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탁!
‘죽음’이 해골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쳤다. 흑색공의 마도서──『심장의 저울』의 아바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신사를 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서.
사상의 화신(Avatar)이라는 점에서, 기사들의 아바타와 개념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저 존재가 갖는 무게감은 일개 기사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장 데일의 등 뒤에 있는 존재가 그러하듯이.
바로 그때였다.
푸드덕!
‘죽음’의 등 뒤에서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갯짓하며, 그대로 데일을 향해 쇄도했다. 앨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새」처럼.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고 있는 까마귀 떼가, 일제히 데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에 맞서 데일이 ‘그림자 망토’를 꺼내 들었다.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일대를 어둠의 호수로 물들였다.
쇄도하는 까마귀 떼를 가로막기 위해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가 쏘아졌다.
세 개의 서클과 촉수, 두 개의 흑색 원천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마력을 생성하며.
‘죽음.’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공조차 그 존재 앞에서는 일개 어린아이에 불과하리라.
그리고──.
“……!”
까마귀 무리를 막기 위한 섀도우 러커의 촉수가, 덧없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신기루 위를 향해서 휘둘러지는 검처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신기루가 아니었다.
쇄도하는 까마귀 무리가, 그대로 데일의 육체를 향해 내리꽂혔다.
푸욱!
─ 말하지 않았느냐.
‘죽음’이 말했다.
─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고.
“……!”
데일이 힘없이 고개를 내렸다. 까마귀들의 무리가, 데일의 배를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검고 어두운 깃털이 흩날리고 있었다.
‘……!’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육체가 보였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까마귀들이 둘러싸고, 자신의 육체를 쪼아먹고 있는 모습이.
데일은 바로 그 모습을, 허공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흡사 유체이탈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처럼.
탁!
다시금 ‘죽음’이 손에 쥐고 있는 해골 지팡이를 내리쳤다. 주위의 풍경이 일전하기 시작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데일의 세계. 그러나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지평이 아니었다.
푸욱!
등 뒤에서,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싸늘한 쇠붙이의 감촉. 성검 뒤랑달의 칼날.
고개를 돌리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었다.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 그 남자를 필두로 하는 제국의 대부대.
─ 호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데일의 곁에서,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 참으로 흥미로운 풍경이구나.
─ 어때, 할아범?
슈브가 즐겁다는 듯이 키득거린다.
─ 수억 개의 별들이 태어나고 죽는 세월 속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
─ 마침 아가의 부탁을 들어주기에 적합한 자리구나.
‘죽음’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나의 ‘방문’을 받고도 살아남은 아이야.
탁!
그리고 다시금 해골 지팡이를 내리쳤다.
─ 어디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보아라.
필사적으로 살아남아라. 그러나 성검 뒤랑달의 칼날은 이미 데일의 등 뒤를 찢고, 가슴팍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으란 거냐…….’
데일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의식이 흐려졌다. 또다시, 죽음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잠기고 나서.
푸욱!
다시금 데일을 깨우는 것은, 성검 뒤랑달의 칼날이었다.
‘……!’
불과 몇 초 전의 일을 다시금 재생하는 것처럼. 칼날이, 그의 등 뒤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두 차례의 죽음. ──그러나 다음 차례가 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재빨리 그림자 망토의 능력 ‘망령화’를 발동하는 동시에, 등 뒤에서 내리꽂히는 성검의 일격을 비껴냈다.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돌린다.
잊을 수 없는 풍경이 있었다.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 그를 보좌하는 성 막달레나 기사들을 비롯해,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국의 대부대가.
“……!”
심장을 휘감고 있는 세 개의 서클이, 미친 듯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악의를 드러내고 있는 성검사를 향해서.
데일이 일대에 그림자 망토의 영역을 확장했다.
어둠의 호수. 그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섀도우 러커》들이, 일제히 가시 촉수를 내뿜었다.
촤아악!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가시 촉수가, 제국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어둠의 호수, 그 아래에서 솟아 육체를 갈기갈기 찢는 가시 촉수의 지옥.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도륙 속에서, 그러나 그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성검사의 육체가 오러의 힘에 휩싸였다.
‘왔다……!’
《돼지의 왕》.
축생의 얼굴을 가진 추악한 욕망 덩어리. 그러나 일찍이 브리타니아 섬에서 보았을 때의 그것과는 다르다.
멧돼지처럼 커다란 두 개의 어금니가 솟아서,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광전사의 투기를 뿜어내고 있다.
──투신(鬪神)이, 그곳에 있었다.
고위 마법사가 그렇듯, 기사 역시 다르지 않다.
사상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다.
가령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경우…… 여자를 향해 자신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우생의 욕망이 아니라.
경쟁해야 할 ‘수컷’을 배제하겠다는 철저한 강자존(强者存)의 투쟁에 의식을 집중할 때, 그가 갖는 진짜 모습이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투쟁의 신.
데일이 쓰러뜨려야 할 대륙 제일의 강자 중 하나.
바로 그 강자가, 땅을 박찼다.
일섬.
잘린 데일의 목이, 겨울의 밑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 * *
다시금 성검 뒤랑달의 칼날이 등 뒤에서 내리꽂혔다.
망령화를 통해 등 뒤의 일격을 피하고, 섀도우 러커를 통해 일대의 제국군을 도륙하며──.
땅을 박차고 쇄도하는 성검사의 일검을 막아냈다.
직후 이검(二劍)이 휘둘러졌고, 데일의 잘린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 * *
죽고, 죽고,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돌아오는 것은, 성검 뒤랑달의 칼날이었으니까.
보통 사람의 경우,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생지옥.
그러나 끝없이 죽음을 경험하는 데일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호승심이었다.
이것은 결코 ‘진짜’가 아니다.
데일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성검사의 이미지를 덧씌운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적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실감 나는 모의 전투를 마음껏 경험할 수 있다니.
데일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수행을 거듭해 왔다는 것일까.
‘좋아, 어디 끝까지 가보자.’
지금의 데일에게 저 투신을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될까. 0.1%? 그것조차 과하다. 0.01%, 그 아래여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결코 제로가 아니다. 그 사실로 족했다.
데일이 땅을 박찼다.
데일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그림자 망토의 칼날이, 어느덧 성검사의 삼검(三劍)을 받아치고 있었다.
죽고, 죽고, 또 죽고, 얼마나 죽었을까.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밑거름 삼아, 세 차례의 검을 튕겨내는 데 성공했다.
대륙 칠검이라 일컬어지는 제국의 최강자 중 하나를 상대로.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터질 듯이 가속하는 세 개의 서클을 회전시켜, 온갖 마법의 수식을 조합하고, 바로 저 투신을 상대로 시험에 시험을 거듭했다.
냉기의 벽, 얼음의 투사체, 그림자 총알.
그리고 그 무엇도 저 존재를 돌파할 수 없었다.
─ 호오, 아직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나.
‘죽음’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 말했잖아, 할아범.
슈브가 짐짓 자랑스럽게 웃었다.
─ 내 오빠야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죽고, 죽고, 그러나 다시금 두 발로 일어서며 필사적으로 ‘다음 수’를 생각하는 데일을 보며.
무모하고 의미 없는 발버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짜내도, 고작 3서클의 마법사가 성검사를 상대로 이길 확률 같은 것은 없다고.
일백, 일천…… 설령 그 이상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데일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희박하나마 확실한 승산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상대의 움직임은 죽기 전의 움직임에서 바뀌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저것은 그저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기계나 다름없다. 수백, 수천에 가까운 경우의 수 속에서, 데일은 냉정하게 ‘전투의 흐름’을 복기하고 있었다.
삼검을 막아내는 것까지는 수월하다.
휘둘러지는 일검을 그림자 망토로 쳐내고, 이검을 좌측으로 회피하며 섀도우 불릿을 쏘고, 즉시 얼음의 벽을 세워 올린 후 폭발시켜, 데일의 쪽에서 역습을 넣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느덧 《돼지의 왕》이 데일의 육신을 도륙 내고 있었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아울러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데일은 알 수 있었다.
─ 참으로 고집스러운 아이구나.
자신의 검(劍)이, 명백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용사의 기억’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비로소, 그의 움직임을 희미하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전생의 경지가 존재하는 데일이기에 가능한 행위였고, 데일은 필사적으로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계의 용사.
일찍이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 따위는 감히 적수조차 되지 못할 과거의 자신.
바로 그 용사의 검과 마법을, 흡사 점자를 더듬듯이 되짚고 있었다.
심장의 서클이 터질 것처럼 가속하고, 당장에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4서클을 이루겠다는 애초의 목적조차도.
그저, 저 남자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돼지의 왕》을.
오로지 그것을 위한 망집(妄執)의 화신이 되어서, 저 앞의 존재를 쓰러뜨리기 위해, 죽음을 거듭하고 또 거듭했다.
거듭하며 생각했다.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은 도대체 몇 차례의 죽음을 경험했을까.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8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기 위해.
─ 참으로 강철 같은 의지야.
‘죽음’이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 그러나 마지막까지 ‘자신의 세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
─ …….
─ 마음이 꺾이는 것은 찰나다.
냉정하게 지적하는 ‘죽음’을 향해, 슈브가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렸다.
4서클의 깨달음을 앞에 두고, 망집의 화신이 되어 있는 데일을 보며.
마치 데일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느덧 데일은 다시금 성검사의 첫 일격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거듭하고 거듭해도 좀처럼 성검사의 ‘사검(四劍)’을 막아내지 못했다.
─ 시간의 세례 앞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를 잃고 빛이 바래는 법이지.
─ …….
끝없는 죽음 속에서 착실하게 꺾이고 있는 데일의 의지를 보며, 죽음이 말했다.
다시금 데일이 땅을 박찼다.
그림자 망토로 일검(一劍)을 막아내고, 몸을 비껴 이검(二劍)을 막아내고. 얼음의 벽을 세우고 그 파편을 흩뿌려 삼검(三劍)을 막아내고.
제4의 검이 휘둘러졌다.
카앙!
휘둘러지는 성검사의 사검이, 강철에 부딪히며 튕겨 나갔다.
“──생각해 보니.”
성검사의 ‘사검’을 막아내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이.
그의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네 개째의 서클’을 느끼며.
“여기는 나의 세계였지.”
데일의 손에는 어느덧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일찍이 ‘이계의 용사’의 애검(愛劍)이자, 대륙의 강자들을 끝없이 도륙한 사냥개의 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