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85화 (85/301)

85화

* * *

사상(思想)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나 사회, 인생 따위에 관한 일정한 견해.’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 누구나 저마다의 삶이 있고, 삶은 곧 사상을 낳는다.

가령 ‘힘’이야말로 이 세상의 절대적 가치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적색 마탑의 사상.

자기 씨앗을 퍼뜨려, 그 핏줄을 대대손손 계승하는 것이 지고의 가치라 믿는 《돼지의 왕》.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알량한 도덕 따위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강경파 흑마법사들. 일찍이 흑적 교도대의 부대장들이 보여준 지옥 같은 심상 세계.

마법사나 기사들이, 자신의 검이나 세계에 투영하는 ‘사상’은 바로 그러한 개념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 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삶의 관점. 그들이 살아가며 삶 속에서 경험하고 쌓아 올린 의식의 체계적 집합.

그것이 검과 마법의 궁극과 맞물리며 펼쳐지는 것이 바로 ‘아바타’와 ‘사상의 세계’다.

아바타 ─ 기사는 ‘오러’를 통해 그 사상을 자신의 검과 갑주, 육체에 덧씌우며.

사상의 세계 ─ 마법사는 ‘마력’을 통해 그 사상을 세계 그 자체에 덧씌운다.

마도서의 화신(Avatar) 역시 그 맥락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밤의 장막을 따라 희끗희끗한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그곳에서, 강철의 검이 성검 뒤랑달의 칼날을 막아내고 있었다.

일찍이 제국의 사냥개로서, 무수한 강자들을 도륙한 용사의 애검.

‘피스메이커(Peacemaker)’.

평화의 중재자.

그 아이러니한 이름을 가진 그 검이, 데일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의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네 개째의 서클과 함께.

4서클의 경지. 벽이 깨지고, 그 너머의 새 지평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울러 데일의 손에 들려 있는 용사의 검, 피스메이커.

실체가 있는 진짜 검이 아니다.

사상의 투영. 어디까지나 마법사가 자신의 세계에 덧씌우는 ‘실체 있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결코 덧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아니었다.

비록 마법사가 칼자루를 쥐고 기사 흉내를 내는 것처럼 무모하고 우스운 꼴도 없겠으나, 데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고,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빙글 고쳐 잡는다. 그립감이 무척이나 익숙하다.

‘그러나 아직 이 검의 능력을 100%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 부족하다.

“이곳은 나의 세계다.”

데일이 다시금 중얼거렸다. 끝없이 자기 암시를 거듭하며.

이 세계는 데일 홀로 쌓아 올린 세계가 아니었다. 데일의 세계는 결코 ‘데일 하나의 세계’가 아니었으므로.

전생의 데일.

그 남자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최강의 괴수 사냥꾼, 이계의 용사, 제국의 사냥개.

대개의 경우, 검과 마법 중 무엇 하나 일평생을 바쳐도 그 궁극에 도달할 수 있을 거란 보장조차 없다.

그러나 ‘일평생’ 그 이상을 바친 자는?

그것이 데일의 깨달음이었고, 그 깨달음이 4서클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계의 용사, 그리고 작센의 데일.

두 개의 삶에서 비롯되는 두 개의 사상을, 하나의 세계에 융합하는 것. 역설적이게도, 검을 쥠으로써 ‘마법사의 경지’를 더 높이 이끌어준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볍다.

그대로 거리를 벌린 데일이, 성검 뒤랑달을 쥐고 있는 《돼지의 왕》을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의 검에, 용사의 무위를 투영하며 데일이 땅을 박찼다.

검이 휘둘러졌다.

자신이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란 사실조차 개의치 않고, 아바타조차 없이 그저 ‘피스메이커’의 칼자루를 쥐고.

카앙!

성검과 데일의 검이 부딪쳤다.

카앙!

부딪치고, 거리를 벌리고, 다시 부딪쳤다. 부딪칠 때마다, 피스메이커에 잠들어 있는 힘이 깨어나고 있었다.

나아가 보다 확실한 용사로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데일의 흑색 서코트가 펄럭이며, 그림자의 칼날을 생성했다. 네 개의 서클을 가속하고 끝없이 쏟아지는 흑청의 마력을 방출했다.

“샤드 매그넘.”

즉석에서 얼음의 벽을 세우고 폭파해, 얼음 조각을 흩뿌린다.

“섀도우 불릿, 「개틀링식」.”

즉석에서 발밑의 망토 자락을 따라, 그림자의 총알들이 쏟아졌다. 마법의 위력이나 속도 모두가, 이전과 비교할 바 없이 증폭되어 있다.

검과 마법.

검을 쥐고 동시에 오러를 쓸 수 없는 맹점을 마법으로 커버하며, 대륙 최강의 기사 중 하나를 상대로 힘겹게나마 호각을 유지하고 있다.

몸이 가볍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세상이 너무나도 느려진 것 같다. 자신이 마법사란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검을 쥐고 있는 감촉이 익숙하다.

이것이 정녕 ‘오러를 쓸 수 없는 기사’가 맞을까 싶을 정도의 움직임.

‘할 수 있다……!’

데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확신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제법이구나, 애송이.”

멧돼지의 얼굴을 가진 성검사가, 어금니를 과시하며 웃었다.

“……!”

그와 동시에, 성검사의 몸에서 흩뿌려지는 투기(鬪氣)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투신의 기운.

데일이 그에 맞서, 새로 손에 넣은 힘을 시험하려 할 때였다.

─ 때가 되었다.

탁!

‘죽음’이 해골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일대의 풍경이 정지했다.

성검사와 제국군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데일 홀로였다.

시린 냉기와 고독으로 가득 찬 지평.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신사를 보는 듯한 ‘죽음’과, 동시대의 기품 있는 레이디를 보는 듯한 ‘옛 어둠의 어머니’가 있었다.

천진하고 어린 소녀가 아니라, 두 개의 흑색 양각(羊角)이 우뚝 솟은 칠흑의 숙녀였다.

집합 무의식의 기저에 있는 아키타입.

역사가 시작하기도 전의 고대부터,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 공유하고 있는 태고의 심상.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각종 신화나 전설 등의 모티브가 되는 존재들. 태고의 상징──바로 그 화신들이 데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데일이 물었다.

“처음부터 저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 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 아가야.

‘죽음’이 대답했다. 해골 지팡이를 쥐고, 또 하나의 손에는 어느덧 시가 담배가 들린 채.

─ 이 우주에서 가장 맛있는 엽궐련(葉卷煙)의 이름과…….

시가를 입에 물며 ‘죽음’이 말을 이었다.

─ 네가 어떻게 ‘나의 방문’에서 벗어났는지도 말이지.

“……!”

그 말에,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삼키고 나서, 데일이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 아,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죽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엇 하나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 죽음은 늘 입이 무거운 법이니까.

탁!

그와 동시에, 다시금 ‘죽음’이 해골 지팡이를 내리쳤다. 시가를 입에 물고서.

데일의 세계가 사라졌다. 어느덧 그곳은 작센 공작성의 일실이었다.

“…….”

아버지 작센 공작의 집무실.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데일이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사히 그의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구나.”

흑색공이 흡족함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존재는…….”

“진리의 세계에 도달했을 때, 나는 ‘죽음’과 계약을 맺었다.”

흑색공이 말했다.

“나의 마도서──『심장의 저울』에 비로소 그 존재의 일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지.”

“그 말씀은, 불사공 프레데릭 역시…….”

“그렇다.”

불사공 프레데릭 역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일찍이 그가 집필했고, 데일의 심장에 그 촉수를 뿌리내린 『검은 산양의 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러나 우리 곁에 있는 그 존재들은.”

흑색공이 말을 잇는다.

“어디까지나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체가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일부.

“이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동굴이며.”

“…….”

“우리는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진실이라 믿고 있는 죄수들이지.”

그렇기에 마법사는 동굴 너머에 있는 빛의 세계, 진리의 세계(Idea)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상의 종착점.

“아무래도 너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구나.”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이내 흑색공이 미소 지었다. 숨길 수 없는 아버지의 미소였다.

“4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축하한다.”

심장에 뿌리내린 칠흑의 촉수가, 데일의 4서클을 휘감고 있다. 네 개의 서클. 어엿한 마법사, 그 이상의 경지.

스물 남짓에 3서클에 도달하는 것조차 영재란 수식이 아깝지 않고, 재능 없는 자들은 일평생을 바쳐도 4서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바로 그 영역을, 고작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손에 넣은 것이다.

경이롭다는 말조차 형용할 수 없는 성취.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검은 공자’의 명성이다.

그리고 새롭게 손에 넣은 경지와 함께, 다음 여정을 준비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세피아 선생님.”

그즈음, 4서클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데일이 자신의 성취를 보고했다.

“……아무래도 내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은 없는 모양이구나.”

6서클의 엘프 마법사가 씁쓸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데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직 세피아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서로가 마음의 교류를 나누었다고 해도, 여전히 세피아는 어린 데일의 가정교사였다.

나아가 6서클의 엘프 마법사가 가진 경지는 결코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날, 적탑의 장로 ‘염혈의 월터’를 상대로 세피아가 보여준 기예.

스펠 카운터(Spell Counter).

“달리 배우고 싶은 마법이라도 있느냐?”

세피아의 물음에,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4서클의 천재 마법사. 나아가 수(水) · 암(暗)의 이중 속성을 추구하는 듀얼 메이지로서.

“디스펠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 * *

이튿날, 헬무트 블랙베어 경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느 때처럼 그림자 망토로 검(劍)을 수행해야 할 데일이, 일찍이 그들과 같은 ‘기사 검’을 쥐고 수행을 자처한 것이다.

“정식으로 검을……?”

뜻밖의 모습에, 헬무트 경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데일이 여느 때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러를 쓸 수 없는 마법사가, 어디까지 기사와 동등하게 맞설 수 있는지.”

“굳이 기사와 같은 싸움 방식을 고집하시는 겁니까?”

마법사 역시 그 나름대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결코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의 육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터무니없고 무모하며, 효율도 좋지 않으리라.

그것이 대륙 칠검──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생각이었으나,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바로 그 ‘검은 공자’다.

“좋습니다, 공자님!”

그렇기에 헬무트 경은 의심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검이라고 해서, 너무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데일이 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4서클의 각성과 함께, 자신의 손에 들린 전생의 애검을 떠올리며.

4서클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 데일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무척이나 알기 쉬웠다.

초심(初心).

처음 작센 공작 가에서 수행할 때와 같다.

광검 헬무트 경, 흑색공, 그리고 엘프 마법사 세피아까지. 최고의 스승들 사이에서, 가감 없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갈고닦는 것.

그리고 지금의 데일은, 갓 검을 쥐고 서클을 생성한 그 시절의 풋내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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