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 *
─ ……(중략) 여신의 나라가 브리타니아 섬에 우뚝 설 날이 머지않았다네.
그것은 백색 마탑의 장로이자 니콜라이 추기경의 친필이 맞았다. 비록 샤를 7세를 속이기 위한 데일의 그럴싸한 거짓에 불과했으나.
처음부터 백색 마탑과 성처녀의 협력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설령 샤를이 밀서의 내용을 믿지 못할 경우, 데일은 어쩔 수 없이 니콜라이의 목을 ‘배신자의 증거’로 내놓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백색 마탑의 장로이자 추기경의 목을 치는 것은, 보통 명분으로 될 일이 아니다. 가령 제국을 배신하고 제국의 적과 내통했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고서야.
‘다행히 보험을 깨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의 처지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결과이리라.
니콜라이 추기경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절대복종의 기아스. 시스티나 여신교의 심장에 심어놓은 데일의 꼭두각시. 여기서 버림패로 쓰기에는 그 가치가 너무 크다.
그에게는 아직 살아서 해주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 * *
“……휴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샤를의 말에, 성처녀 오렐리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국은 브리타니아 왕국을 무너뜨릴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미 그들 역시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 않았나.”
샤를 7세가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미 너무 많은 왕국의 아들들이 피를 흘렸다네.”
“…….”
“우리의 시스티나 자매신께서는 우리에게 그토록 자애와 자비를 강조하시거늘…….”
전쟁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우리는 어찌하여 여신의 의지를 거스르고 이토록 잔혹한 살육을 거듭하나!”
“제국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평화를 바라고 있지 않나.”
평화.
“제국군의 최고 책임자는 ‘무기한의 휴전 협정’을 제시하고, 몇 주 내에 부대를 철수시킬 거란 약속을 했다네.”
“제국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짐은 그저 평화를 바라는 것일세.”
“평화라니…….”
성처녀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공식적으로 우리 왕국은 제국의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고, 이 이상의 전쟁은 없을 걸세.”
그러나 샤를이 그대로 말을 가로막았다. 일말의 이의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전쟁은 끝나고, 이제는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네.”
샤를 7세가 평화에 대해 갖는 신념은 무척이나 확고했다.
아무 생각 없이 향락과 사치에 젖어, 줄곧 창부들의 가슴에 고개를 처박고 포도주를 음미하는 것.
바로 그 평화를 손에 넣기 위해서, 지긋지긋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제국군이 몇 주가량의 철수 준비에 착수하는 사이.
일부 병사들이 부대를 탈영해, 브리타니아 왕국령 각지에서 약탈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왕국령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는 제국군 탈영병들. 무법자들의 부대.
왕국 역시 소수의 기동타격대를 투입해, 도적 무리를 급파하는 기동전으로 맞섰다. 그리고 성처녀 오렐리아는 바로 그 기동타격대의 기수를 자처하며, 왕국의 평화를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로부터 몇 주 후. 20,000명이 못 되는 숫자의 제국군이 항구도시 도버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샤를 7세가 말했듯이, 평화의 시대가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아울러 왕국령 내 제국군 잔당의 뿌리를 뽑기 위해, 성처녀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급파(急派)를 거듭했다.
* * *
다시 몇 주 후.
제국군 탈영병 무리가 루아르강의 거점 도시 중 하나, 오를레앙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즉시 성처녀는 다시금 소수의 휘하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출정에 나섰다.
그리고 성처녀 오렐리아가 왕도 랭스를 벗어나자마자, 샤를 7세의 이름으로, 토마스 베켓 대주교가 체포되었다.
역모(逆謀)의 혐의로.
일찍이 작센의 데일이 샤를에게 넘겨준 ‘백색 마탑의 밀서’를 증거 삼아.
* * *
그 직후.
오를레앙시(市)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제국의 탈영병 무리를 섬멸하고, 승리를 손에 넣은 성처녀 오렐리아가 휘하 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의 도개교 너머로 들어섰을 때.
“…….”
오렐리아는 일순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숨을 삼켰다. 도시 일대를 휘감고 있는 적막. 흡사 죽은 자들의 도시를 거니는 것 같은 불길한 침묵.
“오셨습니까.”
그리고 적막 속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지금쯤 브리타니아 섬을 떠나 제국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어야 할 제국군 총사령관이, 그곳에 있었다.
“……데일 공자님.”
그날, 전력을 다하는 성처녀에 맞서 무승부를 손에 넣은 바로 그 ‘검은 공자’였다.
등 뒤로 무수한 제국의 강자들을 거느리고서.
대륙 칠검(七劍)의 일좌…… 성검사와 성 막달레나 기사들.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7서클의 적마법사 ‘레이디 스칼렛’과 퓨리파이어 부대.
백색 마탑의 니콜라이 추기경을 필두로 하는 백마법사들까지.
하나의 ‘규격 외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그곳에 모여 있는 제국군 최고 전력.
“샤를 전하께서 오렐리아 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데일의 말에, 성처녀 오렐리아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아울러 지금쯤 왕도 랭스에서는, 토마스 대주교에게 역적의 혐의가 씌워졌을 겁니다.”
“……!”
토마스 대주교. 일찍이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이자, 7서클의 백마법사. 그 말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피 같은 왕국의 최고 강자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줄이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씁쓸하게 미소 짓는 성처녀를 향해, 데일이 입을 열었다.
“오렐리아 님께서는 생각하셔야 했습니다.”
브리타니아 왕국을 구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그 남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신 것은, 결국 브리타니아 왕국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았으니까요.”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이것이 정녕 여신께서 바라신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의 꼭두각시를 자처한 자의 말로. 성처녀 오렐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씁쓸하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 * *
이름 없는 병사의 검이 부러졌다.
* * *
“크흐, 크흐흐흐……!”
남자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돼지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갑주 밑으로 비대하게 부풀어 있는 살덩어리가,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육중하다.
사람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돼지. 구역질이 날 것처럼 추악한 축생(畜生) 그 자체.
그러나 그의 손에서 ‘순백의 이채’를 내뿜고 있는 검은 그렇지 않았다. 초대 백색 마탑주가 벼린 대륙 최강의 아티팩트 중 하나.
‘성검 뒤랑달’이다.
다시 말해 돼지머리에 갑주를 두르고 있는 저 남자는, 제국이 자랑하는 전쟁 영웅……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아바타’였다.
검에 자신의 사상을 투영하는 기사의 극의. 사상의 갑주. 그리고 그의 사상을 검과 갑주, 그리고 육체에 덧씌운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다.
성검사의 실체. 우생의 욕망으로 일그러져 사람의 길을 포기한 짐승. 사람들은 그 모습을 두고, 조롱과 경외를 담아 《돼지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그 돼지의 왕이, 성처녀 앞에 서 있었다.
갑주의 하복부에 있는 강판을, 우그러질 정도로 팽창시키며. 사람으로 응당 가져야 할 도리를 포기하고, 그저 욕망에 충실한 돼지가 되어서.
콰직, 콰직!
그리고 점차 비대하게 부풀기 시작하는 욕망을 버티지 못하고, 갑주가 터져나갔다. 갑주 밑으로 육중한 핑크빛 살덩어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
너무나도 추하고 추해서, 이 세상의 온갖 추악함을 응집한 것 같은 그로테스크의 결정체.
돼지의 왕.
몸에서 돼지기름이 육수처럼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돼지의 왕, 성검사가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는 성처녀를 향해 쇄도했다.
여섯 장의 날개가 빛을 증폭하며 소멸의 기둥을 내리꽂았고, 집속 포격 속에서 포화가 휘몰아쳤다.
일대의 도시가 산산이 부서질 정도의 압도적 소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머리의 성검사는 그곳에 있었다.
“……!”
육중한 살덩어리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다.
‘규격 외의 강자’는 성처녀 오렐리아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힘을 몇 배 가까이 증폭해줄 수 있는 7서클의 백마법사…… 토마스 대주교는 이곳에 없다.
적백(赤白)의 고위 마법사들이 성검사를 보조하는 상황에서, 승산 같은 것은 의미가 없으리라.
욕망의 이끌림에 따라, 돼지의 왕이 땅을 박찼다. 육체의 중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 중량에 가속을 더하며 성검사의 일검이 내리꽂혔다.
아바타의 격돌.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일방적이었다.
돼지의 검이, 천사의 검을 압도하고 있었다.
중량과 속도를 겸비하고 있는, 그러나 고결함의 티끌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돼지의 성검이.
“크흐, 크흐흐흐흐!”
휘둘러지는 일검에 빛의 날개가 찢어졌다. 날개가 찢어지고, 갑주가 부서지고, 성처녀의 고결한 육체가 찢어져 피가 흩뿌려졌다.
천사를 범하고 있는 돼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광경.
추함과 별개로 돼지머리의 성검사가 갖는 무위(武威)는 결코 우습게 볼 그것이 아니었다. 대륙 칠검의 이름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컥, 커헉……!”
성검사가 그대로 팔을 뻗었다. 돼지의 손이 성처녀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너는 좋은 암컷이 될 것 같구나.”
돼지가 입을 열었다.
“커헉, 케흑……!”
질식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는 천사를 향해 《돼지의 왕》이 말했다.
“내 아이를 낳아라, 암컷.”
우생의 욕망과 집착으로 일그러진 목소리였다.
“나의 아이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또 낳는 거다……!”
돼지가 광기 차 있는 웃음을 흘렸다.
“열 명, 아니, 백 명을 나을 때까지 쉴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돼지처럼 추악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부히, 부히히힛!”
성처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돼지의 육체가 깔아뭉갰다.
“……!”
압사당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성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부러진 검이, 그녀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일찍이 그녀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의 검.
이미 그녀에게 적과 맞설 기력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이상의 수치와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심장에 칼끝을 찔러 넣을 여력 정도는 남아 있으리라.
그렇기에 성처녀가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고 했다.
“멈추십시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일순, 오렐리아의 손이 정지했다. 그러나 돼지머리의 성검사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성처녀를 깔아뭉개고, 자신의 욕망을 쏟아내려 하고 있다.
“신명(神命)의 맹약 앞에서 이르되── 멈추라고 했습니다, 이 돼지 새끼야.”
그렇기에 데일이 말을 이었다.
기아스(구속의 맹약).
바로 그 맹약에 대고 호소하는 데일의 목소리가, 일대에 울려 퍼졌다.
그날, 전쟁의 향방을 놓고 데일과 성검사가 각자의 심장에 새겨넣은 맹약의 내용. 추후 벌어질 일체의 전투와 작전 과정에서, 데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
그와 동시에 성처녀를 깔아뭉개고 있는 돼지가,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찰나였다.
고개를 돌린 직후, 성검 뒤랑달의 칼끝이 데일의 가슴팍에 닿기까지.
“……!”
빨랐다. 데일조차 감히 그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신속(神速). 그러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이 빌어먹을 돼지 새끼가.”
데일이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성검의 칼자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기아스의 속박이 돼지의 심장을 움켜쥐는 것이다.
직후, 오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성검사의 아바타가 사라졌다.
전라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입고 있는 갑주와 옷이 모조리 찢어지고 터져버린 알몸의 남자가.
“어머.”
그 모습을 보고 레이디 스칼렛이 차갑게 비웃었다.
“농부의 쟁기가 그렇게 부실해서야, 작물이 제대로 자라날 리가.”
성검사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콤플렉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으며.
“나보다 작네.”
데일 역시,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