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 *
금빛의 섬광이 쇄도했다. 마치 빛 그 자체가 질주하는 것 같은 신속(神速). 전생 이후 처음으로 맞서는 기사의 극의, 아바타 능력자.
그러나 이곳은 ‘데일의 세계’였다. 그날의 희고 어두운 겨울밤, 그 시린 냉기와 어둠을 투영하고 있는 죽음의 세계. 두 사람을 가두고 있는 투기장.
마법사가 전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사상의 세계를 투영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 그것은 ‘마법사의 요새’를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
가령 그 의미를 100% 이해하지 못하는 일개 6서클…… 평범한 마탑 장로들의 경우에는, 그저 영창의 최적화를 위해 심상(心想)을 증폭하고, 수식이 강화되며, 자신이 가진 마력 색상의 순도를 올리는 기초적 수준에서 그치나. 데일의 경우는 달랐다.
사상의 세계…… ‘마법사의 요새’가 갖는 진짜 의미를 이해하고,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까.
애초에 마법사는 전쟁에서 활약하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 설령 그 힘이 초상의 성질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서클이 높아도, 자신의 사상을 전투에 특화해 쌓지 않으니까.
가령, 전생 이후 데일의 손에 패배한 6서클의 장로들처럼.
그들은 그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은 ‘학자’에 불과했다.
설령 그들이 탐구하는 학문의 이치가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그들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초상의 힘을 손에 넣었다 해도. 애초에, 학자가 전사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용사의 손에 스러진 최고의 전투 마법사들이 보여준 ‘세계’. 전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마법사. 그것도 6서클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고위 마법사.
바로 그들이 보여준, 철저하게 ‘전투를 위한 세계’의 형태를 데일은 기억하고 있었다.
오로지 전투를 목적으로 쌓아 올린 마법사의 요새, 그 세계가 갖는 진짜 위력을.
살육의 세계. 그 자체로 하나의 성채가 될 수 있는 궁극의 경지.
그리고 그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쇄도하는 공격자가 있었다.
성처녀 오렐리아, 금빛의 발키리.
고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기사와 마법사의 싸움.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성(攻城)이었다.
시린 냉기와 어둠이 휘몰아치며, 쇄도하는 성처녀 오렐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슈우욱!
─ 꺄하하하핫!
칠흑의 촉수가 내리꽂혔다.
데일이 듣기에는, 어린 소녀의 티끌 없이 순수한 웃음소리.
“■■■■──!”
성처녀 오렐리아가 보기에는, 그저 끔찍한 이계의 흉물이 뿜어내는 괴성에 불과하리라.
‘……!’
금빛의 발키리가 일섬을 휘둘렀다. 황금의 빛이 휘몰아쳤다. 추악한 것을 정화하고, 어둠을 가르고 새벽의 여명을 가져오는 검.
그 검이 ‘슈브’의 촉수를 잘라냈고, 거기서 콜타르처럼 검고 어두운 액체가 흩뿌려졌다. 그녀의 코앞에서.
타앗!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는 마치 물리 법칙을 무시하듯, 쇄도를 멈추고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다.
성처녀의 금빛 갑주조차 어찌할 수 없는 사악과 부정의 정수를 피해서.
“──여기는 나의 영역이다.”
그 직후, 데일의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밤의 밑바닥에서, 어둠의 호수가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림자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섀도우 러커》들이, 일제히 가시 촉수를 내뿜었다.
데일의 곁에서,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칠흑의 촉수가 일제히 내리꽂혔다.
촉수지옥(觸手地獄).
‘악의로 가득 차 있는 세계’가, 그 악의를 가감 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저 어린아이의 악의, 흡사 악의 씨앗을 보는 것 같은 불길함을 뒤로하고.
묵묵히 금빛의 검을 휘두를 따름이다.
성검이 아니다. 이름 없는 병사의 검. 그러나 그 검에 휘감겨 있는 찬란한 금빛 앞에서는, 성검의 빛조차 덧없이 느껴지리라.
어둑새벽 사이로 고개를 치켜드는 여명의 빛처럼.
금빛의 발키리, 전처녀(戰處女)를 범하기 위해 내리꽂히는 촉수의 세례 앞에서, 빛이 휘몰아쳤다.
“……!”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소.
어둠의 호수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마치 강물이 마르고 고갈되어 밑바닥을 드러내듯이.
‘역시 쉽지 않다.’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그리고 ‘3서클의 마법사’가, 재차 심장의 서클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세 개의 서클, 그리고 그 서클을 휘감고 있는 칠흑의 촉수…… 『검은 산양의 서』.
두 개의 흑색 원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데일의 세계 일대로 퍼져나갔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풍경을, 자신의 요새로 바꾸기 위해.
기사는 철저하게 전장에 서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의 검을 갈고닦는다. 그렇기에 기사가 검과 갑주, 육체에 투영하는 것은 그들이 쌓아 올린 ‘살육의 사상’이다. 그것이 설령 여신의 계시를 받아 손에 넣은 힘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으리라.
전사.
일개 학자는 결코 전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 그러나 데일은 결코 일개 학자가 아니었다.
“……!”
일순, 성처녀 오렐리아의 표정에 경계의 기색이 감돌았다. 그대로 등을 돌려, 금빛의 발키리가 검을 휘둘렀다.
카앙!
성처녀의 이름 없는 검이, 맞부딪쳤다. 무엇에?
흑검(Black Blade)이었다.
“……!”
작센 가를 상징하는 칠흑빛 오러 블레이드. 뼈밖에 남지 않아서, 밤까마귀 기사의 흑색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검. 아바타 능력자, 성처녀의 일검을 막아낼 정도의 무위가 실려 있는 검.
바로 그 흑검의 기사가 쇄도하며, 성처녀를 향해 일격을 휘둘렀다.
밤까마귀 기사의 ‘소재’로 되살린 시체가 아니다. 이 세계에 그깟 제약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여기는 어디까지나 마법사가 자신의 사상을 투영하고 있는 세계이며, 데일은 바로 이 세계의 신(神)이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역량이, 데일에게는 존재했다.
일개 학자에 지나지 않는 6서클의 장로 따위는 감히 꿈조차 꾸지 못할 경지.
──희고 어두운 겨울밤.
희끗희끗한 진눈깨비가 흩날렸고, 시린 냉기와 어둠이 휘몰아치는 그곳에서, 어느덧 불사의 군세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센의 흑검을 쥐고 있는 데스나이트들이, 그들의 주군이자 ‘세계의 주인’을 지키기 위하여.
* * *
사상(思想)의 힘으로 쌓아 올린 데스나이트들. 그들 하나하나에 투영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용사라 불린 자의 무위였다.
데스나이트를 일으키고 나서, 블랙아머 컴퍼니의 대장으로 활약하며 끝없이 축적한 데이터. 검의 천재 샬롯과 무수히 수행을 거듭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쌓아 올린 검의 정수.
바로 그 정수를 녹여내고 있는 ‘수식’이 데스나이트의 위로 덧씌워졌다.
「자동화(Automatic) 수식」.
아직 시험 레벨에 불과하나, 첫 실전에 투입하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는 상대다.
‘어디까지 맞설 수 있을까.’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맞서는 규격 외의 강자. 그를 상대로, 지금 데일은 일말의 가감도 없는 100% 그 이상의 전력을 펼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서클의 오버클럭 속에서, 서클 하나하나가 수천 RPM을 상회하며 가속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칠흑의 촉수가 또 하나의 ‘흑색 원천’을 자처하며, 심장과 서클에 힘을 주입하고 있다.
지금, 데일은 이 세계의 주인이자 신이었다.
그러나 전지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다. 힘을 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마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정도 규모의 데스나이트를 일으키고, 그들 하나하나에 용사의 무위를 담아 자동화 수식을 투영하는 것은 공짜가 아니니까.
심장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 아아, 오빠…….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데일의 어깨를 휘감았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데일의 뺨을 애무하듯.
“……!”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가 보기에는, 그저 끔찍한 촉수들의 군체가 데일을 휘감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혐오스러운 이계의 흉물이, 콜타르처럼 검고 어두운 점액(粘液)을 뚝뚝 떨어뜨리며 촉수를 휘감는 풍경.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풍경을 뒤로하고,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사방에서 쇄도하는 흑검의 기사들을 향해, 검의 금빛 서슬을 빛내며 오렐리아감 kf했다.
“이 이상 공자님을 ‘적당히’ 상대하는 것은 어려울 듯싶네요.”
“그 정도는 개의치 않습니다.”
“랭스를 넘겨주신 공자님의 호의를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금빛의 발키리가 말했다.
“이 이상 전력을 다했다가는, 공자님의 목숨을 보장해드릴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요.”
“말씀하십시오.”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의 왕이 될 자는, 좋은 왕이 될 것 같습니까?”
“……!”
“성처녀님께서 이토록 필사적으로 샤를 7세에 왕위를 넘겨주려 하시는 걸 보니.”
데일이 덤덤하게 물었다.
“필시 나무랄 데가 없는 성군(聖君)이겠군요.”
“…….”
“제국의 폭정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염려하고, 정의를 알며, 진심으로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계시겠지요.”
데일이 말했다.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그리고 그 물음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성처녀 오렐리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물음이 아니었다.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샤를 7세라고 하는 남자의 실체를.
“그저 그 남자가 왕가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로…….”
그 외의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성처녀께서는, 그 남자에게 이 나라의 전부를 바칠 생각입니까?”
“생각하는 것은 저의 역할이 아닙니다.”
“아니요, 오렐리아 님께서는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또 그 말이다.
“시스티나 자매신께서 바라시는 ‘브리타니아 왕국을 구하겠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렸듯이.”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저는 그저 ‘여신의 뜻’을 집행할 따름입니다.”
제국의 폭정에서 왕국을 구하고 가장 자격 있는 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그리고 샤를 7세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왕가의 피를 타고났다는 천부(天賦)의 자격이.
“하늘의 꼭두각시를 자처하시는 겁니까?”
하늘의 꼭두각시.
비록 금빛의 투구에 가려져,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린 냉기가 휘몰아치는 이 세계에서조차, 일대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성처녀 오렐리아가 말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데일 역시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일찍이, 데일이 요네스 경에게 해준 말과 무척 흡사했으니까.
우리의 손으로 바꿀 수 있는 운명 따위는 없다.
“그러나 운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늘의 것’ 역시 아닙니다.”
절대 ‘하늘의 꼭두각시’는 될 수 없다는 듯이.
“……그렇습니까.”
그 말에, 성처녀 오렐리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이름 없는 검을 고쳐 잡는다.
“그럼 대화는 여기까지로군요.”
그녀의 발밑을 중심으로, 황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빛으로 이루어진 여섯 장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다.
어느덧 그것은 더 이상 금빛의 발키리조차 아니었다. 신의 집행자가 그곳에 있었다.
치품천사, 세라프(Seraph).
“■■■■■■■■──!”
그와 동시에,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절규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