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88화 (88/301)

88화

* * *

동료 하나 없이, 달랑 검 하나를 쥐고 대륙을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다. 설령 검 하나로 수십, 수백 명을 도륙하는 전설 같은 기사들이 있는 세계라고 해도.

나아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 ‘여행자’가 그 정도의 실력자일 확률은 제로에 가까우리라.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애초에 그 정도의 실력자가 저런 누추한 꼴로 돌아다닐 이유도 없었고.

제국 남부, 길드 시티를 가로막고 있는 마르셀 산맥.

그렇기에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산적 무리 ‘그린우드’의 일당은 주저하지 않았다. 흑색 로브 차림의 여행자를 가로막고, 그가 가진 것을 털어먹기 위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꼭 값진 금화를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남부 마르셀 산맥 너머에 있는 길드 시티.

그곳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는 상품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린우드의 도적들은 길드 시티에게 주기적으로 ‘상품’을 납품하는 하청 업체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대 길드의 암묵적 동의 아래, 그들의 사업은 무척이나 성황이었다.

“허허, 이 겁없는 사람 좀 보게.”

적어도 바로 그 ‘여행자’가 그들을 찾아올 때까지는 그랬다.

“겁도 없이 우리 구역에 발 들이는 걸 보니, 외지에서 온 손님이신가?”

“암, 그렇고말고! 참으로 운도 없게 됐어!”

그린우드의 패거리들이 낄낄거렸고, 여행자는 침묵을 지켰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후드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가 무척이나 어두웠다.

“……보아하니 여기서 인신매매 사업이라도 벌이고 있는 모양이지?”

로브 차림의 여행자가 입을 열었다.

겉보기로 알 수 없는 다소 앳된 목소리였다.

“……!”

그러나 그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일순 그린우드의 무리 사이에서 정적이 감돌았다. 도적들을 앞에 두고, 그토록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하기야, 일개 피라미랑 길게 얘기해서 뭐하겠냐.”

여행자, 작센의 데일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이, 이 새끼……!”

그린우드의 패거리 사이에서 경계의 기색이 내려앉았다. 침묵 역시 길지 않았다.

앞서 도끼를 쥐고 있는 도적 하나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서걱!

그와 동시에, 그린우드의 패거리들은 일순 무엇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도끼를 쥐고 있는 팔이 사라졌다. 잘린 팔을 따라 피가 솟구쳤고,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적의 몸을 따라 ‘핏빛의 실’이 휘감겼다. 정수리에서 입술과 목덜미를 타고 내리며, 가슴팍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직후 또 하나의 ‘핏빛의 실’이 그어졌고, 어느덧 수십 개의 혈선(血腺)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후두둑!

도적의 몸이, 흡사 수백 개의 깍두기 조각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화 「큐브」의 도입부처럼, 고통에 몸부림을 치거나 비명을 지를 새조차 없이.

“그, 그림자에서…….”

깍두기 조각이 되어 스러진 동료를 보고, 그린우드의 패거리가 중얼거렸다.

“괴, 괴물이 나왔어……!”

어느덧 데일의 곁에, 실체를 가진 그림자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흑색 투구 밑으로 칠흑처럼 검고 어두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밤까마귀 기사를 상징하는 흑색 갑주로 무장하고, 손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기사 검이 들려 있었다. 보통의 밤까마귀 기사가 아니다. 침묵의 서약을 맺고, 그림자 속에서 작센 가를 보호하는 최고 전력.

기사의 고결함이나 덕목 같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암살자의 살검(殺劍)이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작센 가의 방식을 따라 휘둘러지는 최강의 기사 전력.

《그레이브 가드》…… 오렐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레이디 섀도우.

작센 공작 가가 아니라, 철저하게 데일의 그림자 속에서 충성하는 여기사.

그날, 오렐리아는 자신의 의지로 데일의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검은 산양의 서』를 통해, 그녀의 그림자와 슈브의 어둠을 동시에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옛 어둠의 어머니’와 성처녀 오렐리아가 맺은 계약이었고, 오렐리아의 모습에서 이 이상 고결한 성처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여야 할 자들입니다. 모두 죽이십시오.”

“주군의 뜻대로.”

데일이 말했다. 오렐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쇄도하며, 재차 검이 휘둘러졌다. 살과 피와 뼈가 흩뿌려졌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때마다, 그녀의 칼끝을 타고 황홀한 쾌락이 솟구쳤다.

“제발, 제발 살려줘……!”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비명이 너무나도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쾌락이란 걸까.

“아아…….”

살육의 열락. 마치 감정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듯이.

신의 주박에서 벗어나, 오렐리아는 자신의 욕망과 의지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둠과 그림자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의지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검은 산양의 서』에 오염되어 있는 어둠일까.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성처녀 오렐리아의 기도는 여신에게 닿지 않았다. ‘검은 공자’는 성처녀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그 파멸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날, 성처녀 오렐리아는 악마와 거래를 했다.

제국의 파멸을 대가로.

살려달라는 도적들의 애걸 속에서, 오렐리아의 검이 휘둘러졌다.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를 휘감고 있는 작센의 흑검(黑劍)을.

* * *

그린우드의 성채.

흑색의 발키리가, 그린우드의 도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 아바타에서, 어느 누가 브리타니아 섬의 고결한 성처녀를 떠올릴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빛으로 이루어진 순백의 날개도, 찬란하고 고결한 일말의 금빛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휘둘러지는 검 하나하나에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담겨 있다.

그날, 『검은 산양의 서』를 통해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한 것은 오롯이 그녀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지금의 그녀를 있게 했다.

검은 성처녀, 레이디 섀도우.

흑색의 발키리가 두르고 있는 망토 자락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솟아났다. 흡사 데일의 ‘그림자 망토’처럼. 칠흑의 꼬챙이가 되어서, 도적들의 육신을 사방에서 내리꽂고 있었다.

피가 흩뿌려졌다.

“아, 아아아…….”

겁에 질린 채 주저앉은 그린우드의 우두머리를 향해,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마, 말씀하십시오!”

데일의 말에, 그린우드의 우두머리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길드 시티의 ‘대 길드’ 중에서 너희와 접선하고 있는 자가 있나?”

공식적으로 대 길드는 각자 금융업이나 직물, 상업이나 법률 등의 길드를 자처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들 하나하나가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온갖 범죄 사업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길드 시티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시 말해, 길드 시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범죄 조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일찍이 데일을 습격한 시프 길드 ‘컬라이더스코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

과거의 흑색 마탑 역시,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실험체’들을 납품받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렇기에 블랙마켓의 고객이 되어 들어가는 것과 별개로 길드 시티의 어둠, 그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고말고요!”

그린우드의 우두머리가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저, 정기적으로 저희가 사로잡은 노예들을 데리러 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 제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데일이 말했다. 어느덧 흑색의 발키리가 검을 거두었다.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뒤로하고.

겁에 질린 우두머리가 오줌을 지렸고, 데일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 정보가 네 목숨줄이 될 테니까.”

* * *

그로부터 며칠 후. 주기적으로 ‘상품’을 납품받기 위해 길드 시티의 사람이 그린우드의 성채를 찾았을 때.

“……!”

그곳에 펼쳐져 있는 참상 앞에서, 그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로브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흑색 로브를 걸치고, 미풍조차 불지 않는 곳에서 망토 자락을 불길하게 펄럭이며.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후드 밑의 그림자가 깊고 어둡다.

아울러 그린우드의 우두머리가, 그 곁에서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있다.

‘뭐, 뭐가 일어났지……?’

처음에는 일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혹시 길드 시티 외에 타지역에서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토벌대가 왔나? 그럼 대체 저기 있는 남자는 누구지?

“길드 시티의 ‘사업 다각화’에는 참으로 경이를 금치 못하겠네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쓰고 있는 후드를 내리며. 후드 밑으로, 애티를 벗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침 잘됐네요.”

그러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해골 장식’을 보자마자, 피가 식는 것 같은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블랙마켓의 초청장이다. 자신 같은 말석(末席)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레벨의 존재.

그것을 고작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쥐고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를 의미했다.

제국 제일의 천재. 아니, 그 이상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센 가의 괴물.

“자, 작센 가의 공자님……!”

“서, 설마 이 도적 무리가 공자님에게 무례한 짓을……!”

길드 시티의 사람이 조심스럽게 되물었고,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갚아야 할 무례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었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푸욱!

동시에 발밑의 그림자에서, 칠흑의 흑검이 솟았다. 벌벌 떨며 무릎 꿇고 있는 그린우드의 우두머리를 향해.

흑검이 그림자 속에서 솟아나고,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컥, 커헉……!”

목이 잘리고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제가 이곳에서 그대를 찾은 것은.”

작센의 ‘검은 공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블랙마켓의 고객과 별개로 어디까지나 ‘흑색 마탑주의 대리자’로서…….”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길드 시티의 대 길드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까닭입니다.”

“대, 대 길드와……!”

“다행스럽게도, 마침 저를 대 길드로 데려다주실 사람이 제 앞에 있네요.”

“……!”

흑색 마탑주의 대리자. 데일의 말에 길드 시티의 사람이 숨을 삼켰다.

‘서, 설마 흑색 마탑에 다시금 ‘실험체’를 제공받기 위한 거래를 하러 왔나?’

적어도 과거의 흑색 마탑이, 길드 시티의 가장 커다란 고객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공포 속에서 길드 시티의 사람이 미소 지었다.

“조, 좋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특유의 비즈니스 스마일이었다.

“작센 공작 가, 나아가 흑색 마탑주의 대리자께서 찾아오신 이상…….”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시작하며.

“저희 길드 시티의 대 길드 역시, 응당 그에 맞는 예를 갖추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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