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72화 (72/301)

72화

* * *

강자는 엉덩이가 무겁다. 자신의 존재가 갖는 전력과 그 무게감을 누구보다 절실히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그러나 통일 전쟁 이후의 제국에서 ‘성처녀 오렐리아’가 독립 전쟁을 일으키고, 네 배의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 제국군의 대부대가 몰살되었다.

신생(新生) 브리타니아 왕국의 성립.

그것은 제국으로서도 이 이상 앞뒤를 재며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국이 자랑하는 시대정신의 집행자, 적색 마탑의 고위 장로 ‘레이디 스칼렛’의 이끄는 퓨리파이어 부대가 대거 투입되었다.

아울러 백색 마탑의 장로이자 시스티나 여신교의 추기경, 니콜라이를 필두로, 성처녀가 주장하는 계시의 진위를 가리고자 백색 마탑의 ‘백마법사’들이 그들과 함께했다.

대륙 칠검의 일좌이자 규격 외의 강자, 성검 브란덴부르크 백작 역시 그의 성 막달레나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의 아들이자 백작 가의 장남, 호색한 필립과 함께.

끝으로 니콜라이 추기경의 심장에 ‘절대복종의 기아스’를 새겨 넣고, 흑백 회전에서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을 사로잡아 거액의 몸값을 내고 나서야 풀어준 ‘검은 공자’가 제국군 수뇌부에 합류했다.

블랙아머 컴퍼니의 중장갑 보병대 오백 명, 나아가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들을 거느린 채.

제국 제일의 재능을 가진 공작 가의 신동. 대륙에 끝없는 명성을 떨치고 있는 블랙아머 컴퍼니의 용병대장.

아울러 끝을 모르는 잔혹함과 악명으로 이름 높은 바로 그 ‘검은 공자’가.

* * *

불어오는 바람에서 소금 냄새가 났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울고 있었다. 출렁이는 수평을 따라 햇살이 사금처럼 부서져 내렸다.

브리타니아 섬의 항구도시, 도버. 칼레 해협(海峽)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마주하고 있는 제국군 대부대의 상륙 지점.

그곳 항구도시 도버의 성채에서, 브리타니아 섬에 최후의 하나까지 상륙을 마친 제국군 수뇌부가 자리에 모였다.

“아, 필립 공자님.”

“…….”

“그리고 니콜라이 추기경.”

“……!”

작센 가의 장남, 데일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는 부관이자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와 함께.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제국의 강자들을 앞에 두고.

“네, 네, 네깟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 모습을 보고, 성검사의 곁에 있는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이 소리를 높였다.

호사가들의 입에서 수군거리는 역사적 전투…… ‘흑백 회전’의 패배자. 데일의 명성을 위한 산 제물.

그날, 전장에서의 뼈저린 대패를 떠올린다. 작센 공작 가에 생포되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치욕과 굴욕 속에서 지새운 하루하루를 떠올린다.

“후후, 세상이란 참으로 불공평하지요.”

바로 그때였다. 필립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며, 레이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

일순 그녀의 가슴골을 향해 호색한 필립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쏠린다. 레이디 스칼렛은 더더욱 과시하듯 옷매무새를 풀어헤치며, 말을 이었다.

“하나의 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치욕과 대패를 경험하는 희생양이 있고…….”

요염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윙크를 날리며.

“그 승리와 활약을 바탕으로, 제국 전체에 그 명성을 떨치는 멋진 남자가 있으니 말이지요.”

필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센의 데일을 향해서.

“그, 그날의 전투는 어디까지나 교활하고 비겁한 수작으로……!”

스칼렛의 말에 필립이 승복하지 못하고 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쓰레기 같은 패배자 놈.”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성검사의 노호가 돌아왔다.

“네놈 따위의 둔재가, 무엇이 잘났다고 감히 작센의 ‘검은 공자’님에게 혀를 놀리는 것이냐.”

“아, 아버지……!”

“부디 아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성검사가, 데일을 향해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용서라니요.”

그 말에, 데일이 차갑게 조소했다.

“오히려 필립 공자님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답니다.”

데일의 주가를 수직으로 올려준 그날의 승리를 떠올리며.

“제가 가진 ‘검은 공자’의 이름도…… 필립 공자님의 분전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명예였을 겁니다.”

흑백 회전에서 마지막까지 옥쇄를 부르짖은 필립의 어리석음. 바로 그 어리석음이, 데일을 그 무엇과 비교할 바 없는 악의와 잔혹함의 대명사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군사 전략의 귀재이자 적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검은 공자’로서.

“우, 웃기지 마라……! 그날의 전투는 결코 나의 패배가 아니었다!”

필립이 질 수 없다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나는, 나는 절대로 네놈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절대로 자신의 책임이 아니란 듯이.

“어디까지나 무능한 부하 놈들이 멋대로 내 명령을 어기고…….”

무능한 지휘관을 둔 죄로 최후의 하나까지 몰살당한 기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확실히, 그곳의 기사들이 ‘필립 공자님의 그릇’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그렇다! 그 말대로다!”

데일의 말에 필립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를 높였다.

“제까짓 일개 기사 놈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말을 거슬러서……!”

무능한 지휘관 덕에 몰살당한 성 막달레나의 기사들을 탓하며, 필립이 소리를 높였다. 참으로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추태였다.

“그 입을.”

그렇기에 망나니 아들의 추태를 보다 못하고 비로소 성검사가 침묵을 깨트렸다. 조용하게, 그러나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노기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당장 다물어라.”

자신이 조롱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데일의 말에 필사적으로 맞장구치고 있는 무능한 망나니. 당장에라도 자신의 아들을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뒤로하고 성검사가 말을 잇는다.

“그 이상 나의 기사들에게 헛소리를 지껄였다가는, 네놈을 저 앞바다에 그대로 처넣어버릴 테니.”

“히, 히익!”

적어도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의 대패 속에서 시체의 산을 쌓아 올린 ‘그의 기사’들을 떠올렸다.

작센 가의 장남은, 필립 따위의 둔재(鈍才)가 일평생을 바쳐도 발끝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굴욕과 자괴감이 심장을 옥죄었다. 천재란 말도 부족할 그 괴물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는, 무능하고 쓰레기 같은 아들의 모습에.

어떻게 자신의 피에서, 저토록 무능하고 쓰레기 같은 자식이 태어났나.

그렇다. 필시 ‘재능 없는 자의 피’가 섞여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신검의 딸, 오르하르트의 샬롯이 필요했다. 그녀가 가진 신검의 피에, 자신의 피를 섞는 것으로 ‘최고의 검사’를 낳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진정으로 성검에 어울리는 최고의 그릇을 낳기 위해서.

그러나 실패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검은 공자, 나아가 작센 공작이 선수를 쳤으니까.

아울러 바로 그 신검의 딸이, 작센 가의 밑에서 기사 수행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을 때, 작센 가의 장남을 보좌하는 기사로 거듭나, 나날이 자신의 검재(劍才)를 펼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검사의 격노는 감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개의치 않았다.

신검의 딸,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최고의 그릇’이 나타났으니까.

바로 이곳, 브리타니아 섬에서.

‘성처녀 오렐리아…….’

브리타니아 섬에서 벌어진 사태의 전말을 들었을 때, 성검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여신의 강림이라 일컬어지는 여기사. 기사로서 궁극의 전투 형태라 일컬어지는 아바타의 경지에 도달한 구국의 기수.

‘그 계집에게 나의 씨앗을 잉태시켜, 성검에 어울리는 최고의 그릇을 창조할 것이다.’

그녀의 검에 대해 들려오는 일화를 들을 때마다,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생을 향해 비틀리고 일그러진 남자의 욕망. 성처녀의 뱃속에 자신의 씨앗을 잉태시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처럼 음침한 속셈을 가진 자는 결코 성검사 하나가 아니었다.

비록 노리고 있는 목적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이것이 바로 제국을 위한 명목 아래 모여 있는 ‘대의의 실체’였으니까.

저마다의 목적을 감추고, 어디까지나 허울밖에 없는 명목상의 결속. 그 ‘허울밖에 없는 결속’은 결국 제국이라 불리는 국가 그 자체이기도 했으며, 제국이 황도에 상주하는 ‘규격 외 강자’를 섣불리 투입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아주 그냥 콩가루 조직이 따로 없어.’

그것은 데일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

“……그럼 작전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생각을 정리하며, 데일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네, 네놈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자랑스러운 제국군에게 명령을 내리겠다는 것이냐!”

상황을 주도하려는 데일을 향해, 필립이 소리를 높였다. 정말로 처절하다 못해 추할 정도의 열등감이었다.

“아, 그럼 저는 조용히 입을 다물도록 하지요.”

데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다물었다.

“후후, 필립 군.”

그 모습을 보고 레이디 스칼렛이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호색한 필립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색기와 요염함을 담아서.

“레, 레이디 스칼렛?”

스칼렛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필립이 일말의 기대와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디 그 돼지 냄새나는 역겨운 입을, 좀 다물어주지 않을래요?”

그 직후,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무엇 하나, 데일 공자님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할 무능한 도태 수퇘지 따위가.”

“……!”

“주제도 모르고 열등감에 젖어, 돼지처럼 꿀꿀대고 있는 꼴이라니.”

그야말로 벌레를 보는 것 같은 차가운 표정. 일찍이 데일의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싸늘함.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 서린 악의는 아주 찰나였다.

“후후, 그에 비해 데일 공자님의 빛나는 모습이란!”

스칼렛이 데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아앙, 벌써 데일 공자님의 활약이 기대돼서 참을 수가 없답니다.”

노골적으로 교성을 흘리며 황홀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스칼렛의 아양에, 세피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 이, 이이익……!”

사방에서 쏟아지는 굴욕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호색한 필립이 그곳에 있었다.

‘저 새끼 저거, 저러다 제대로 사고 치겠네.’

* * *

브리타니아 섬에는 두 세력의 영토가 공존하고 있었다.

제국의 총독…… ‘부르고뉴 총독’의 통치 아래 브리타니아 섬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령. 그리고 성처녀 오렐리아의 지휘 아래, 브리타니아 독립군이 수복한 ‘신생 브리타니아 왕국’의 새 영토.

그즈음, 독립군을 이끌고 진격하기 시작한 성처녀의 목표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직 그들이 손에 넣지 못한 구 브리타니아 왕국의 심장. 대대로 브리타니아 왕가의 후계자가 대관식을 거행하고, 아울러 왕국의 수도로 그 임무를 수행한 도시.

랭스(Reims)였다.

그렇기에 브리타니아 섬에 추가 상륙한 제국군 역시, 독립군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기동을 시작했다. 속전속결의 결착을 위해, 나아가 저마다의 목적과 이해를 교차시키며.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어두운 욕망을 뒤로하고 비로소 전쟁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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