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 *
슈브의 촉수가, 오렐리아의 귀와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외이도(外耳道)를 거쳐, 고막에서 청신경을 가로질러, 청각피질이 있는 곳으로.
성처녀 오렐리아의 두개골 속, 뇌를 향해서.
* * *
오렐리아는 십자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핏빛의 강 속에서 그대로 고개를 내린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겁습니까?”
“알량한 환술(幻術)은 통하지 않습니다.”
데일의 물음에, 오렐리아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푸드덕!
몇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세히 보십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바로 그때였다. 핏빛의 강 위로, 그녀의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적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금빛으로 빛나야 할 갑주가 핏빛으로 물들어서, 황홀하다는 듯이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는 ‘전쟁의 처녀’가.
핏빛 성처녀.
“발키리는 무척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을 가졌다고 하지요.”
데일이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를 빼앗은 제국이 증오스럽지 않습니까?”
“어떻게……!”
“여신의 계시가 내려졌을 때, 비로소 제국에 복수할 수 있게 되어 기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내 의지가…….”
“이 피의 강은, 당신이 쓰러뜨린 적들의 혈해(血海)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리고 그 핏빛의 강을 쌓아 올린 결과가, 바로 이것이지요.”
──제국의 탕녀다!
──처음부터 이깟 왕국이나 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어!
──그 사기꾼 계집이……!
오렐리아를 향하는 매도가 울려 퍼졌다.
성처녀로서, 구국의 기수로서, 그녀가 쌓아 올린 전부를 부정하는 손가락질.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까?”
“…….”
“왕국 전역이 불타고, 왕이 백성들을 고기 방패 삼아 추하게 도망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피가 흘렀지요.”
데일이 말했다.
“모두 오렐리아 님이 자초한 지옥입니다.”
“……!”
“여신의 계시가, 오렐리아 님의 광신(狂信)과 맹목이, 이 섬을 파멸로 몰아넣었지요.”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브리타니아 섬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제국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학살의 축제.
“아, 아아…….”
오렐리아가 힘없이 숨을 삼켰다. 하늘의 꼭두각시를 자처한 자의 말로.
“이것이 정녕 자애와 자비를 사랑하는 시스티나 자매신의 뜻입니까?”
데일이 물었다.
“여신의 계시가 이 섬의 파멸을 자초했고, 오렐리아 님께서는 기꺼이 대학살의 기수(旗手)가 되었지요.”
오렐리아의 전부를 부정하듯이.
“오렐리아 님이 그 돼지의 밑에 깔렸을 때,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었습니까?”
“…….”
“어째서 자애와 자비를 사랑하는 자매신께서는, 이 지옥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시는 겁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참으로 잔혹한 여신이네요.”
오렐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데일이 대답했다.
“제가, 당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오렐리아를 향해 자신의 팔을 내밀며.
“당신의 행위가, 의미 없는 살육에서 그치지 않도록.”
“……!”
“제가 당신의 신(神)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절망하며 흐느끼고 있는 오렐리아가, 데일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와 함께, 제국을 무너뜨리죠.”
찰나의 망설임이 있었다. 망설임 끝에, 오렐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 알량한 세뇌는 통하지 않습니다.”
“……!”
방금까지의 동요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덤덤하게. 오히려 놀란 듯 숨을 삼키는 것은 데일 쪽이었다.
“공자님께서는 저에게 생각하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핏빛의 강 속에서, 성처녀 오렐리아가 말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의지입니다.”
오렐리아의 의지.
“제 몸에, 당신의 실을 감아주세요.”
“…….”
“저는 제 그림자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오렐리아가 말했다. 그야말로 성처녀의 이름에 걸맞은 고결함과 의지를 갖고서.
“제 의지로, 당신을 섬기게 해주세요.”
오렐리아가 무릎을 꿇었다. 핏빛의 강 속에서, 그녀의 턱밑까지 핏물이 차올랐다.
“그림자 속에서, 당신을 위해 휘둘러지는 검이 될 수 있도록.”
그대로, 손에 쥐고 있는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기사의 맹세.
“부디 제 의지로, 당신의 꼭두각시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십니까?”
“제국의 파멸.”
오렐리아가 대답했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또다시, 하나의 왕국이 몰락했다.
전쟁은 끝이 났다.
5할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성검사의 아들이 사로잡혀 막대한 군수물자를 바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바로 그 ‘검은 공자’의 지휘 아래, 왕도 랭스는 제국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승리였다.
공식적으로 샤를 7세는 제국의 역적으로 처형되어, 그 목이 광장에 내걸렸다.
아울러 ‘성처녀 오렐리아’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한 자리가 열렸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부르고뉴의 제국군 수뇌부가 집결해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戰後)의 처우를 비롯해 섬에서의 일을 처리하기 위한 회담.
다행스럽게도 성처녀의 죽음을 바라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우생의 집착으로 일그러진 성검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오렐리아가 주장하는 성성(聖性)은, 시스티나 여신교를 향하는 모독입니다.”
돼지처럼 추악한 욕망을 감추지 않고 성검사가 말했다.
“부디, 저에게 그녀의 어리석음에 대해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평소 같은 손가락질이나 하대조차 없이, 흡사 상관을 대하는 공손함을 담아. 제국군 승리의 주역이자, 기아스를 통해 맺어진 주종의 대상.
“그녀를 범해서 애라도 낳을 생각입니까?”
“그녀의 처녀성을 빼앗는 것 이상으로 ‘성처녀의 성성’을 부정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을 테니까요.”
“흠, 그렇습니까.”
데일이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니콜라이 추기경께서도 동의하십니까?”
“교, 교회법에 따라…… 여신의 계시를 받은 ‘성처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거짓 계시의 증거이지요.”
시스티나 여신교의 추기경, 니콜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리에 입각했을 때, 자매신께서 ‘여자’를 종으로 택하심에 있어 순결은 필수적 요소입니다.”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그 말대로입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성검사가 소리를 높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성성을 부정하는 자로서, 성검(聖劍)을 가진 저 이상으로 적법한 자는 없을 겁니다.”
필사적으로 성처녀를 손에 넣기 위한 몸부림.
“후후, 그 작은 쟁기로 어떻게 순결을 빼앗겠다는 걸지.”
레이디 스칼렛이 남의 일처럼 조소를 흘렸다.
“오히려 성처녀의 순결을 필사적으로 지켜줄 셈이 아니신가요?”
“그 말대로입니다.”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나 조롱이 아니었다.
“성처녀의 성성을 부정할 수 있는 적격자로서…….”
더없이 진지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저 역시 브란덴부르크 백작님의 ‘크기’에 대해서는 심히 우려를 감출 수 없네요.”
“참으로 동감이에요.”
종교 교리를 진지하게 해석하려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시스티나 여신교가 갖는 무게는 가볍게 볼 것이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교회부터 시작해서, 구국의 기수를 자처하며 독립군을 규합한 성처녀조차 자매신의 이름을 내걸고 있었으니까.
“제가 하지요.”
그렇기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성처녀를 저희 작센 가의 포로로 받아, 그녀의 성성(聖性)을 부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어머나.”
레이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남자의 진가는 겉모습으로 평가할 수 없다더니.”
성검사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과 치욕, 나아가 이대로 성처녀를 뺏길 수 없다는 초조함이 더해져서.
“감히, 감히……!”
일순, 그조차 통제할 수 없는 오러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성검사의 얼굴이, 축생(畜生)의 그것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잊으셨습니까?”
그러나 데일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전쟁의 작전 과정 일체, 나아가 ‘포로의 처우’ 일체에 대한 기아스를.”
“하, 하하하……!”
성검사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네 말대로다.”
웃고 나서 성검사가 말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이 났지.”
더 이상 기아스의 속박을 받을 필요는 없다.
“당장 나에게 성처녀를 넘겨라, 작센의 어린 장남이여.”
그리고 이곳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적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네놈이 작센의 장남이라 할지라도 무사히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돼지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레이디 스칼렛은 싸늘하게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아, 그러십니까.”
그러나 성검사의 겁박 앞에서 데일의 표정은 무척이나 덤덤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셨습니까?”
그저, 품속에서 무엇을 꺼내 들 따름이다.
두 장의 문서였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제국군의 최고 책임자’로서 데일의 서명이 적혀 있는 문서였고, 또 하나에는 브리타니아 왕국의 국왕 ‘샤를 7세’의 옥쇄가 찍혀 있는 문서였다.
“이것은 우리 제국과 브리타니아 왕국 사이에 체결한 ‘무기한의 휴전 협정서’이지요.”
무기한의 휴전 협정서.
“……!”
축생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지금 제국군이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는 승리와는 별개로, 법적으로 이 문서를 파기할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신명의 맹약 앞에서 이르되──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닙니다.”
데일이 조소를 흘렸다. 축생의 얼굴을 가진 돼지의 왕이, 그조차 거스를 수 없는 신명의 맹약 앞에서 소리쳤다.
“감히 그깟 헛수작을……!”
“허, 헛수작이 아닙니다.”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는 것은, 니콜라이 추기경이었다. 백색 마탑의 장로이자, 시스티나 여신교의 추기경. 동시에 절대복종의 기아스가 새겨져 있는 데일의 꼭두각시.
“기, 기아스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교회법에 따라…… 데, 데일 공자님의 말이 옳습니다.”
“네놈이 감히 지금 제국을 배신하려는 것이냐!”
그 행위가 가진 무게를 모르지 않기에.
“아,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데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이 문서는 제가 작센 가의 공작성에 ‘무사히’ 들어가는 즉시 파기될 겁니다.”
“……!”
“문서의 파기는 니콜라이 추기경의 입회하에 시행될 것이며, 기아스의 파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데일이 말했다.
“성처녀의 성성(聖性)을 부정하는 작업 역시, 니콜라이 추기경의 입회하에 이루어질 것이니──.”
“……!”
시스티나 여신교의 추기경이 갖는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다.
그날, 지옥의 도서관에서 ‘절대복종의 맹약’을 새겨넣은 데일의 꼭두각시. 여차할 때를 위해 들어놓은 보험이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성검사께서는 너무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깨달았을 때, 성검사는 이미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거미줄은 힘이나 무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 * *
“데일 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
“브리타니아 섬의 전쟁 영웅께서 돌아오셨다!”
‘검은 공자’의 존재와 그 명성을 수식하는 새로운 별명과 함께.
“니콜라이 추기경께서는…….”
바로 그 제국의 전쟁 영웅이, 공작성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제국과 성검사에게 그대로 전하십시오.”
그의 앞에 있는 남자에게.
“샤를 7세와 맺은 ‘무기한의 휴전 협정’은 파기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에 들린 두 장의 문서를 보란 듯이 펼치며.
“아울러 성처녀의 성성(聖性)은 부정되었고, 작센 공작성에서 ‘적법한 재판 끝에’ 그녀의 화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하, 하오나 아직!”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요?”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기경 예하의 심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
그 말에 니콜라이 추기경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에 갇혀 있는 것은 성검사 하나가 아니었다.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 속에서, 니콜라이 추기경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 * *
브리타니아 섬의 독립은 실패로 돌아갔다.
성처녀 역시 그녀의 순결을 잃음으로써 성성을 부정당하고, 적법한 재판 끝에 마녀의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작센의 동토에서, 몇 줌의 잿더미가 되어버린 구국의 기수.
이상이, 시스티나 여신교의 추기경…… 니콜라이가 전하는 성처녀의 마지막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