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 *
“브리타니아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는 무척 심려스럽게 생각하나…….”
작센 공작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공작령은, 지금도 마왕령의 마족 대이동에 맞서 제국 영토를 수호하는 것도 벅찬 상황입니다.”
짐짓 유감스럽다는 듯이. 그러나 절대로 브리타니아 섬까지 작센의 군세를 보낼 수는 없다는 의지였다.
“후후, 그 점에 대해서는 저희 역시 십분 이해하고 있답니다. 제국을 위한 공작 각하의 헌신에 대해서는, 폐하 역시 모르지 않으시니까요.”
스칼렛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센 가의 군세가 아니라, 대륙 전체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적의 용병대…… 블랙아머 컴퍼니랍니다.”
흑색공의 옥좌 곁을 지키고 있는 데일을 향해, 레이디 스칼렛이 말했다.
“그 악명 높은 ‘검은 공자’의 지휘 아래, 불패의 신화를 써 내리고 있는 전설 그 자체!”
“…….”
“검과 마법의 재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를 읽고 ‘장기 말’들을 움직여 승리를 손에 넣는 군사 전략의 귀재라지요.”
레이디 스칼렛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데일의 재능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일찍이 흑백 회전에서 성검의 개들을 몰살한 공자님의 군사적 재능을…….”
성검의 개. 자신의 동맹을 향해 싸늘한 조롱과 조소를 감추지 않으며 말을 잇는다.
“브리타니아의 역적 무리에 맞서, 부디 제국을 위해 마음껏 펼쳐주지 않으시겠어요?”
그 말에, 작센 공작의 표정에 일순 망설임이 깃들었다. 필시 자기 아들을, 대륙 저 너머의 섬나라까지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는 거겠지. 그것도 내부의 적이 어디서 등 뒤를 찌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나 여기서는 물러설 수 없다.
제국의 폭정에 맞서 독립운동의 기수를 자처하는 구국의 성처녀. 브리타니아 왕국의 독립 전쟁. 이것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니까.
그렇기에 데일이 아버지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 찰나였다.
“좋습니다.”
바로 그때,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
데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수긍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블랙아머 컴퍼니를 고용하겠다는 것은, 레이디 스칼렛의 말씀대로…… 제국 제일의 재능이라 일컬어지는 제 아들을 사는 것과 같지요.”
데일조차 생각지 못한 의외의 덧붙임과 함께.
“군사 전략의 천재이자, 개개의 무력에 있어 감히 제국의 강자들에게 자웅을 겨루는 저의 아들입니다.”
“…….”
흑색공이 말을 잇는다. 흡사 자랑스러운 자식 이야기를 시작하는 철부지 아버지의 그것처럼, 천하의 데일조차 낯이 붉어질 정도의 아들 자랑을 늘어놓으며.
“나아가 ‘블랙아머 컴퍼니’의 중장보병 역시, 밤까마귀 기사들의 혹독한 교육 아래 육성한 정예 중의 정예병이지요.”
작센 공작이 말을 잇는다.
“지금도 작센 공작령에서는, 정식으로 ‘블랙아머 컴퍼니’에 입대를 앞둔 수백의 후보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무용담이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지고 용병들에게 있어 꿈의 직장이 되었을 때, 블랙아머 컴퍼니에 정식으로 입대하고자 제국 전역의 용병들이 작센 공작령으로 쏟아져 왔다. 바로 그 입대 희망자를 거르고 걸러, 최강의 중장갑 보병대로 거듭날 준비를 앞두고 있다.
기존의 용병대가 아무 이유 없이 밥그릇의 위협을 느끼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
“그 모두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대금을 치를 각오가, 황실에는 되어 있으십니까?”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다. 블랙아머 컴퍼니가 맞서게 될 상대 역시 지금까지 상대한 잡병들이 아니라, 성처녀를 필두로 하는 독립군이다. 그것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섬에서.
결코 몇 푼의 금액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천금(千金)이 필요하겠네요.”
그 의미를 헤아린 레이디 스칼렛이 미소 짓는다.
“그러나 데일 공자님의 재능을 사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설령 천금조차 터무니없을 정도의 헐값이겠지요.”
오히려 가격 협상을 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고, 너무나도 순순히 작센 공작이 제시하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억금(億金)을 지불하지요.”
“……!”
레이디 스칼렛이 일개 용병대와 감히 비교를 불허하는 터무니없는 액수를 입에 담는다. 작센 공작이나 데일의 상상을 몇 배나 웃도는 대금이었다.
“바로 그 ‘검은 공자’의 재능을 사기 위해, 이 정도 지출을 감수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요.”
그마저 데일의 재능 앞에서는 능히 감수할 수 있다는 듯이.
“그렇지 않나요? 데일 공자님.”
“…….”
데일의, 데일에 의한, 데일을 위한 중장갑 보병대. 블랙아머 컴퍼니를 사겠다는 것은 곧 ‘검은 공자의 재능’을 사는 것이다.
블랙아머 컴퍼니의 명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열세 속에서 그들을 고용하고, 기적 같은 승리를 손에 넣은 무수한 귀족들의 일화를 떠올렸다.
때때로 그 승리는 데일 자신의 무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데일이 자신의 손에 있는 ‘장기 말’을 움직여 얻은 전략의 승리였다.
블랙아머 컴퍼니의 중장갑 보병대 전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의 병력 전체를 지휘하며…… 과감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비수처럼 적 지휘관의 허를 찔러 손에 넣은 승리. 그렇게 데일이 손에 넣은 ‘기적 같은 승리’의 일화는 이미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일찍이 데일이 구상한 것처럼 ‘고객보다 더 강력한 작전 수행 능력’을 보유하고, 전쟁의 승리에 필요한 일체의 작전 과정에 개입하는 활약이야말로 블랙아머 컴퍼니가 갖는 최고의 가치였으니까.
하루가 멀다고 끝없이 울려 퍼지는 데일의 명성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전쟁 대행 주식회사.
지금, 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총사령관으로서 ‘검은 공자’의 재능을 바라고 있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의였다.
* * *
그날 저녁, 작센 공작의 집무실.
“생각 외로 순순히 동의하셨네요.”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제의였다.”
데일의 말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설령 내가 거절하려 해도, 네가 동의하지 않았겠지.”
아버지로서, 그 누구보다 데일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정곡이었다.
“너 역시 평생을 작센 공작령의 동토에 틀어박혀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센 공작이 말을 잇는다.
“그곳에서 직접, 제국의 강자들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데일의 의지와 별개로, 이후에도 제국의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이 기회에 확실하게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강자들,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알겠습니다.”
그것은 작센 공작 나름의 결의였고, 데일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절대로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 * *
밤의 어둠이 깊었다.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 뜻밖의 그림자가 세피아를 가로막았다.
“어머나, 이것 참.”
“…….”
속이 비치는 적색 레이스 가운을 걸치고, 요염하게 미소를 흘리는 핏빛 마녀였다.
“여기서 세피아 양을 뵙게 될 줄이야.”
“……레이디 스칼렛.”
“작센의 공자님에게 밤 시중이라도 들러 가는 길이신가요?”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조롱에, 세피아가 침묵을 지켰다.
“후후, 독점욕에 불타는 암컷의 얼굴이네요.”
스칼렛이 즐겁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천하의 고지식한 엘프가, 그런 암컷의 얼굴을 하게 될 줄이야.”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래서야 더더욱 데일 공자님의 테크닉이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네요.”
세피아는 말없이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그토록 고결하고 도도하기로 이름 높은 스노우 엘프를.”
그럼에도 스칼렛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족의 수치로도 모자라, 인간 어린아이의 밤 시중이나 드는 첩으로 전락시키다니.”
노골적으로 조롱을 감추지 않고.
“어머니…… 수정 여왕께서 무척이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그 이름에 세피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수정의 공주님.”
수정 공주(Cristal Princess). 바로 그때였다. 세피아의 주위로, 얼어붙을 듯 시린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어머나, 무서워라.”
그 모습을 보고 레이디 스칼렛이 황급히 걸음을 물린다.
“당장 제 앞에서 사라지십시오.”
“후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짐짓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그럼 두 사람의 오붓한 밤을 위해, 방해자는 이쯤에서 조용히 사라져 드리죠.”
그대로 등을 돌리며, 레이디 스칼렛이 복도 너머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피아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감출 수 없는 동요 속에서 입술을 깨물며.
* * *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데일의 12살 생일이 지날 즈음.
제국 전역에 소집령을 내려, 도합 40,000명에 가까운 제국군의 대부대가 결집했다.
작센의 데일, 검은 공자가 이끄는 ‘블랙아머 컴퍼니’ 역시 공식적으로 제국군의 대규모 파병에 가세했다. 어느덧 500명 규모의 중장갑 보병대로 불어나서.
아울러 ‘블랙아머 컴퍼니의 장교’로, 샬롯을 비롯한 작센 가의 오러 나이트 일부가 추가로 합류했다.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들의 대장, 작센의 데일을 보좌하기 위해서.
제국군의 대부대가, 비로소 브리타니아 섬을 향해 상륙을 시작했다.
구국의 기수, 성처녀 오렐리아의 이름 아래 결집한 브리타니아 독립군에 맞서.
* * *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시고.”
시스티나 자매신의 동상 앞. 손에 들린 십자가 목걸이를 쥐고, 성처녀 오렐리아가 무릎을 꿇었다.
“오직 제가 지켜야 할 이들에게 자비와 자애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황금이나 빛나는 보석 장식 하나 없이, 나무를 깎아서 조각한 십자가였다.
일찍이 신심 깊은 그녀의 아버지가 준 생일 선물.
“대륙에서, 제국군의 대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첩보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부관 기사 ‘질 드 레’가 예배당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군의 대규모 파병. 일찍이 모두가 우려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아울러 작센 가의 ‘검은 공자’가 제국군의 지휘관 중 하나로 참전했다는 듯합니다.”
브리타니아 섬에는 비교적 대륙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루가 멀다고 그 이름이 울려 퍼지는 작센 가의 장남에 대해서는, 그녀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일개 어린아이에게 그 같은 중책을 맡기다니.”
질 드 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역시 일개 ‘농노의 딸’에 불과했습니다.”
“서, 성처녀님…….”
“겉으로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처녀 오렐리아의 표정에는 일말의 방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작센 가의 장남이 아무리 어리다고 해서, 우리가 방심할 이유는 되지 못하지요.”
올해 12살의 어린아이와 농노의 딸. 어느 누가 감히 성처녀를 일개 농노의 딸이라며 무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작센 가의 장남, 검은 공자 역시 예외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