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소요가 끝나고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흑색 마탑주의 이름으로 강경파가 소탕되고, 남아 있는 장로들 역시 충성의 맹세를 올렸다. 다시금 네크로폴리스의 흑색 마탑에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흑색공의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거역하는 자들의 피와 시체 위로 쌓아 올린 철혈의 통치.
나아가 핏빛공의 아들 ‘레이 유리스’는 황도로 돌아갔으며, 데일 역시 끝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모처럼 작센 공작령에 찾아온 평화를 뒤로하고, 제국의 폭정에 맞서 침묵을 깨트리는 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대륙의 동쪽 끝.
칼레 해협 너머, 일찍이 네 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루어진 브리타니아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이계의 용사를 앞세워 통일 전쟁을 시작했을 때, 왕국이 멸망하고 제국의 속주로 전락할 당시…… 오렐리아는 그저 일개 농노의 딸에 불과했다.
전쟁으로 가족과 나라를 잃고,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절망하는 소녀.
제국의 통일 전쟁이 끝나고, 그로부터 몇 해 뒤.
일개 농노의 딸, 오렐리아를 향해 ‘시스티나 자매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너에게 힘을 줄 터이니, 브리타니아 왕국을 제국의 어둠으로부터 구하거라.
시스티나 자매신의 계시. 동시에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계시의 증거’가 오렐리아를 향해 내려졌다.
일개 농노의 딸에게, 기사가 일평생을 갈고닦아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일컬어지는 경지가 펼쳐졌다.
아바타(Avatar).
그 즉시, 오렐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기꺼이 구국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하며 검을 쥐었다.
여신의 강림이라 일컬어지는 성처녀 오렐리아.
폭정을 일삼는 제국에 맞서 기꺼이 레지스탕스의 지도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녀의 카리스마에 이끌린 망국의 애국자들이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제국으로부터 그녀의 조국, 브리타니아 왕국을 수복하기 위한 독립 전쟁의 막이 올랐다.
* * *
데스나이트의 흑검이 휘둘러졌다. 제국 제일의 천재, 작센의 데일이 조종하고 있는 불사의 기사.
그리고 그 검에 맞서, 흑검을 휘두르는 소녀가 있었다.
밤까마귀 기사의 흑색 갑주에 대검을 쥐고 있는 소녀, 샬롯이 데일의 데스나이트에 맞서 검을 맞부딪쳤다.
그즈음,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이 매진하고 있는 ‘새로운 수행’의 방법이었다.
데일이 정교하게 데스나이트에 자신의 검술을 투영하는 법을 가다듬고, 그에 맞서 샬롯 역시 어엿한 기사로서 맞부딪쳐 검의 실력을 갈고닦는다.
놀랍다 못해 충격적일 정도의 수행 방법.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일의 파격 앞에서, 작센 공작 가의 기사들은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검의 수행과 사령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수행.
후웅!
일찍이 용사의 무위(武威)를 칼끝에 싣고서, 데일의 데스나이트가 빠르게 쇄도했다. 휘둘러지는 일격을 샬롯의 흑검이 매끄럽게 받아쳤다. 받아치고 역습을 넣기 위해 파고들었다. 작센 가의 대검을 흡사 레이피어처럼 경쾌하게 다루며.
두 자루의 흑색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에서 격돌하고, 또 격돌하며 끝없이 맞물렸다.
검의 천재.
비록 데일이 아직은 데스나이트에게 100%의 검술을 투영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동등하다 못해 우위를 점하는 샬롯의 실력은 그야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어린 나이에 ‘오러 나이트’의 경지를 손에 넣은 샬롯의 성장세란, 데일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샬롯의 성장에 보다 박차를 가하기 위해, 작센 가 최고 기사들이 달라붙어 최고의 영재 교육을 베풀고 있다.
당장 북부 최강의 기사,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그녀의 스승이었으니까.
그저 검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데일이 그러했듯, 샬롯은 이미 헬무트 경에게서 군사를 지휘하는 병법 역시 수학하고 있었다.
데일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하며, 훗날 그녀의 검으로 지휘하게 될 작센 가의 기사들을 이끌기 위해서.
* * *
믿을 수 없는 승리였다.
그야말로 여신의 가호 없이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
그렇기에 성처녀 오렐리아의 곁을 보좌하는 고위 기사 ‘질 드 레’는 북받치는 신앙심을 참지 못했다.
네 배가 넘는 전력 차였다.
성처녀가 지휘하는 10,000명의 브리타니아 독립군.
그에 맞서는 것은 대륙에서 추가 파병을 통해 상륙한 40,000명의 제국군이었고, 거기에 5,000명의 쇠뇌 용병들까지 고용했다. 하물며 기병이나 중장보병을 비롯한 고급 병과의 비율조차 제국의 압도적 우세였다.
독립군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제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성처녀 오렐리아는 바로 그 전투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었다.
고작 10,000명의 브리타니아 독립군이, 도합 45,000명의 제국군을 격파한 것이다.
‘성처녀 오렐리아’가 보여준 것은 시스티나 여신의 축복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천재적 전략.
구릉지 위에 양익(兩翼) V자로 장궁병을 배치하고,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해, 정확한 부대 배치를 바탕으로 돌격하는 제국군의 중장기병대를 말 그대로 몰살시켜 버렸다.
그들의 움직임이나 작전 체계를 정확히 읽고 있는 듯이.
아울러 ‘규격 외의 힘’을 통해 전황을 뒤집으려는 강자들이 나타났을 때조차, 그들에 맞서는 것은 성처녀 오렐리아의 몫이었다.
저것이 정녕 일평생 검을 쥐어본 일조차 없는 농노의 딸이 맞는가?
일체의 군사적 교육조차 받지 않은 소녀가,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격돌하는 회전의 총사령관이 되어, 압도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손에 넣는다고?
이것은 정녕 여신의 뜻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다.
“성처녀 오렐리아를 위하여!”
“성처녀께서, 시스티나 자매신의 자비와 자애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
북받치는 신앙심을 뒤로하고 기사 ‘질 드 레’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순백의 갑주로 무장하고, 브리타니아 왕국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는 구국(救國)의 기수를 향하여.
성처녀와 함께하는 병사들의 사기 역시 이루 말할 지경이 아니었다.
“모두 경들의 활약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속에서 구국의 기수 ‘오렐리아’가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겸허하게, 그녀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리며.
“부디 당당하게 어깨를 펴세요.”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그녀의 금발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일개 농노의 딸이라고 믿을 수 없는 고결한 미색의 소녀. 감히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순결함의 여기사.
“아, 아아, 성처녀시여…….”
제국을 상대로, 성처녀 오렐리아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이었다.
* * *
그날 밤. 수행을 마친 샬롯이 비로소 흑색 갑주를 벗고 공작성의 중정으로 나왔을 때.
“샬롯.”
“데, 데일!”
뜻밖의 모습에, 샬롯이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을 가려줄 흑색 투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 아직도 있었어?”
수줍게 물들어 있는 두 뺨을 애써 감추며 샬롯이 되물었다.
“왜, 비켜줄까?”
데일이 무심하게 되물었고, 그 무심함에 샬롯이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그, 그 뜻이 아니잖아!”
“그럼 곁에 있어 달라는 뜻이야?”
“이 바보!”
데일의 말에 샬롯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저 그녀의 곁에 있는 이 남자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그날, 그녀에게 내밀어준 그 손길의 따스함이 잊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강해지고 싶었다. 지금 이상으로 데일의 곁을 지켜줄 강함이 필요했다.
“……나, 더 강해지고 싶어.”
침묵 끝에 샬롯이 말했다. 데일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매일 밤낮으로 주군을 위해 검을 갈고닦는 그녀의 노력을, 데일 역시 모를 리가 없다.
“으응, 아니야.”
그럼에도 샬롯이 고개를 젓는다.
“더, 더 강해질 거야.”
자신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륙 최강의 기사가 될 때까지.”
신검(神劍). 대륙 제일검.
샬롯이 결의를 다졌고,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조용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움찔, 샬롯의 하얗고 가느다란 어깨가 떨린다. 갑주 속으로 숨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발가벗겨진 소녀처럼 부끄럽게 느껴졌다.
“강해질 수 있어.”
데일이 말했다. 샬롯의 손을 마주 잡고, 그녀가 품고 있을 소녀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며.
“네 검이 어디까지 닿게 될지, 나도 궁금해서 못 참을 지경이니까.”
어디까지나 그녀의 주군으로서 덤덤하게.
“……응.”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 속에 가려지지 않고, 데일 앞에서 수줍게 물들어 있는 두 뺨이…… 흡사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처럼 부끄럽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앞에서, 보여줄 수 없는 치부를 엿보이듯이. 가슴이 콩닥콩닥 뜨겁게 뛰고 있었다.
“있지, 데일.”
그렇기에 흡사 어쩔 수 없는 감정의 격랑에 이끌리듯, 샬롯이 입을 열었다.
“응?”
샬롯이 그녀의 금발을 쓸어넘기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쪽.
데일의 뺨을 향해, 어린 소녀의 순수한 입맞춤이었다.
“샬롯…….”
“어, 어디까지나 감사의 키스니까!”
샬롯이 두 뺨을 붉히며, 애써 덤덤하게 소리쳤다.
“그, 너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고, 여러 가지로 빚도 졌으니까……! 그, 특별히 서비스해준 거야!”
“그래?”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데일이 미소 지었다. 마치 어린 소녀의 치기 어린 감정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고마워.”
“으, 읏…….”
데일의 말에 샬롯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물고 나서, 샬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달라졌네.”
“내가?”
“응.”
뜻밖의 말에,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랄까, 조금 더 여유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성장했다고 해야 하나…….”
샬롯이 말했다. 성장. 검이나 마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뜻밖의 말에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응, 고마워.”
“나야말로 더 고맙지.”
데일이 말했고, 샬롯이 수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잡고 있는 손의 따스함을 느끼며.
말없이 시린 밤하늘의 공기 아래에서, 함께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 * *
그날 밤, 데일의 침실.
샬롯과의 추억을 뒤로하고,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내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날, 아버지 흑색공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제국과 핏빛공의 야망 역시, 이대로 멈출 리가 없겠지.’
그 말대로다. 일찍이 핏빛공이 차기 ‘흑색 마탑주’로서 데일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유. 새로운 흑적의 유대.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하나였다.
‘제국은 다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실험을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을 위해 흘리게 될 피와 고통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으리라. 악마의 부대라 불린 흑적 교도대가 그러했듯이.
‘제국이 다시금 그와 같은 악업을 거듭하지 않도록.’
‘네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작센 공작 가의 공작과 후계자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의 정의를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너에게, 일찍이 그 세계에서 손에 넣은 힘을 가르쳐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