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81화 (81/301)

81화

* * *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가 불타고 있었다.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7서클의 적마법사 ‘레이디 스칼렛’을 필두로 핏빛 제복을 차려입은 적마법사들이.

퓨리파이어, 적색 마탑이 자랑하는 엘리트 전투 마법사.

그들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자랑스러운 핏빛 제복을 휘날리며 적색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재가 되어라.”

“재가 되어라.”

핏빛 제복의 마법사들이 하나의 심상을 공유하며, 합동 영창을 시작했다. 직후 이 세상을 불태우기 위한 불꽃이 강림했다.

헬파이어(Hellfire).

통일 전쟁의 기수이자, 전쟁의 신. 제국의 집행자들.

그것이 바로 적색 마탑의 적마법사들이었고, 하늘에서 지옥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흡사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종말을 막아줄 수 있는 7서클의 백마법사, 토마스 대주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 *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결사의 의지를 불태우며 브리타니아 왕국군과 백성들이 최후의 하나까지 저항했고,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도시의 성벽이 함락되고, 제국의 군세가 끝없이 쏟아졌다.

비록 브리타니아 왕국의 강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나, 그들을 규합하는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성처녀와 대주교가 사라진 이상…….

레이디 스칼렛, 성검사,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제국의 강자들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또다시 이 풍경이다.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 수라장 속에서 군율(軍律)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빼앗고 범하고 불태우고, 지옥의 풍경이 그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 왕도 랭스의 백성들이여! 나, 샤를 7세의 이름으로 그대들에게 고하노니!

저 멀리 왕성(王城)에서, 마법으로 증폭한 샤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짐을 비롯한 우리 브리타니아 왕국은 최후의 하나까지 용맹하게 싸우다 스러질 것이다!

부러지되 굴하지 않겠다는 듯 결의에 차 있는 의지였다.

“샤를 전하…….”

그 목소리에, 오렐리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미 이 이상의 전투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믿음직하지 못한 샤를이, 저렇게 필사적으로 왕국을 위해 소리치고 있다니.

이 지옥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불사하며 왕도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니.

“저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일순이나마 미혹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조금 더 그녀의 왕을 믿었어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제국을 향해 그토록 증오심을 불태우는 그가, 역설적으로 제국의 야망을 집행하는 기수가 되어서.

“성처녀님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 * *

그 직후.

수도 랭스를 포위하고 있는 제국군 진지.

불타고 있는 도시를 뒤로하고 데일은 그곳에 있었다.

제국군의 ‘최고 지휘관’을 위해 준비한 대형 막사에서, 흡사 옥좌에 앉아 전황을 지켜보는 왕처럼.

“명령대로 샤를 7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부하 병사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를 이리로 데려와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머지않아 남자 하나가 데일의 앞으로 이끌려 왔다. 왕의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추레한 행색의 남자였다.

“아, 샤를 전하.”

데일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샤를 7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 네, 네놈이 감히……! 나를 속이다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병사들의 포박 속에서 몸부림치는 샤를을 뒤로하고, 데일이 조소했다.

“──평화를 바라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 세상에서 제국이 약속하는 평화처럼 못 믿을 것도 없는 법이지요.”

“……!”

“그러고 보니, 행색이 참으로 누추하시네요.”

누더기를 걸쳐 입고, 자랑스러운 황금 왕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모습.

“마차에 대량의 사치품을 싣고, 공성의 소요를 틈타 도망치려는 것을 병사들이 생포했습니다.”

뒤이어 부하 병사가 보고를 올렸다.

“아, 그러십니까?”

그 말을 듣고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럼 왕도에서 울려 퍼지는 결사 항전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도망치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제 안위 하나를 지키기 위해 수도의 백성 전부를 팔아넘겼군요.”

“그,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일국의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할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일이 물었다.

“하!”

샤를 7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깟 왕국이니 왕국의 백성이니, 내가 알 게 무엇이란 말이냐!”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

“처음부터 이깟 왕국이나 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어!”

샤를 7세가 소리를 높였다.

“그 사기꾼 계집이 여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멋대로 나를 왕좌에 앉혔을 따름이지!”

“그러신 것치고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제법 필사적이지 않으셨나요.”

“이 나라가, 이 나라가 내 것이 될 수 있었으니까!”

왕의 자리를 뺏길 것이 두려워, 데일의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샤를의 의심암귀가 성처녀와 대주교를 사지로 내몰았다.

“나 샤를이, 이 브리타니아 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셨습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그 정도로, 샤를 전하에게 브리타니아 왕국과 왕국의 백성들은 무가치한 것이었습니까?”

“여신의 계시니 어쩌니, 빌어먹을 창녀가 그깟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어도……!”

샤를 7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깟 왕이나 왕국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뭐, 그러십니까.”

그 말에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말을 잇는다.

“──그렇다고 하네요.”

“……!”

막사 뒤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그림자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아아……!”

그 모습을 보고 일순 샤를 7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사기꾼, 배신자, 마녀, 제국의 창녀.

성처녀 오렐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침묵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정적 속에서, 오렐리아가 입을 열었다.

“여신의 계시를 받고 갈등하는 저에게, 왕국을 위해 싸울 것을 종용하신 것도.”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제국의 폭정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구국의 맹세를 올리신 것도…….”

“아, 아니, 오, 오해일세!”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성처녀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그제야 샤를이 당혹과 함께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찌하여 도망치셨습니까?”

성처녀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자신의 백성들을, 왕국의 백성들을 제국군의 방패로 삼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찌하여 홀로 추하게 살아남으셨습니까?”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서, 성처녀여! 부, 부디 나의 부덕함을 용서해주게!”

샤를이 애걸하기 시작했다.

“여신의 이름에 맹세코 나의 죄를 고해하고 뉘우치겠네! 부디, 부디 이렇게 빌 터이니!”

데일이, 말없이 허리춤의 스틸레토를 뽑았다. 그대로 칼자루를 빙글 돌려, 성처녀 오렐리아의 손에 넘겨주었다.

“제, 제발 살려주게나……!”

고위 백마법사들의 구속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성처녀가, 스틸레토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스틸레토의 서슬 퍼런 검신이, 어느덧 희미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쨍그랑!

그녀를 억제해야 할 백마법사들의 속박 마법이, 덧없이 부서져 흩날린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금빛이 오렐리아의 검과 갑주를 따라 휘감기기 시작했다. 검과 갑주, 그리고 육체에 그녀의 ‘사상(思想)’을 투영함으로써.

금빛이 일렁였고, 칠흑의 어둠이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일찍이 구국의 기수를 자처했으며, 바로 그 왕국과 왕에게 버림받은 성처녀의 아바타.

흑금(黑金)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발키리가, 그곳에 있었다.

칠흑처럼 검고, 찬란하게 빛나는 흑색 황금.

동시에 데일의 세계가 일대를 휘감았다. 그곳은 어느덧 랭스를 포위하고 있는 제국군의 막사가 아니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 오직 ‘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결계.

어두운 겨울밤의 새하얀 밑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샤를 7세가 있었다. 흑금의 발키리 역시 그곳에 있었다.

“제, 제발 나를 용서해 주게나…….”

그 말에, 오렐리아가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의지로 생각하는 겁니다.”

데일이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자신이 바라는 것, 자신이 갈구하는 욕망.”

하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비록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

“그것이 곧 우리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데일이 말했고, 오렐리아가 스틸레토의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흑금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전쟁의 처녀. 바로 그 발키리가 걸음을 옮겼다. 무릎 꿇고 비참하게 목숨을 애걸하는 샤를 7세를 향해서.

“제, 제발, 이렇게 빌겠네! 여신의 자비와 자애로 나를……!”

“당신을 증오합니다.”

오렐리아가 대답했다.

“당신이 증오스럽고, 제국이 증오스럽습니다.”

스틸레토의 칼날이 내리꽂혔다.

푹!

검사의 절제된 일격이 아니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칼을 내리꽂듯이, 샤를 7세의 배에 스틸레토의 칼날이 내리꽂혔다.

푹!

“컥, 커헉……!”

칼날이 뽑혔고, 피가 튀었고, 다시 칼날이 내리꽂혔다.

푹! 푹! 푹!

창자가 쏟아지고, 피가 쏟아지고, 그러나 성처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흑금의 갑주 위로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쓰고, 핏빛 성처녀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증오스러운 것은…….”

거리가 좁혀졌다. 어느덧 성처녀의 스틸레토가, 데일의 가슴팍 위로 닿아 있었다.

“제가 증오스럽겠지요.”

“두렵지 않습니까?”

“복수란 것은 식혀서 먹을수록 맛있는 음식과 같지요.”

“…….”

“저 역시 제국을 증오합니다.”

데일이 말을 잇는다.

“이 나라가 증오스럽고 증오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지요.”

황제, 핏빛공, 전생의 자신을 이 꼴로 몰아넣은 자들.

“그러나 제국이란 나라는 성처녀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나약하지 않습니다.”

“…….”

“슈브.”

그와 동시에, 데일이 『검은 산양의 서』를 불렀다.

─ 후후, 가엾어라.

“……!”

성처녀가 일순 숨을 삼켰다. 일찍이 데일이 보여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촉수들의 군체. 바로 그 흉물이, 촉수를 뻗어 데일을 휘감고 있었다.

촉수를 따라 콜타르처럼 검고 어두운 점액을 뚝뚝 떨어뜨리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하듯이.

그리고 그 촉수가, 동시에 오렐리아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촉수에 휘감겨 있는 데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귀여운 아이니까요.”

“……!”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십시오.”

성자를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설령 그것이 아무리 어둡고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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