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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65화 (65/301)

65화

* * *

밤의 어둠 속에서 데일이 의식을 차렸을 때, 그곳은 무척이나 익숙한 세계였다.

“드디어 나를 보러 와줬구나?”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칠흑의 드레스 자락을 나부끼며, 시린 냉기의 세계 위를 뛰놀며.

“기다리고 있었어, 오빠.”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미소와 함께.

그 미소를 보며, 일찍이 아버지 흑색공이 말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리의 세계를 알고 있나?”

9서클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닿아야 하는 금기의 영역.

“꺄하하하!”

그 말에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무엇이 그렇게 웃기지?”

데일의 되물음에, 배를 잡고 웃으며 소녀가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게 말이지.”

웃겨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나, 바로 그 세계에서 태어났으니까.”

“……!”

데일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산양의 서』는 그저 일개 마도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상의 화신 역시, 일개 마법사의 사상으로 창조한 아바타가 아니다.

불사공 프레데릭 역시, 진리의 세계에 닿았다는 것일까.

그럼 지금까지 대체 몇 명의 마법사들이 그 영역에 도달했으며, 그러나 어째서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아직도 ‘9서클의 마법사’가 나타나지 않았나.

“그럼 너도…….”

데일이 다시금 되물었다.

“그 세계에 있는 악마의 하나였나?”

“악마? 그게 뭐야?”

소녀가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갸웃거리고 나서, 소녀가 대답했다. 흡사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싸늘한 조소를 흘리며.

─ 사상의 굴레에 묶여 있는 필멸자 따위가, 감히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

지금까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소녀의 치맛자락 밑에서 촉수들이 솟구치며, 데일의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어둠이.

“있지, 나.”

소녀가 데일의 품을 향해 다가섰다.

“오빠가 좋아.”

어린 소녀가 데일을 향해 포옹하며,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오빠의 고독도, 외로움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열락과 집착에 가득 차 있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내가 오빠의 곁에 있어 줄게.”

그러나 데일을 포옹하고 있는 소녀의 몸에서, 따스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의 말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있어 줄게.”

차갑고 시린 냉기와 어둠이, 심장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감각.

“……너의 이름이 뭐지?”

그 감각 속에서, 데일이 되물었다.

“슈브(Shub).”

“슈브…….”

대답과 함께, 다시금 강풍이 휘몰아쳤다. 도저히 두 다리를 디디고 유지할 수 없는 강풍이었다.

바람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데일이 있는 곳은 그의 침실이었다.

심장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세 개의 서클이 휘감고 있는 심장.

‘세 개의 서클……?’

아니,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깨달았다. 아직 완전하게 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그러나 세 개의 서클 위로, 확실하게 새겨져 있는 ‘서클의 조각’이. 아울러 바로 그 조각을 옥죄고 있는 촉수의 존재가.

3서클 마스터의 마법사로서, 어느덧 4서클의 경지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물 남짓에 3서클에 도달하는 것조차 경이에 가까운 재능이며, 그 후 재능 없는 자들의 경우 일평생을 바쳐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 4서클의 경지다.

그리고 바로 그 4서클을, 고작 11살의 어린아이가 코앞에 두고 있다.

그야말로 제국 제일의 재능이란 말조차 부족한 성장세였다.

* * *

얼마 후, 요네스 경을 비롯한 중장갑 보병대의 병영.

“크으, 술맛 조오타!”

“죽도록 구르고 나서 마시는 이 맛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식사도 빵빵하고, 뺑뺑이 치는 보람이 있습니다!”

“크하하, 매일같이 고기를 뜯을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좋은 병사를 육성하는 것은 좋은 전투마를 육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저 마구잡이로 굴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양질의 식사를 비롯한 체계적 관리가 필요하니까.

일개 용병 생활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호사.

하루가 멀다고 불어나는 몸집과 실력에서, 추레한 용병의 행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여 명의 중장갑 보병대.

개개의 무력 자체는 기사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나, 체계적으로 잡혀 있는 방어 태세는 기병 돌격조차 저지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역시 공작 가의 장남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그러게 말이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용병들이 그들의 대장을 화제로 꺼냈다. 요네스 경이 술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자기 잘나는 맛에 사는 재수 없는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고, 우리 부대장. 애새끼한테 처 발렸다고 징징대시는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용병 하나가 술을 들이켜며 낄낄거렸다.

“시끄러,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리고 일찍이 ‘검은 공자’가 전장에서 보여준 모습들을 떠올렸다.

“그게 어딜 봐서 보통 애새끼냐?”

“그도 그럴 게, 바로 그 제국 제일의 천재가 아닙니까!”

“요네스 경이 대수겠습니까. 천하의 밤까마귀 기사들도 쩔쩔매는 게 대장이신데.”

그날, 마족 대이동에 맞서 홀로 오크 워로드를 압살하는 그 모습.

나아가 공작성이 흑색 마탑의 장로에 의해 습격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일백의 용병대가 부랴부랴 무장하고 밤까마귀 기사들과 함께 전투를 치를 때였다.

그곳에서, 요네스 경은 무자비하게 적들을 도륙하는 ‘작센 공작 가의 괴물들’을 보았다.

바로 그 괴물들이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충성하고 무릎을 꿇는 존재.

그것은 제국 제일의 재능이라거나, 천재 따위로 오롯이 형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부조리의 화신.

“……뭐, 우리야.”

그 모습에 요네스 경의 부하 용병들이 말을 받았다.

“잘 굴리고, 잘 먹여주고, 잘 입혀주는 상관이 최고죠.”

“바로 그 작센 가의 장남이 우리 대장 아닙니까!”

“역시 줄 잘 타는 게 장땡이야.”

“대장을 위하여!”

“대장에게 개처럼 처발린 부대장님을 위하여!”

밤까마귀 기사들의 교육이 아무리 가혹하고 혹독하다 할지라도, 용병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일말의 규율이나 군기(軍紀)조차 없이 수행을 게을리하는 하루살이들이 전장에서 맞이할 최후에 대해서.

그렇기에 밤까마귀 기사들의 혹독한 가르침이 갖는 가치 역시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부족함 없는 호사스러운 식사, 나아가 일개 용병으로서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중장(重裝)의 갑주들까지 제공되고 있다.

천하의 ‘검은 공자’가 직접 공을 들여 육성하고 있는 일백의 중장갑 보병대.

“게다가 거시기에 털까지 났다니, 이미 어엿한 남자가 아닙니까!”

“크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그놈의 거시기 이야기는 도대체 몇 절을 하려고 그러냐?”

상스러운 용병들의 농담 앞에서, 무척이나 귀에 익은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깊어, 두 발로 부하들의 병영까지 찾아오기를 망설이지 않는 중장갑 보병대의 대장이.

밤바람에 흑색의 서코트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대, 대, 대장님!”

그들의 새 대장,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용병들의 표정이 사색으로 얼어붙었다. 재차 어색하기 그지없는 정적이 내려앉았고, 그러나 데일은 개의치 않았다.

덤덤히 그들 사이로 들어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요네스 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술 받아라.”

“……네.”

참으로 어색하게, 데일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고.

“쭉 들이켜라.”

“……네.”

정적이 내려앉았다.

“장로들의 데스나이트에 맞서, 너희들이 보여준 활약을 기억하고 있다.”

“대장과 작센 가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지요!”

정적 끝에 용병 하나가 소리쳤고, 데일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부대 이름을 정해야 하겠는데.”

당초 이들이 사용한 것은 케넷 용병대라는 다소 맥빠지는 이름이었다.

하급 귀족이 자신의 명성을 알리기 위해 가명(家名)을 쓰는 것은 쉬이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그 경우가 ‘공작 가’일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공작 가의 이름을 함부로 남발하는 것은 여러모로 리스크가 크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블랙아머 컴퍼니’다.”

그리고 작센 가의 흑색 갑주를 걸치고 있는 일백 명의 중장갑 보병대가 그곳에 있었다. 흑갑(黑鉀). 작센 가를 상징하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이름.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고객의 광범위하기 그지없는 요구 일체를 총괄하는 무장 조직. 전쟁 대행 주식회사.

대륙 제일의 군사기업(PMC)으로 거듭날 그 이름을.

“오오, 블랙아머 컴퍼니!”

“블랙아머를 위하여!”

“대장을 위하여!”

그 이름에 용병들이 아이처럼 들뜨며 소리를 높였다.

* * *

“블랙아머 컴퍼니라고?”

작센 공작의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용병대 따위를 육성할 생각이냐?”

“일개 용병대 따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고객보다 더 강력한 작전 수행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용병 조직입니다.”

“고객보다 더 강력한 작전 수행 능력?”

뜻밖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개 용병들의 경우, 그저 고용주의 명령에 따라 병력을 충당하는 머릿수 채우기에 불과하지요.”

설령 그들이 아무리 강력하고 명성 있는 용병이라 할지라도, 그 개념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저희 블랙아머 컴퍼니가 팔고자 하는 상품은 ‘병사’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팔겠다는 거냐?”

데일이 대답했다.

“전쟁의 승리이지요.”

전투조차 아니다. 전쟁의 승리.

“고객의 의뢰를 받아, 고객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로 하는 일체의 작전 과정’에 개입할 겁니다.”

철저한 전쟁의 프로페셔널로서, 일체의 작전 과정에 개입하는 것.

대개 일개 용병 따위에게 귀족이 그들의 프라이드를 내놓을 리가 없다. 전쟁의 주요 전략이나 작술 등을 계획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고, 용병의 존재 가치는 그저 그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졸병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그 터무니없는 구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최후의 조각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작센 가의 장남으로서, 그들 역시 위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하급 귀족이나 차남은 모를까, 대제후의 장남이 직접 용병대를 이끄는 것은 드물다 못해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작센 공작 가의 후계자, 대륙 제일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검은 공자’가 아니었나!

데일의 재능이란 검이나 마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개개의 역량을 넘어, 데일이 보여주는 터무니없는 전략과 군사(軍師)로서의 재능.

전쟁의 천재.

그렇기에 데일이 다시금 ‘블랙아머 컴퍼니’의 구상을 설명했다. 그야말로 투자자 앞에서 사업 상세를 설명하듯이.

용병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받아들여 최고의 정예로 육성하고, 전투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임무를 수행할 자금과 여력을 확보하는 것.

아울러 유기적 제병합동 전술을 위해, 작센 가의 기병 전력을 보충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했다. 거기에는 두말할 것 없이 작센 공작 가의 이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떠십니까?”

데일이 다시금 물었다.

“능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투자라고 생각하는데요.”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조직의 형태구나.”

데일의 말에, 작센 공작이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전쟁 그 자체를 대행해주는 용병대라…….”

마침 데일의 수행에 있어 전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작센 공작으로서도 마다할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투자 규모’ 앞에서는, 데일조차 놀라움에 숨을 삼켜야 했다.

‘역시 수저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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