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 *
그 악명 높은 ‘검은 공자’에 맞서 가까스로 무승부를 얻어내고, 무혈(無血)로 랭스를 수복했다.
그것은 오롯이 성처녀 오렐리아의 활약이었으며, 데일 역시 성처녀 오렐리아의 이름으로 왕국의 수도를 넘겨주었다.
“성처녀께서 왕국의 수도를 수복하셨다!”
“와아아아!”
“자매신의 자비와 자애가 성처녀님과 함께하고 계신다!”
“여신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랭스의 사람들, 나아가 브리타니아 독립군 역시 성처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브리타니아 왕국의 적통 ‘샤를 7세’가 아니라, 성처녀 오렐리아와 시스티나 자매신의 이름을.
‘이, 이, 이것들이……!’
바로 그 사실이, 샤를 7세에게 있어서 어떻게 다가올까.
‘나다, 내가 바로 이 왕국의 왕이 될 자란 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브리타니아 왕가의 적통 샤를 7세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제국의 폭정에 맞서 브리타니아 독립군을 규합하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오롯이 성처녀 오렐리아였으며, 나아가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옛 왕국의 강자들이었으니까.
그저 성처녀 오렐리아가 자신을 왕으로 추대했고, 그렇기에 샤를 7세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다였다.
다시 말해서.
──성처녀가 샤를 7세가 왕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때는?
샤를 7세는 일순, 자신이 그저 ‘성처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춤추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여신의 기수에게, 샤를이 생각하는 흑심(黑心)이나 정치적 의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법이니까.
* * *
브리타니아 독립군이 그들의 수도를 손에 수복하고, 직후 7서클의 백마법사이자 대주교 ‘토마스 베켓’에 의해 왕의 대관(戴冠)이 이루어졌다.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발라줌으로써, 공식적으로 브리타니아 왕국의 적법한 왕이 되었음을 알리는 자리.
제국의 적은 이제 일개 브리타니아 독립군이 아니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어느덧 ‘브리타니아 왕국군’이었고, 나아가 오러 마스터의 기사와 7서클 백마법사를 비롯한 왕국 강자들이 성처녀를 보좌하고 있다.
비로소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 브리타니아 섬에서, 제국의 마지막 영토를 몰아낼 때가.
* * *
브리타니아 섬의 제국령. 제국 총독이 다스리는 제국령 최후의 보루, 부르고뉴.
“이, 이, 이 어리석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패배자 놈……!”
제국에 있어 끝없이 쏟아지는 비보를 뒤로하고, 필립이 데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감히 적에게 무혈로 랭스를 내주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마치 데일의 무능함을 질책하듯이.
“도무지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네놈의 어리석음에, 할 말조차 나오지 않는구나!”
“아, 그러십니까.”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일이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역시 네놈 따위가 이 전쟁을 이끌기에는 턱없이 부족…….”
침묵하는 데일을 보고, 필립이 기세를 타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이어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고, 불꽃이 피어났다. 필립의 입속에서.
“으으읍, 으으으읍!”
불꽃이, 필립의 혓바닥을 지지고 있었다.
“이 이상 헛소리를 지껄였다가는, 그 돼지 같은 혓바닥을 마저 태워드리지요.”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레이디 스칼렛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고통에 발악하고 있는 필립을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검은 공자, 레이디 스칼렛, 니콜라이 추기경, 부르고뉴 총독. 심지어 필립의 아버지,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조차.
수도 랭스를 넘겨주겠다는 데일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성검사의 생각 역시 필립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 랭스의 도개교에서, 바로 그 성처녀와 맞서 ‘검은 공자’가 무승부를 쟁취했다는 터무니없는 무용담과 함께…… 제국령 최후의 보루, 부르고뉴로 돌아오고 나서 데일이 보여주고 있는 태평함.
“약속드렸듯이, 저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겁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경우, 데일은 패전의 책임 일체와 더불어 자신의 심장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토록 태평하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로 이길 방법이 있다는 것이냐.”
“없는 것을 부술 수는 없으나…….”
성검사의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것은 그렇지 않지요.”
그 표정에 깃들어 있는 것은 확신이다. 마치 이 전쟁의 향방이, 자기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는 것처럼.
그 모습에,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그저 이 전쟁이 승리하고,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질 ‘검은 공자’의 위명을 떠올렸다.
망나니 필립이 제국군 5할을 말아먹는 역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수세에 몰린 제국군을 지휘해 ‘브리타니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승리를 손에 넣었을 때의 결말이.
그러나 달리 수가 없었다.
이미 성검사의 심장에는 이후 벌어질 일체의 작전 과정에서 데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나아가 전투에서 사로잡게 될 포로의 처우를 일임하는 ‘기아스’가 새겨져 있으니까.
* * *
상처 없는 전투는 없다. 그것은 설령 승리를 손에 넣은 독립군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열세의 병력으로 여기까지 승리를 손에 넣은 것 자체가 기적이리라.
아슬아슬하게 공세 종말점을 앞두고, 필립을 사로잡아 대량의 군수물자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경우, 공세 종말점을 맞이하고 독립군의 진격 역시 정지했을 것이다.
필립을 사로잡고 벨 포트를 함락한 것. 절대 무너지지 않을 불락의 요새를 함락한 것. 나아가 왕도 랭스까지 무혈로 수복한 것은, 그야말로 여신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전쟁을 움직이는 것은 금(金)이다.
그리고 그즈음, 브리타니아 왕국의 왕 ‘샤를 7세’는 무척 커다란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성처녀의 존재. 나아가 독립 전쟁을 위해 쏟아부은 샤를의 재정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성처녀의 계시 하나를 믿고,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수준의 투자가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이대로 부르고뉴의 제국령까지 진격해, 놈들을 왕국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처녀 오렐리아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신의 뜻에 따라, 브리타니아 섬에서 제국을 모조리 몰아낼 때까지. 일찍이 제국군이 상륙한 항구도시 도버를 손에 넣고, 섬 전체를 왕국의 영토로 칠할 때까지. 성처녀 오렐리아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사명의 수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샤를 7세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성처녀여, 이미 남아 있는 제국령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전쟁은 지긋지긋했다.
“이미 과도하게 거듭한 전투 탓에, 왕실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네.”
어디까지나 ‘왕의 사치를 위한 비용’을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였으나.
“……왕실의 국고를 탕진한 것은 전하의 사치 탓이 아닙니까.”
오렐리아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부디 전하께서 명령하신 ‘새 왕성의 축성’을 미루고, 그 자금을 군에 투입해 주십시오.”
성처녀 오렐리아가 그 사실을 지적했을 때, 샤를 7세를 사로잡는 감정은 하나였다.
두려움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왕성을 새로 축성하는 것은, 전하의 말씀대로 국고를 탕진하는 사치에 불과합니다.”
일개 농노의 딸이, 왕 앞에서 겁도 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다.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그리고 브리타니아 왕국의 모두가 그녀의 뜻에 찬동하고 있다.
“가, 감히…….”
일개 농노의 딸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왕이라니!
“왕 앞에서 참으로 무엄하기 그지없도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샤를이 노호했고, 성처녀가 고개를 숙이며 등을 돌렸다.
“일개 농노의 딸 주제에 감히, 감히…….”
멀어지는 성처녀의 등을 향해, 샤를 7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수치로 일그러진 목소리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데일이 뿌린 불화의 씨앗이 서서히 싹을 맺기 시작할 즈음.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 랭스에 제국의 특사가 찾아왔다.
제국군 총사령관, 작센의 데일이었다.
* * *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 왕성의 일실.
제국의 특사, 데일을 맞이하는 것은 성처녀 오렐리아가 아니었다. 브리타니아의 국왕 샤를 7세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이 전쟁의 ‘최고 책임자’끼리 이야기를 나누고자…… 데일이 직접 일대일의 대화를 제의한 것이다.
“우리 제국이 바라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테이블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흡사 자기가 제국의 의지를 대행하는 것처럼.
“평화라고?”
“이 이상 피를 흘릴 필요 없이, 합리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길이지요.”
데일이 말했다.
“이미 몇 차례의 대패 끝에, 우리 제국에는 이 이상 전투를 수행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 여신께서 우리 왕국을 돌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그렇겠지요.”
데일이 달리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제국이 브리타니아 왕국을 위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야말로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듯이.
“──따라서 저희 제국은, 샤를 국왕 전하에게 ‘무기한의 휴전 협정’을 제의하고 싶습니다.”
“무기한의 휴전 협정이라고?”
종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국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모양새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데일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웃었다.
“무, 무기한의 휴전 협정이라…….”
확실히, 데일의 말은 이치에 맞는 바가 있었다.
기한 없는 휴전의 형태로, 제국은 공식적으로 브리타니아 왕국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되. 동시에 휴전을 지속하고 있는 이상, 브리타니아 왕국의 입장에서도 사실상 독립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유지될 테니까.
샤를의 장고(長考)가 이어졌다.
“그, 그러나 하나 걸리는 것이 있네.”
장고 끝에, 샤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성처녀 오렐리아의 존재겠지요.”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성처녀 오렐리아. 사실상 망국의 병사들을 규합하고, 그 구심점이 되어 독립을 쟁취한 구국의 기수.
“그녀를 신뢰하십니까?”
“성처녀의 활약에는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사를 표하고 있다네.”
샤를 7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 왕국의 보물과 같지.”
대외적으로 성처녀의 존재가 갖는 무게감을 모르지 않기에, 어디까지나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샤를이 대답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샤를 전하께서 왕이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녀가 그것을 바란 까닭이지요.”
“……!”
마치 샤를의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보듯이.
“그럼 그녀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 때에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녀의 신심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네.”
샤를의 블러핑에도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도 바로 그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품속에서 무엇을 꺼내 들었다.
“성처녀의 신앙심은 그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비밀스럽게 밀봉을 마친 서신이었다.
“이, 이게 무엇이지?”
“토마스 대주교께서는 백색 마탑을 배신하고 기꺼이 ‘성처녀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하셨지요.”
데일이 말했다. 토마스 베켓 대주교. 7서클의 백마법사이자,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 자신의 조국 브리타니아를 위해 기꺼이 독립군이 되기를 자처한 자.
“제국군의 ‘니콜라이 추기경’께서…… 이 밀서를 토마스 대주교에게 넘기려다 적발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부디 읽어보시지요.”
데일이 밀서를 넘겼고, 샤를 7세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 ……(중략) 여신의 나라가 브리타니아 섬에 우뚝 설 날이 머지않았다네.
그리고 그 내용을 읽고 나서.
“아, 아아아…….”
“그렇습니다.”
비로소 샤를을 괴롭히는 의심암귀(疑心暗鬼)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성처녀의 최종 목적은 브리타니아 왕국의 독립이 아니라.”
“서, 설마.”
“백색 마탑의 암약 속에서, 여신의 나라…… 교국을 다시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샤를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퍼즐이 맞추어졌다.
“다시 말해, 토마스 대주교는 결코 백색 마탑을 배신하지 않았지요.”
백색 마탑의 고위 장로, 토마스 대주교가 성처녀의 기수를 자처한 까닭.
“애초에 백색 마탑이 제국에 충성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국군에 합류하고 있는 백색 마탑의 니콜라이 추기경이, 토마스 대주교와 내통하고 있다.
“브리타니아 독립군의 승리는 ‘여신의 승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제국군 내부의 배신자가 협력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데일이 말했다.
“따라서 성처녀가 이 나라에서 제국을 몰아내고, 그 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샤를 7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국 다음에 성처녀가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은, 바로 샤를 전하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 데일의 말대로였다. 성처녀가 보여준 기적 같은 승리는 절대 그녀의 손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여신의 나라…… 교국의 부활을 위한 백색 마탑의 암약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떠십니까, 샤를 전하.”
“…….”
“저희 제국이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입니다.”
그야말로 뱀의 그것처럼 교활하기 짝이 없는 속삭임.
“부디, 평화를 위해 양국이 함께 힘을 합치지 않겠습니까?”
암귀(暗鬼)에 사로잡혀 마음이 어두워진 샤를에게, 그것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