델라 라나’.
길드 시티의 일곱 대 길드 중 하나이자, 양모상(羊毛商)을 내세우고 있는 길드. 바로 그 ‘라나 길드의 도시’에서, 길드 마스터가 숨을 삼켰다.
그의 앞에는 금발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블랙마켓의 초청장을 받은 핏빛공 ‘유리스 후작’의 대리자.
레이 유리스.
그의 목적은 결코 블랙마켓에 참여하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우리 제국과 황제 폐하, 나아가 저의 아버지께서는…….”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차기 ‘시티 마스터’를 결정하는 데 있어.”
제국과 적색 마탑을 뒷배로 삼으며.
“라나 길드의 마스터야말로 최고의 적임자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은 천하의 길드 시티라 할지라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사람의 천성이란 것은, 늘 자기보다 강한 존재 앞에 엎드리길 좋아하는 생물이니까.
힘. 핏빛공, 그리고 적색 마탑이 추구하는 사상.
힘이 있는 자가 세상을 손에 넣는다. 황금이나 지혜도, 지식도, 나머지 마탑의 마법사들이 쌓아 올린 온갖 비밀마저도, 모두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탁이나 요청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어디까지나 결정 사항이지요.”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 * *
길드 시티는 참으로 여흥 거리가 많은 도시였다. 적어도 유흥이란 점에서는 그러했다.
‘대 길드의 거리’를 제외하고, 도시 전체에 걸쳐 홍등가와 도박장이 늘어서 있는 환락의 도시. 그러나 하나같이 데일의 흥미를 살 것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데일은 확실한 목적지를 갖고, 도시를 가로질렀다.
앞으로 이 도시에서 벌어질 치열한 싸움을 생각했을 때, 지금부터 처리해두어야 할 일들은 산더미와 같았으니까.
데일은 지금, 바로 그 산의 가장 아래층을 향하고 있었다. 칼리말라의 도시, 그 뒷골목.
‘이쯤이었나.’
흘끗 보니, 뒷골목의 석벽 구석에 특유의 ‘암호’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찾아왔네.’
그 암호를 보고 데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벌써 몇 해가 지났을까. ──시프 길드 ‘컬라이더스코프’가 그날, 데일과 샬롯을 습격한 것은.
적어도 정말 실력 있는 범죄 길드의 경우, 제국 제일의 대제후를 습격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은 없다. 하물며 그것이 ‘작센 공작 가’일 경우에는 더더욱.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강자 역시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성검사가 천금의 재화를 내밀어도 그 의뢰를 거절했으리라.
‘컬라이더스코프’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시,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성검사의 의뢰가 왔겠지.
실력자 몇 명이 있는 일개 조무래기 길드. 사태의 중대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가 제시하는 금화에 맹목(盲目)이 되어버린 자들.
그리고 지금,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해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