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77화 (77/301)

77화

* * *

심장을 휘감고 있는 칠흑의 촉수가, 『검은 산양의 서』가 발광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

데일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를 일으키며, 흑색 원천에서 비롯되는 흑색 마력을 게걸스레 집어삼키고, 그 힘을 바탕으로──.

─ 시스티나의 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시스티나의 개.

“……!”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를 담아 슈브가 ‘여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시스티나 자매신. 그저 이 세계의 사람들이 쌓아 올린 가공의 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고……?’

그랬어야 할 여신의 이름을 부르며, 슈브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다.

촤아아악!

그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칠흑의 촉수들이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데일 역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장에 터질 것처럼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심장과 서클을 뒤로하고, 오버클럭을 통해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다.

흑검의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여섯 장의 날개로 자신을 휘감고 있는 ‘성처녀’를 향해서.

금빛의 세라프.

성처녀 오렐리아의 아바타가 가진 진짜 모습.

마법사가 쌓아 올린 사상의 세계가 곧 그의 심상(心想) 그 자체를 나타내듯이, 지금 성처녀 오렐리아가 검과 갑주, 육체에 투영하고 있는 사상은 곧 그녀의 마음 그 자체였다.

여신의 집행자. 광신(狂信)의 사도.

‘위험하다.’

데일 역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데일이 처음으로 느끼는 ‘벽’이었다.

흑색공의 능력을 엿보았을 때와 다르다. 그는 데일의 아버지였고, 그를 넘어서는 것은 기약 없는 훗날의 미래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데일의 앞에 있는 저 성처녀의 존재. 아무리 ‘모의 결투’의 형식을 빌렸다고 해도, 찰나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강적이었다.

아니, 데일의 도발 앞에서 그녀가 내뿜고 있는 살기는 이미 모의 결투의 그것조차 아니었다.

‘이대로 항복하고 결투를 마쳐야 하나?’

데일이 일순 생각했다. 그의 ‘진짜 목적’은 결코 성처녀를 여기서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설령 승리가 최선의 결과라 할지라도, 패배했을 때의 차선(次善) 역시 준비되어 있다. 애초에 그쪽이 당초의 계획이기도 했고.

‘……아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데일의 가슴을 채우는 것은, 호승심이었다.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정해진 무대 위의 승부가 아니다. 저 앞에 있는 상대는 데일의 재능을 과시하고 증명하기 위한 희생양 따위가 아니다.

바로 그 ‘규격 외의 강자’를 상대로 자신의 전력을 맞부딪칠 기회.

지금, 데일이 서 있는 곳은 생사의 경계였다. 헛걸음 하나로 미끄러져서, 모두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외줄 위.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바로 그 외줄 위에서, 데일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악의를 감추지 않는 슈브를 뒤로하고. 공백의 지평을 가득 메우고 있는 ‘흑검의 데스나이트’를 거느린 채.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치며 성처녀가 쇄도했다. 데일 역시 그림자 망토의 음영을 따라 ‘어둠의 칼날’을 생성했다.

카앙!

일검(一劍)이 맞부딪쳤다.

오렐리아의 금빛 검과, 데일이 가진 어둠의 검. 열두 자루의 ‘그림자 칼날’을 일제히 움직여, 가까스로 비껴낼 수 있었다.

그것이 고작이었다. 검객으로서는 감히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찍이 데일의 검술 스승, 헬무트 경이 말했듯이…… 그저 일합(一合)을 받아치는 것으로 족했다.

기사에게 거리를 내어준 마법사가, 재정비를 갖추기까지.

그 직후, 사방에서 데스나이트의 흑검이 쇄도했다. 나아가 ‘슈브’와 섀도우 러커의 촉수 세례가 퍼부어져 데일을 엄호했다.

성처녀 역시 다음 공격을 넣을 여유가 없다. 그저 여섯 장의 날개를 이용해 제비처럼 빙글 몸을 돌리고, 거리를 벌린다. 물러서는 성처녀를 따라 끝없이 칠흑의 촉수들이 내리꽂혔다.

슈브의 치맛자락 밑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와 휘몰아치는 칠흑의 촉수들.

그때마다 심장을 짜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마력이 고갈되었고, 재차 그것을 감당할 정도의 마력을 생성하기 위해 세 개의 서클을 가속하고 또 가속했다.

고통 속에서 의식이 흐릿해진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검은 산양의 서』는 폭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가혹할 정도의 채찍질이었다.

데일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세 개의 서클, 그 너머의 영역으로 이끌어주기 위해.

4서클.

칠흑의 촉수가, 가속을 거듭하고 있는 세 개의 서클을 더욱 강하게 휘감았다.

데일이 가진 3서클은 결코 일개 3서클 마법사의 그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생성하는 ‘마력의 절대량’ 자체를 놓고 봤을 때, 6서클 마법사의 그것에 필적하리라.

그러나 그 정도로 고농도 마력을 대량 생성하고 있는 데일의 서클조차, 『검은 산양의 서』가 가진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 부족해, 부족해부족해부족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천하의 데일이 생성하는 마력의 양조차, 슈브의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리해서라도 ‘다음 경지’를 열어젖히려 하는 것이다.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

데일 역시 이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결말이었다.

4서클. 마법사에게 있어 ‘어엿한 한 사람의 경지 그 이상’의 영역. 바로 그 영역을 손에 넣을 때, 데일이 보게 될 마도의 비경(祕境)을 헤아렸다.

지금의 데일이 그러하듯, 그것은 결코 ‘보통의 4서클’이 갖는 경지에서 그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데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데일의 앞에 있는 두 개의 벽. 성처녀 오렐리아, 그리고 4서클의 벽을 넘기 위해서.

“《광휘의 특이점》.”

바로 그때였다. 오렐리아가 여섯 장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빛의 날개가, 흡사 태양처럼 그 빛을 증폭하기 시작했다. 데일의 세계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시린 냉기와 어둠마저 불사를 정도의 빛이.

흡사 어둑새벽을 밝히는 여명의 기수처럼.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빛의 의미를.

‘유도방출 전자기파에 의한 광증폭(光增幅).’

──레이저.

‘……!’

그 즉시, 데일이 재빨리 땅을 박차며 쇄도했다.

여섯 장의 날개에서, 사방으로 포격을 내리꽂듯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데스 레이(Death Ray). 집속 포격.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빛의 기둥이, 데일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용사의 무위를 가진 데일의 데스나이트조차, 일개 잡병처럼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 힘. 저 앞에서 지략이나 병법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

없다.

그녀를 향해 휘몰아치는 칠흑의 촉수조차, 촉수가 소멸하고 흩뿌려지는 흑혈(黑血)조차, 성처녀가 내뿜고 있는 빛의 세례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규격 외의 강자다.

개개의 힘으로 전장 그 자체를 뒤집을 정도의 압도적 파괴력. 이 세계의 사람들조차 허황하다 웃어넘길 ‘기사문학’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자.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생의 자신이 무수하게 쓰러뜨렸고, 또 쓰러뜨려야 할 강자들의 실체다.

‘아직 부족하다.’

그렇기에 지금의 경지로는 저 존재에 닿을 수 없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빛의 집속(集束)이, 무차별 포격을 내리꽂고 있다. 그야말로 검을 쥐고 공상과학 속의 무기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닿아야 했다.

필사적으로 ‘슈브’의 촉수가 소멸의 빛에 맞서, 데일을 지키기 위한 고기 방패를 자처하는 사이, 나아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데일의 서클이, 그대로 기능을 정지하기 전까지.

‘어떻게?’

레이저는 빛이고, 거울에는 빛을 되돌리는 성질이 있다.

빛의 굴절. 그러나 저 고출력 레이저를 일개 거울 따위가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으리라.

바로 그때, 일순 데일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LDAL.’

레이저를 이용한 대기 중 렌즈 시스템(Laser Developed Atmospheric Lens system).

실제로 고출력 레이저를 방어하는 무기는 상상 속의 개념이 아니었다. 레이저 병기에 맞서, 뜨거운 공기층을 형성해 빛의 굴절을 유도하는 광학 병기.

‘해볼 가치가 있다.’

데일이 알고, 성처녀가 알지 못하는 것. 이계의 지식.

흑색과 청색의 마력을 이용하는 데일에게, 적탑의 마법사들과 같은 화염을 생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불꽃을 태울 필요는 없다. 열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분자 운동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지표에 불과하니까.

차가움이 ‘분자 운동의 부재’를 나타내듯이, 열과 차가움은 결국 표리일체의 개념이기에.

데일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성처녀의 날개를 따라 휘몰아치는 빛이, 정지해 있는 대상을 향해 겨누어졌다.

소멸의 빛이 데일을 표적으로 지정하고, 데일 역시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이 의식을 집중했다.

일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의 마력을 흩뿌리며 성처녀가 가진 빛의 날개를 주시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빛보다 빠를 수는 없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기 전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빛의 날개가, 다시금 찬란하게 빛을 증폭시켰고…….

‘지금이다.’

데일이, 확고한 이계의 지식에서 비롯된 메커니즘을 투영했다.

“──빛이여, 굴절하라.”

그 심상을 확고히 하기 위한 이계의 영창.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대의 분자 운동을 가속하고, 공기층을 가열시킴으로써, 고출력 레이저의 굴절을 유도하는 ‘빛의 방패’를 구축했다.

바로 그 빛의 방패를 향해, 소멸의 빛이 내리꽂혔다.

“……!”

창과 방패.

집속 포격으로 쏘아지는 소멸의 빛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튕기며, 역으로 성처녀의 날개를 향해서──.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무엇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을 중심으로 가속하고 있는 서클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심장의 고통이 멎었다.

슈브의 모습이 사라졌고,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겨울밤의 풍경 역시 사라졌다.

어느덧 데일이 있는 곳은 랭스의 도개교 위에 있었다.

심장의 서클이, 과부하 끝에 기동을 정지했다.

‘설마 여기서 패배할 줄이야…….’

절체절명의 일수를 앞두고, 자신의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바로 앞의 벽, 4서클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결말이다.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

갈기갈기 찢어져 구멍 뚫린 날개. 엉망으로 부서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금빛의 갑주. 참으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처투성이의 모습이 되어서.

바로 그 성처녀가, 데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데일의 역공이 성공했다.

‘……!’

그러나 상처투성이의 성처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최후의 기력을 쥐어짜듯이.

쓰러지지 않았다.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서클의 힘을 모조리 소모하고 저항할 기력조차 없는 데일을 향해 오렐리아가 걸음을 옮겼다. 이름 없는 병사의 칼끝이 겨누어졌다.

“이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성처녀가 말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결말에, 데일이 쓴웃음을 짓는다.

“제 패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칼을 겨누고 있는 성처녀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젓고 나서 그대로 데일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검을 바닥에 세로로 내리꽂으며.

“이 승부는 무승부입니다.”

성처녀가 말했다. 무승부.

“그럴 리가…….”

이미 데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을 소모했다. 그에 비해, 치명적 역습을 허용했다 하나 성처녀의 ‘아바타’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싸움을 속행할 수 있는 상황이다.

성처녀 오렐리아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공자님의 무위에 경외를 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처녀가 데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표하고 있었다.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군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군요.”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성처녀 역시 미소 지었다.

“저, 작센의 데일.”

직후, 데일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약속대로 이곳 랭스,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를.”

최후의 마력을 쥐어짜서 마법으로 확성(擴聲)하고 있는 데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도시의 사람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는 독립군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가.

“시스티나 자매신과 성처녀 오렐리아 님 앞에 바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브리타니아 왕국의 적통 샤를 7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처녀 오렐리아’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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