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 *
네크로폴리스에서의 일을 뒤로하고, 흑색공이 다급하게 말을 달려 그의 성으로 돌아왔을 때.
공작성 대회당의 옥좌, 바로 그곳에 그의 아들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작센 공작을 위해 존재해야 할 옥좌에 앉아 ‘검은 공자’가 그의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아버지.”
“데일.”
두 부자가,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았다.
스릉!
“삼가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무덤의 수호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들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어머니와 리제는 무사합니다.”
데일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리제를 달래주고 나서, 겨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래.”
흑색공이 덤덤히 말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어쨌거나 이곳, 작센 공작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그의 성이 습격당할 때, 성주(城主)로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아들이, 보란 듯이 작센 가의 성을 지켜냈다.
그의 이름으로 작센 공작 가의 사람들을 이끌며. 지켜내고 나서, 성의 옥좌에 앉아 있다.
“공작 각하.”
데일이 작센 공작을 위한 옥좌에서 나직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이 자리에 앉을 때가 아니란 듯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까?”
몸을 일으키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작센 공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작센 공작성의 최상층. 흑색공의 집무실.
창밖으로 어둑새벽의 미명이 스며들었고, 작센 공작이 그곳에 있었다. 역광으로 쏟아지는 새벽 어스름을 등지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구나.”
“성을 습격한 흑색 마탑의 장로와 맞서,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데일이 말했다. 그 모습에 일순, 흑색공의 표정에 동요가 어렸다.
“……홀로 6서클의 마법사와 맞서 이겼다는 말이냐?”
아무리 데일의 터무니없는 재능을 고려할지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흑색 마탑의 장로, 그것도 6서클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마법사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 제일의 재능이란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영역. 그러나 데일에게는 이 이상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달리 부정하는 일 없이,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그와 맞서며, 일찍이 그가 흑적 교도대의 부대장으로서 쌓아 올린 사상의 세계를 엿보았습니다.”
“…….”
마법사의 심상.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마의 부대, 흑적 교도대의 악행.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흑적 교도대의 실체에 대해 듣고 말았지요.”
“…….”
제국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감추고자 하는 진짜 목적을.
“흑적 교도대의 제2부대장, 작센 공작 각하.”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의 과거, 도망칠 수 없는 죄악의 굴레를 입에 담으며.
“제 앞에서 해주신 그 말씀들, 그 모두가 거짓말이었습니까?”
일찍이 그가 말해준 생의 무게를 떠올리며.
“아버지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들 모두가, 결국 추악하기 그지없는 위선(僞善)에 불과했습니까?”
데일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의 동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일개 남이 아니었다. 데일을 낳고 길러준 혈육.
절대 제국의 정의를 긍정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아버지 역시, 결국 제국의 추악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였습니까?”
“…….”
침묵이 내려앉았다. 더없이 무겁고 무거워서, 그 무게를 헤아릴 수 없는 침묵이었다.
“그날, 이계의 용사를 필두로 제국의 대부대가 마왕과 일전을 치렀을 때.”
침묵 끝에, 작센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제국 제일의 강자들이 모여, 비로소 마왕을 쓰러뜨렸을 때…… 어느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마왕을 토벌하고 나서, 제국의 부대가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사이. 어느 남자가 북부의 지배자를 찾았다.
“유리스 후작이었습니까?”
“그가 나에게 제의를 했지.”
작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모종의 대규모 실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에 협력해달라는 제의였다.”
“그 실험이란 것이…….”
“9서클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흑적 교도대는 처음부터 오롯이 그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부대였다.
“내가 그 제의를 거부할 경우, 마왕을 쓰러뜨리고 나서 북부에 집결해 있는 제국군을 움직여…… 북부 공작령 일대를 무너뜨리겠다고 겁박했지.”
“…….”
“나에게 마왕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그대로 부대의 기수를 돌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천하의 흑색공이 제국의 겁박 따위에 굴복하다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웃을 수 없었다.
마왕을 토벌하겠다는 대의 아래, 작센 공작령에 집결해 있는 제국의 대부대.
작센 공작이라 할지라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대의였고, 그곳에 집결해 있는 강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핏빛공, 백색공, 성검사, 귀검(鬼劍), 그리고…… 이계의 용사.
과거의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천하의 흑색공이라 할지라도 홀로 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들이, 어디까지나 마왕을 토벌하고 마족의 위협에서 제국을 구하겠다는 대의 아래.
그들이 작센 공작령의 심장까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저항 같은 것은 무의미하리라.
“그래서 그들의 제의를 수락했습니까?”
“교황을 비롯해 백색 마탑의 장로들이 입회했고, 실험의 상세와 더불어 그에게 협력하겠다는 기아스를 새겼지.”
맹약의 구속, 기아스(Geas). 백색 마탑이 자랑하는 절대 계약 마법. 그것도 백색 마탑주를 비롯해 장로 모두가 힘을 합쳐 새겨넣은 기아스다.
“그래서 흑적 교도대의 어둠에 협력하신 겁니까? 작센 공작령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
마음 먹을 경우, 필사적으로 그를 옹호하려 할 수도 있었다.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며, 흑색공조차 결국 힘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자에 불과했다고.
그렇기에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이 내려앉았다.
“죽음을 결사하고 그들과 맞설 수도 있었다.”
침묵 끝에 흑색공이 말했다.
“설령 승리하지 못할지라도 ‘데스 오더’를 비롯한 일체의 힘을 사용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새겨넣는 것까지는 가능했겠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우습게도…… 엘레나의 모습이 떠오르더구나.”
엘레나, 데일의 어머니. 작센 공작이 사랑하는 여자.
“그래서 굴복하셨습니까?”
작센 공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엘레나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데일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나약함이었다.
“나와 그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작센 공작과 그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
“그래서 흑적 교도대의 실험에 협력했다. 제국과 적색 마탑 앞에 무릎 꿇고, 힘의 정의 앞에 굴종하며, 비겁하고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렸지.”
작센 공작이 자조하듯 말을 잇는다.
“힘과 진리를 추구하는 흑적의 유대를 통해, 9서클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9서클을 이루기 위한 금기의 실험.
“고통과 절망의 사념을 특수 결계에 응축시켜…….”
바로 그 실험의 내용이, 흑색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비롯되는 부정의 에너지를 통해 진리의 세계와 이어지는 게이트를 생성하는 작업이었지.”
“그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9서클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겁니까?”
“확신 같은 것은 없었다.”
흑색공이 대답했다.
“실험의 수립자는 핏빛공이었고, 나는 어디까지나 협력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흑색 마탑, 나아가 흑색공의 힘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실험이었다. 그렇기에 비로소 핏빛공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데일에게 흑적의 새 유대를 강조한 것이다.
흑색공이 아니라, 훗날의 흑색 마탑주로 거듭날 데일에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결국 실험은 실패했다.”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겁니까?”
“아니,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 자체는 성공이었다.”
흑적 교도대의 두 책임자. 동시에 마도의 정점에 서는 다섯 마법사로서, 흑색공과 핏빛공은 그날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럼 어째서 실패한 겁니까?”
사실상 성공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아니었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데일이 되물었고, 흑색공이 대답했다.
“그 남자의 앞을, 내가 가로막았으니까.”
“……!”
“그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악의와 야망으로 가득 차 있는 자가 9서클의 경지를 손에 넣을 경우, 마신(魔神)이라 일컬어지는 경지의 존재로 거듭날 경우.
이 세계에 닥칠 일을, 흑색공 역시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기아스가…….”
흑색공이 핏빛공의 야망을 저지했다는 것은 ‘실험의 협력’을 방해하는 행위였으며, 그 행위에 기아스가 침묵을 지킬 리가 없다. 그것도 흑색공의 심장에 백색 마탑주가 직접 새겨넣은 기아스가 아니었나.
“백색 마탑이 자랑하는 맹약의 구속조차, 그 세계에서는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흑색공이 쓴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진리의 세계를 보았느냐?”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나 이치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그저 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게 다였지.”
마법사들이 그토록 갈구해 마지않는 진리를 코앞에 두고, 닿지 못했다.
“핏빛공을 상대로 맞서 승리하신 겁니까?”
데일의 물음에, 흑색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 세계에서는 핏빛공조차 흑색공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럼 어째서, 아버지께서는 그 세계에서 아무것도 얻지 않고 나오신 겁니까?”
데일이 되물었다. 그 물음에 흑색공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무심코 그의 옛 친우를 떠올리며.
“내가 일찍이 그 세계에서…….”
똑같은 물음이었고, 그렇기에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로 아무것도 손에 넣지 않고 돌아왔다고 생각하느냐?”
* * *
새벽녘의 동이 텄고, 작센 공작은 공작 부부의 침실에 있었다.
잠들어 있는 아내 엘레나와 두 부부의 딸, 리제. 사랑스러운 그의 가족.
그의 전부를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들.
그날, 희고 어두운 겨울밤. 그의 아들, 데일이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엘레나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시에 흑적 교도대의 어둠, 그 끔찍한 생지옥을 떠올렸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들.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어둠.
수레바퀴는 이미 움직였고, 되돌릴 수 있는 것 따위는 무엇 하나 없다.
그렇기에 진리의 세계 너머에서, 그가 손에 넣은 것을 떠올렸다.
피와 광기로 미쳐 있는 제국에 맞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나아가 과거의 죄악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침으로써.
그날, 그곳에서 핏빛공을 뒤로하고 작센 공작은 악마와 거래를 했다. 알기 쉬운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하물며 백색 마탑이 줄기차게 부르짖는 마족이나 마왕 같은 존재조차 아니었다.
사상경계의 저 너머…… 진리의 세계 속에서, 그에게 거래의 손길을 내밀어준 존재.
악마(惡魔)는 정말로 존재했고, 기꺼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희고 어두운 겨울밤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