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87화 (87/301)

87화

* * *

그로부터 얼마 후, 오렐리아는 정식으로 《그레이브 가드》의 기사가 되었다.

하나하나가 아바타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오러 마스터들.

대영주가 거느린 기사 중에서, 오러 마스터로 이루어진 전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센 가의 《그레이브 가드》처럼 그 존재 자체가 베일에 싸여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밤까마귀 기사 중에서도, 침묵의 서약을 맺고 그림자 속에서 작센 가를 보호하는 최고 전력. 그들에게 기사의 고결함이나 덕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자 속에서, 철저하게 ‘작센 가의 방식’으로 휘둘러지는 검.

그들은 하나하나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이자 암살자였다. 필요에 따라 일말의 자비도 없이, 작센 가의 악명(惡名)을 드높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그림자의 검.

오렐리아는 바로 그 ‘무덤의 파수꾼’이 되어, 비로소 데일이 손에 넣은 첫 《그레이브 가드》가 되었다.

데일, 나아가 데일의 마도서 ‘슈브’와 아주 특별한 형태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작센 공작 가가 아니라, 철저히 데일의 그림자 속에서 충성하는 검은 성처녀.

레이디 섀도우(Lady Shadow).

그것이 오렐리아의 새 이름이었다.

작센의 동토에서 종교 재판 끝에 마녀의 혐의로 화형당하고, 몇 줌의 잿더미가 되어버린 망국의 성처녀가 아니라.

* * *

데일의 수행은 착실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4서클의 경지를 얻고, 검의 수행과 더불어 세피아에 의한 무효화 마법의 교육까지. 거기에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공에 의한 가르침도 예외일 수 없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그렇기에 최고의 스승들 사이에서 갈고닦는 데일의 수행은, 날이 갈수록 그 성취를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초대하지 않은 손님 하나가, 작센 공작성을 찾아왔다.

‘길드 시티(Guild City)’의 고위 사절이었다.

일찍이 대륙 남부에 있는 일곱 도시 공화국의 후신이자, 고도로 발달한 금융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대륙의 금화를 장악하고 있는 황금의 제국.

“삼가 작센 공작 각하, 그리고 작센 가의 ‘검은 공자’님을 뵙습니다.”

길드 시티의 고위 사절이, 작센 가의 부자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들 특유의 비즈니스 스마일을 감추지 않고.

제국 남부의 길드 시티에서, 굳이 작센 공작령의 동토를 찾아왔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제가 작센 공작 가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암시장이 열리는 거겠지.”

“헤헤, 역시 공작 각하이십니다.”

그것도 보통의 시장이 아니었다. 길드 시티가 자랑하는 대륙 최대 규모의 암시장.

블랙마켓(Black Market).

보통 사람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며, 길드 시티의 ‘초청장’을 받은 극히 일부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

“시티 마스터께서는 친히 작센 가를 찾아오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계십니다.”

“겉치레는 되었다. 용무를 말하라.”

작센 공작이 차갑게 덧붙였고, 사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블랙마켓이 열리는 데 있어, 천하의 작센 공작 가를 빼놓는 것은 감히 용납될 수 없는 무례이지요.”

그 남자는 작센 공작 가를, 바로 그 암시장에 초대하기 위해 찾아온 자였다.

‘벌써 때가 그렇게 되었나…….’

블랙마켓이 열리는 주기는 일정하지 않다. 그곳에서 거래되는 것은 하급 귀족들로서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초고가의 상품이고, 천하의 대귀족이라도 출혈을 감소할 수밖에 없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니까. 그렇기에 시장을 열 수 있을 정도의 상품이 모였다고 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블랙마켓이 열리는 것이다.

대륙 제일의 귀족과 부호들에게 허락되는 비밀의 장.

그리고 그 이름처럼, 시장이 취급하는 상품의 형태는 사물이나 생명을 가리지 않는다. 모험가들이 지하 미궁에서 손에 넣은 온갖 진기한 상품부터 시작해서, 길드 시티가 독자적 루트로 손에 넣은 온갖 재화와 보물들. 몰락 끝에 노리개로 팔린 귀족 가의 영애나 공자부터,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 생물까지.

“아울러 금회의 블랙마켓에서는…….”

길드 시티의 사절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작센 공작 각하께서도 탐을 내실 ‘아주 특별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탐을 낼 정도의 상품이라.”

옥좌 위의 흑색공이 무겁게 되물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각오는 되어 있느냐?”

“어느 누가 감히, 작센 공작 각하를 상대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뱉겠습니까.”

옥좌에 앉아 있는 저 남자가 가진 악명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 ‘검은 공자’조차 일개 어린아이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흑색공이란 남자의 이름이니까.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길드 시티의 사절이 품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내밀었다. 황금으로 주조한 해골 장식. 그 속에는 ‘길드 시티’의 특별한 암호화 마법이 깃들어 있다.

블랙마켓의 초청장.

“아울러 블랙마켓의 룰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작센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드 시티의 사절 역시, 딱히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쯤에서, 저희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사절이 묵묵히 예를 표하며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을 가로질렀다.

평지풍파란, 어쩌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고요한 평지 위에서 바람과 물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블랙마켓의 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청장을 받은 당사자’가 절대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대귀족이 하나의 장소에 모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리스크가 크니까. 그렇기에 초청장을 받은 귀족은 그의 ‘대리자’를 임명하고, 실제로 시장에 출입하는 것 역시 대리자의 몫이다.

중요한 것은 시장에 나올 상품을 사전에 알 수 없는 까닭에…… 대리자는 그의 주군에게 필요한 상품이 무엇이며, 무엇을 사야 하는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설령 제국 제일의 대제후라 할지라도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품목들 사이에서.

어느 의미에서는 바로 그 점이 블랙마켓의 묘미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주군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대리자의 역할을 맡게 되며, 작센 공작 가의 경우 가주(家主) 흑색공의 의중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였다.

“저를 길드 시티에 보내주십시오.”

흑색공의 아들, 작센의 데일이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작센 공작의 집무실.

데일의 말에, 흑색공이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의 아들이 보여주는 무모함이나 패기에 대해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블랙마켓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대외적으로 취급할 수 없는 ‘고가의 상품’들이 거래되는 곳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데일은 4서클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마법사다. 고위 마법사를 자처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나, 데일의 4서클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을 때. 제국의 강자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서야, 자기 몸 하나를 지키기에는 족하고도 넘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리라.

“길드 시티는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유념하고 있습니다.”

길드 시티. 과거, 일곱 도시 공화국이 제국에 복속되며 새로 얻은 이름. 일곱 개의 대(大) 길드가 각각 일곱 도시를 지배하며, 대 길드의 통치 밑에 여러 소 길드들이 복종하고 있는 도시 동맹이자, 과두 공화정.

‘시티 마스터’는 바로 그 일곱 개의 ‘대 길드’에서 투표로 뽑는 대표자를 의미했다.

통일 전쟁 당시. 제국의 각종 더러운 치부는 ‘길드 시티’의 협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였고, 그렇기에 과거의 데일은 그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사냥개가 되어 길드 시티의 속내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가령 시티 마스터나 대 길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림자 법정’이라거나.

“황금과 폭력이 일체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무법지대지.”

그 말대로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조차 금화 몇 닢으로 해결되는 황금의 제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 이상의 부를 손에 넣거나, 적보다 강한 힘을 갖는 수밖에 없다.

‘금이 곧 힘이다(Gold is Power).’

길드 마스터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바로 그 말처럼. 그렇기에 길드 시티의 중요성이 커다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블랙마켓이 열리는 이 시기에는 더더욱.

“길드 시티는 저희 작센 가에 부족한 전부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제국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금융망과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고도의 금융업부터 의식주의 축을 담당하는 직물업에 이르기까지.

“달리 말해서, 대륙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허파와 같지요.”

작센 가에는 힘과 재산이 있고, 흑색 마탑이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불사의 군세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척박한 땅과 헤아릴 수 없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군벌(軍閥) 귀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그렇기에 길드 시티가 가진 힘이 필요했다.

대륙 전체에 맥을 뻗고 있는 금융망과 상공업. 보다 평화적으로, 그러나 병사를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상대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카드. 때때로 금과 모직물은 무기 이상의 위협이 되는 법이다.

“너에게는 그저 블랙마켓 하나가 목적으로 보이지는 않는가 보구나.”

데일의 의중을 헤아린 흑색공이 말했다.

“달리 생각이 있는 것이냐?”

“저는 늘 우리 작센 가를 위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일이 대답했고, 흑색공이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두 부자의 대화였다.

* * *

블랙마켓의 철칙, 그 둘. 공식적으로 시장에 참석하는 대리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열두 살의 데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조숙한 아이였다.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를 흑색 로브로 의태시켜 후드를 깊이 눌러쓸 경우, 얼핏 보기에 보통의 여행자와 크게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흑색 로브 차림의 여행자로 위장하고, 길드 시티를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세피아를 비롯한 작센 가의 호위 기사들조차 없이. 그 나름의 보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길드 시티에서 펼치게 될 활동을 고려할 때, 이전처럼 거추장스러운 동행자는 불필요하다.

4서클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규격 외의 마법사로서.

‘슬슬 디스펠 마법도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비로소 보호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암약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길드 시티를 지배하는 것은 일곱 개의 대 길드다. 그러나 입법과 행정을 총괄하는 일곱 길드와 함께, 실질적으로 도시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다.

길드 시티의 사법을 집행하는 자들.

‘그림자 법정(Shadow Court)’.

그리고 그에 앞서 길드 시티에서 열리게 될 블랙마켓.

흑색공이 탐을 낼 정도의 상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짧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나, 능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여정이었다. 데일이 고개를 들고, 말의 고삐를 당겼다.

햇살이 쏟아졌고, 그러나 흑색 로브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는 무척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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