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 *
“오렐리아 님께서는 ‘성처녀’를 사칭한 죄로, 마녀의 혐의가 씌워져…….”
데일이 말했다.
“이곳 작센의 동토에서, 화형 끝에 몇 줌의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성처녀 오렐리아’가 맞이한 결말.
“저는 죽은 사람이 되었군요.”
“하늘의 꼭두각시를 자처한 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지요.”
오렐리아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녀는 하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오렐리아가 무릎을 꿇고,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그림자 속에서, 제 검이 휘둘러져야 할 곳을 알려주십시오.”
고결하고 긍지 높은 기사의 검이 아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어두운 욕망과 그림자를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살육의 열락(悅樂)을 위해, 어둠 속에 숨어 ‘검은 공자’의 뜻대로 휘둘러지는 암살자의 검.
검은 성처녀.
작센의 그림자 속에서, 이름 없는 암살자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 * *
브리타니아 섬에서의 일, 나아가 성처녀 오렐리아의 존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작센 공작의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기에 데일은 솔직하게 일체의 진실을 고하기로 했다.
흑백 회전의 승리 이후, 시스티나 교황령에서 『검은 산양의 서』를 손에 넣은 일부터. 나아가 지옥의 도서관에서 ‘니콜라이 추기경’을 쓰러뜨리고 그의 심장에 절대복종의 기아스를 새겨넣은 일까지.
작센 공작은 더 이상 속여야 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넘어,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흑색공이 ‘진리의 세계’에 대해 말해주었듯, 데일 역시 그 나름의 진실을 고할 필요가 있었다.
“……『검은 산양의 서』라고?”
그 말을 듣고 아버지 흑색공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달리 아버지를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데일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저 이 마도서의 이름이 갖는 무게, 나아가 아버지께서 염려하실 것을 걱정한 까닭에──.”
역설적으로, 열두 살 어린아이의 방패 뒤에 자신을 숨김으로써.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어린아이처럼.
그 영악함 앞에서, 흑색공이 침묵을 지켰다.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칠흑의 촉수. 작센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의 유산이 갖는 의미를 모르지 않는 까닭에.
“지금도 ‘그것’이 너와 함께 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데일의 설명을 듣고 나서, 흑색공이 호기심이 풀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비로소 너의 활약이 설명되는구나.”
작센의 피를 잇는 자로서, 나아가 데일의 터무니없는 재능을 고려했을 때, 오히려 『검은 산양의 서』와 계약을 맺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데일의 무모함을 책망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아니, 그 무모함이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작센의 증거’가 아니었나.
진리를 손에 넣기 위해, 기꺼이 무저갱 속으로 뛰어드는 어둠의 일족.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걸까.’
──그리하여 데일이 브리타니아 섬에서의 일. 성처녀 오렐리아의 이야기에 도달했을 즈음.
“그녀가 가진 능력이 정말로 ‘여신의 계시’일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데일이 말했다.
“아바타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로서, 그녀의 전력이 갖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도박을 했구나.”
작센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데일이 보여준 터무니없을 정도의 대담함 앞에서는, 차마 책망할 여력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작센 공작이 느끼는 것은 경이였다.
브리타니아 섬에서, 전장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고 좌지우지하는 능력. 제국에서 울려 퍼지는 ‘검은 공자’의 활약은, 이제 작센 가를 위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국의 전쟁 영웅.
“공작성의 《그레이브 가드》들에게 그녀의 능력을 시험하고, 천천히 그녀의 처우를 결정하도록 하자꾸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느냐?”
“…….”
침묵 끝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저 하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꼭두각시.
“그렇기에 저는 오렐리아 님의 의지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었을 따름입니다.”
“……‘그것’의 힘을 빌려서 말이냐?”
“제가 보여준 것은 그녀의 그림자였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자신의 그림자와 어두운 욕망을 조우하고, 결정을 내린 것은 오렐리아 님이지요.”
“그렇겠지.”
흑색공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것’을 보았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끄덕이고 나서 말을 잇는다. 일찍이 데일과 흑색공, 두 사람의 약속을 떠올리며.
제국이 다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피를 흘리려 할 때. 다시금 그 같은 악업을 거듭하지 않도록, 흑색공이 ‘진리의 세계’에서 손에 넣은 힘을 가르쳐주겠다는 약속.
바로 그때였다.
딛고 있는 세계가, 일전했다.
어느덧 그곳은 작센 공작성의 일실이 아니라,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였다.
푸드덕!
흑색공의 등 뒤에서,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저물녘 어스름이 쏟아지고 있는 대지 위였다.
──고위 마법사가 가진 ‘사상의 세계’는 꼭 하나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필요에 따라 형태와 목적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니까.
“마도서를 꺼내라.”
바로 그 저녁노을의 땅거미 속에서,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촉수를 의식했다.
“슈브.”
─ 응.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어느덧 데일의 곁에 나타나 있었다.
칠흑의 드레스 자락 밑으로, 헤아릴 수 없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그러나 흑색공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이계의 흉물이었다. 수천 마리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촉수들의 군체로 이루어져 있는 마물.
그러나 그 모습조차 이 세계에 투영하고 있는 극히 일부의 조각에 불과하리라.
“Iä Shub-Niggurath(이아 슈브 니구라스).”
흑색공이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옛 어둠의 어머니시여.”
마치 그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덤덤하게.
─ 아아, 작센의 어린아이가 왔구나.
그리고 슈브가 대답했다. 여느 때처럼 천진하게 웃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
성숙하고 기품에 차 있는 미모의 여성이, 그곳에 있었다. 흑색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산양의 뿔이 우뚝 솟아서. 칠흑의 드레스 자락을 흩날리며, 기품 있는 레이디처럼 미소 짓는다.
“죽음(Death)이시여.”
그와 동시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
일대의 어스름이 스러졌다. 밤의 어둠이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이 깊고 불길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흑색공의 마도서──『심장의 저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장 차림의 사내였다.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신사를 보는 듯한 사내. 중절모를 쓰고, 검정 일색의 정장을 입고 있는 노신사.
손에는 해골 모양을 장식한 지팡이를 쥐고 있다.
그러나 얼굴이 무척이나 흐릿해서, 그 모습을 기억할 수가 없다. 아무리 보고 봐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푸드덕!
다시금 그의 등 뒤로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죽음.’
─ 나를 너무 이르게 불렀구나, 아가야.
흑색 정장의 노신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흑색공이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바라지 않고, 그러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위대한 불청객이시여.”
숙이고 나서, 그대로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일과 그의 뒤에 있는 이계의 흉물을 향해.
“마도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흑색공이 되물었다.
“마법사의 사상(思想)을 투영하고 있는 그릇이 아닙니까.”
“그럼 사상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경험하며 쌓아 올린 의식의 체계적 집합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그럼 우리 뒤에 있는 이 존재들께서는.”
흑색공이 되물었다.
“그저 우리가 경험하며 쌓아 올린 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냐?”
“…….”
데일은 일순 ‘죽음’이라 불린 정장 차림의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죽음.
비로소 흑색공의 비밀이 조금이나마 풀린 느낌이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여느 때의 천진하고 어린 소녀가 되어서, 생긋 미소 짓는 슈브가 있었다.
데일이 고개를 젓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존재들은 결코 일개 마법사의 사상으로 자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대학살의 서』 같은 ‘일개 마도서’ 따위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사상의 종착점.
“사상의 끝에 이르러, 인류의 의식은 하나의 원점(原點)에 도달한다.”
사상의 끝, 다시 말해서 의식이 도달할 수 있는 종착점.
집합 무의식.
무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공통적 심상.
일말의 접점조차 없는 국가나 대륙, 심지어 세계와 세계 사이에서도,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신화나 전설 등의 형태로 ‘비슷하게 창조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령 신이라거나, 악마, 모신(母神), 영웅, 괴수, 구세주, 죽음…….
역사가 시작하기도 전의 고대부터 이어지는 아키타입(태고유형).
“나아가 마도의 극의를 추구하며, 바로 그 고대의 심상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자들이 있었지.”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고대의 심상’이 두 사람의 등 뒤에 있었다.
일찍이 불사공 프레데릭이 그러했고, 흑색공이 손에 넣은 사상의 종착점.
죽음, 그리고 옛 어둠의 어머니.
“그럼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그 심상은 ‘어디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느냐?”
흑색공이 되물었고, 비로소 데일이 숨을 삼켰다.
“진리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바깥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어째서 이 세계가 지구와 비슷한 종교와 사상을 갖고, 지구와 비슷한 역사를 거듭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생물이 세계와 세계를 넘어 공유하고 있는 집합 무의식, 그 너머에 있는 진리의 세계.
마법사들이 끌어내는 것은 바로 그 세계의 힘이었고, 두 사람의 등 뒤를 지키는 것은 바로 그 세계의 존재들이었다.
“너에게는 이 고대의 존재들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또다시, 몇 차례고 그의 아버지는 데일에게 같은 경고를 했다. 그리고 그 경고를 들을 때마다 데일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 심장에, 4서클의 편린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마침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네요.”
지금의 데일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확실한 마법사의 수행.
“슈브의 힘을, 지금 이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들의 교육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흑색공이, 그의 곁을 지키는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말했다.
─ 참으로 무례하며 당돌하구나, 아가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신사를 보는 것 같은 정장 차림의 남자.
‘죽음’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 그러나 이 아이의 모습이 썩 나쁘지 않구나.
흡족하다는 듯이.
─ 마침 나의 ‘옛 벗’이 있기도 하고.
푸드덕!
그와 동시에, 죽음의 등 뒤에서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 그러나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가야.
‘죽음’이 말했다.
─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