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그 남자는 헐벗은 창부들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치열한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사치품을 덕지덕지 장식한 성내의 침실에서.
“샤를 전하.”
성처녀 오렐리아의 부름에도,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부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세상이 떠나가라 코를 골고 있을 따름이다.
방 전체에서는 역한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제국의 폭정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국의 싸움이란 말이 무색한 모습이다.
“샤를 전하.”
정적 끝에, 성처녀 오렐리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후로도 다섯 차례 ‘왕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으, 음……? 무, 무어냐.”
그제야 비로소 ‘브리타니아 왕가의 적통’ 샤를 7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자마자 루비 수정을 수놓은 황금잔을 손에 쥐고…… 창부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는 대낮이었다.
“제국군의 치중대가, 방금 저희의 요구대로 대량의 군수물자를 넘겼습니다.”
“그래……? 으음, 잘했다, 잘했어.”
전투의 향방을 가를 수 있을 정도의 결정적 수확. 그러나 샤를 7세의 표정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이 나라의 왕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성처녀 오렐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얼마 전, 필립의 몸값 협상을 위한 테이블에서 ‘검은 공자’의 말을 떠올리며.
“아울러 적의 지휘관이 무척이나 수상한 제의를 해왔습니다.”
무혈(無血)로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 랭스를 넘겨주겠다.
“뭐, 제깟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게 아니겠나.”
그 경악할 이야기에도 샤를 7세의 태도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일말의 신중함조차 없이. 그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흘려넘길 따름이다.
“아, 그러고 보니.”
바로 그때였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네.”
일순 샤를 7세의 표정에 그 무엇과 비교할 바 없는 총기(聰氣)가 감돌았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왕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걸까.
“말씀하십시오, 전하.”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성처녀 오렐리아가 되물었다.
“제국군이 넘겨준 물자 중에, 제국 남부산 포도주를 좀 가져와다오.”
“……!”
돌아오는 것은 기대를 배신하는 주정뱅이의 그것이었다.
“크흐흐, 남부산 포도주의 맛이 그리워서 참을 수가 없군!”
그렇게 말하며, 샤를 7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왕국의 수도를 손에 넣은 기념으로, 모처럼 포도주를 터뜨리기에 제격이 아니겠나!”
그 말에, 곁에 있는 창부들이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이라니요. 불과 어제도 거하게 술판을 벌이시지 않았습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그 말을 억누르며, 성처녀 오렐리아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은 왕가의 피고, 그 이유 하나로 이 남자에게는 브리타니아 왕국의 될 자격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니까.
그저 이대로 왕국의 수도를 수복하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이 이루어지고…….
무심코, 그 후에 일어날 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의 국왕, 샤를 7세의 명령을 여신의 계시처럼 떠받드실 겁니까?
일찍이 ‘검은 공자’가 그녀의 가슴팍에 내리꽂은 비수가.
* * *
“랭스를 독립군 놈들에게 거저 바치겠다고?!”
데일의 말에,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랭스, 구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이자 대대로 왕실의 적통이 대관식을 치르는 곳.
“그 의미를 알고나 있는 것이냐, 작센 가의 애송이가……!”
“아, 그야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절대 공짜로 알려줄 수 없다는 듯이, 데일이 대답했다. 레이디 스칼렛은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보여준 교태나 아양조차 없이, 덤덤하게.
“그리고 백작님.”
데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아직도 주제 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신데.”
“뭐, 뭐라고……?”
“그새 우리 계약을 까먹으셨나?”
노호를 감추지 않는 성검사의 앞에서, 데일이 말을 잇는다.
“내가 댁 상관이라고.”
“……!”
두 사람 사이에 맺은 구속의 맹약. 데일의 조롱에 성검사가 다시금 노기를 터뜨렸다.
“네놈이 우쭐하는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알겠으니까, 거기서 얌전히 대가리나 박고 있으십시오.”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상관이 까라면 까야지, 뭘 그렇게 말이 많아?”
* * *
데일의 약속처럼, 브리타니아 독립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자들은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랭스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군 주력 역시, 독립군의 진격에 발맞추어 일찌감치 부대를 물렸다.
그리고 브리타니아 독립군이 그들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옛 수도에 이르렀을 때.
무혈입성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곳 랭스에서, 성처녀가 지휘하는 독립군의 군세를 마중하는 자가 있었다.
제국군의 총사령관, 작센 가의 ‘검은 공자’였다.
* * *
데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구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도, 랭스의 도개교를 내리고, 그 도개교 위에서 홀로 적의 군세를 가로막듯이.
장판파(長坂坡) 위의 장비처럼.
그러나 그것은 제아무리 데일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검사, 나아가 7서클의 적마법사와 휘하의 퓨리파이어 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제국군조차, 성처녀가 지휘하는 독립군의 강자들과 맞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다시 말해, 총력전을 펼쳐도 이길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제국군의 압도적 우세였다.
기사를 ‘전쟁의 꽃’이라고 가정할 경우, 병종(兵種)에 있어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핵심 전력이 있었으니까.
고위 마법사다.
바로 그 ‘고위 마법사 전력’의 대다수를, 어느 패배의 천재가 말아먹기 전까지는 그랬다.
후방에서 엄호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규격 외 강자들의 싸움마저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력. 그들의 중요성을 고려해 불락의 요새 ‘벨 포트’에 주둔시켜 놓은 것이, 역으로 몰살의 자충수가 될 줄이야.
“작센 가의 공자님.”
바로 그 최악의 상황에서, 홀로 적의 군세를 마주하는 것이다. 작센의 데일, 바로 그 ‘검은 공자’가.
“약속대로 ‘랭스’를 우리 독립군에게 넘겨주시겠습니까?”
그렇기에 데일을 상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처녀 오렐리아의 몫이었다.
도시 성벽을 따라 해자를 두르고, 그 해자 사이를 잇고 있는 도개교 위에서, 성처녀가 ‘검은 공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약속대로 랭스는 넘겨드릴 겁니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전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부디, 저에게 성처녀의 검으로 일수(一手)의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일수의 가르침. 일찍이 ‘검은 공자’를 향해 도전하는 무수한 상대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이제는 역으로 도전하는 쪽의 입장에 서서, 데일이 말했다.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치러지는 싸움을 의미하는 겁니까?”
“아니요, 제가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처녀님의 ‘가르침’입니다.”
성처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데일이 대답했다.
“성처녀님의 검 앞에서, 제 마법 따위는 어린아이의 그것에 불과할 테니까요.”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성처녀 오렐리아는 지금의 데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자다. 애초에 승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성처녀의 검’이 보여주게 될 무위 앞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러나 그 속에 시커멓기 그지없는 노림수를 감추고.
“좋습니다.”
성처녀가, 금빛 자수를 수놓은 칼집의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설령 데일이 100%의 전력을 발휘할지라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길 수 없다. 성처녀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오히려 ‘그렇기에 수락할 수 있는 제의’였다.
스릉.
허리춤의 소드 벨트에서, 그녀의 검이 시퍼런 서슬을 내뿜었다.
“이름이 있는 검입니까?”
“왕국의 독립을 위해, 명예롭게 싸우다 전사한 이름 없는 노병의 철검입니다.”
성처녀가 대답했다.
“그렇기에 죽어가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검을 쥐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병사의 검.
“저는 이 검을 ‘무명검(Nameless Sword)’이라 부르고 있지요.”
그와 동시에 데일의 발밑에서, 흑청의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조차,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 마력량이었다. 후위에 있는 독립군이 당황하며 급히 전투태세를 취했으나, 성처녀 오렐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팔을 뻗어 그들을 제지할 따름이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물러나라. 그 말과 함께, 오렐리아의 무명검을 따라 빛이 일렁였다.
성검사, 그리고 성 막달레나 기사들이 추구하는 순백이 아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금빛이, 오렐리아의 검과 갑주를 따라 휘감기기 시작했다.
검과 갑주, 그리고 육체에 사상을 투영하는 행위. 재능 있는 기사들이, 일평생을 검에 바쳐도 도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오러 마스터’의 경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는 초상의 힘을, 일개 농노의 딸이 그곳에서 펼치고 있었다.
기사의 검이 추구하는 궁극의 전투 형태.
사상의 갑주, 아바타.
──금빛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발키리(Valkyrie)가, 그곳에 있었다.
전쟁의 처녀. 여신의 강림이라 일컬어지는 계시의 증표.
‘저것이 성처녀의 모습…….’
생각하고 나서, 데일이 의식을 다잡았다. 성처녀와의 모의 결투. 이것은 어디까지나 ‘승리를 위한 작전의 일부’이기도 했으나, 그와 더불어 지극히 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규격 외의 강자와 맞섬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 지금의 데일이 목전(目前)에 두고 있는 경지.
4서클.
‘솔직히 말해서, 승산 따위는 없다.’
애초에 이길 생각으로 그녀에게 도전을 신청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울러 모의 결투라고 해도, 여차할 때에 목이 날아가는 것이 강자들의 싸움이다. 찰나의 방심이 죽음으로 직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백에 하나. 설령 이곳에서 4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을 경우, 이길 가능성은 결코 0%가 아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1% 남짓의 그것에 불과하나.
‘그렇게 될 경우에는 더더욱 이야기가 쉬워지지.’
이길 경우에는 이대로 전쟁이 끝날 것이고, 설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데일에게는 그다음의 수가 있었다. 처음부터 잃을 것이 없는 승부였다.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 역시…… 데일의 제의를, 희생 없이 랭스를 손에 넣을 최적의 길이라 여기고 있으리라.
“결투를 시작하지요.”
데일을 향하고 있는 성처녀의 표정에, 12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방심 따위는 없다.
그와 동시에, 데일의 발밑에서 휘몰아치는 흑청의 마력이 일대로 퍼져나갔다.
오렐리아 역시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고위 기사들이 아바타라 불리는 ‘사상의 갑주’를 두르듯, 고위 마법사가 의식적으로 이 세계에 ‘사상의 세계’를 덧씌우는 행위.
마법사의 세계.
6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꿈도 꾸지 못할 마법의 정수가, 고작 3서클에 지나지 않는 12살 어린아이의 손에 의해 펼쳐지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규격 외의 힘’을 손에 넣은 이레귤러는, 결코 데일 하나가 아니었으므로.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세계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허무와 공백의 지평.
“……!”
그것은 시린 냉기와 어둠이 휘몰아치고 있는 《죽음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시린 냉기와 어둠조차,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성처녀의 존재를 장악하지 못한다.
‘저것이 바로 아바타…….’
성처녀의 무명검이, 찬란하게 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금색의 갑주를 따라, 빛으로 이루어진 망토가 펄럭였다.
“각오하십시오, 데일 공자님.”
성처녀 오렐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곳은 데일의 세계였고, 이 세계의 시린 냉기와 어둠을 투영하고 있는 데일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상대가 아니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데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시린 냉기와 어둠이 발밑에서 휘몰아쳤다. 미친 듯이 광희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의 펄럭임을 뒤로하고.
“──슈브.”
데일이 어느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금빛의 발키리가 섬광처럼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