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60화 (60/301)

60화

* * *

헬무트 경이 홀로 정문을 통해 쏟아져 오는 강경파 장로들의 주력을 저지하는 사이, 그 틈을 타서 작센 공작성의 위층으로 장로 몇 명이 흩어지며 잠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앞을 가로막는 작센 가의 수호자들이 있었다.

“흑색의 대행자……!”

모노클을 빛내고 있는 정장 차림의 여성이었다. 흑색 마탑의 장로 하나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흑색공의 비서,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

아울러 흑색 마탑주의 비서란 것은 결코 ‘일개 비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탑주님에게 대항하는 어리석은 자가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장로 앞에서, 에리스가 씁쓸한 듯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흑색 마탑을 보고도 그깟 소리가 나오느냐!”

그 모습에 흑색 마탑의 장로가 질 수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흑색의 대행자여, 쇠락 끝에 사상이 죽어버린 흑색 마탑과 나약해져 있는 탑주님의 모습이 너에게는 보이지 않느냐!”

“죽어버린 흑색 마탑, 나약해져 있는 탑주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가족의 따스함과 정에 이끌려 흑색 마탑의 정신을 망각하고──.”

바로 그때였다.

“하!”

에리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렇게 웃기지?”

“일개 6서클의 장로 따위가, 감히 흑색 마탑주님의 그릇을 헤아리려 들다니.”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모노클을 차갑게 빛내며.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해서, 그 심성마저 양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게 대체…….”

“아무리 악마가 천사의 탈을 쓰고 정체를 숨겨도, 악마의 날개마저 천사의 깃털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발밑을 중심으로 흑색의 마력을 휘몰아치며, 에리스가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고위계 사멸 : 《사상의 지평선(Event Horizon)》.”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어느덧 ‘죽음의 별’들이 그녀의 주위를 위성처럼 빙글빙글 공전하기 시작했다. 중력을 통해 일체의 것들을 빨아들이고,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다고 일컬어지는 천체. 블랙홀.

“어, 어둠의 공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워서, 자기 입으로는 좀처럼 밝히고 다니는 일이 없으나…….

흑색의 대행자, 나아가 흑색 마탑주의 비서이기 이전에, 일찍이 ‘어둠의 공주’란 이명으로 불린 7서클의 흑마법사로서.

“……어둠에 삼켜지십시오.”

다크 프린세스.

철없는 어린 시절의 소녀심에 휩쓸린 ‘자칭 이명’이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작명 감각 덕에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흑역사였다.

* * *

“이 빌어먹을, 이 빌어먹을……!”

흡사 염혈의 월터처럼 피가 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6서클의 엘프 마법사를 앞에 두고서.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릴 테다!”

피가 끓다 못해, 증발할 지경으로 핏대를 세우고 있는 흑색 마탑의 장로가 소리쳤다.

“고통을 멈추고 죽여달라고 애걸할 때까지, 괴롭히고 또 괴롭혀주마……!”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청색 불협화음》 속에서, 그야말로 처절할 정도의 발버둥과 함께.

“평정을 지켜야 할 마법사가 어째서 그렇게 열을 내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구나.”

그 모습을 보며, 세피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6서클의 수 속성 마법사로서, 그녀를 향해 쏘아지는 마법 일체를 정확하게 저격하고, 하나하나 무위로 되돌리며. 그녀가 자랑하는 무력화 마법을 통해 상대의 움직임 일체를 봉쇄하고, 봉쇄하고, 또 봉쇄하며.

* * *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레이 유리스는 핏빛공의 일개 양아들이 아니었다.

위대한 일족이 쌓아 올린 피의 유지를 계승하는 자. 적색 마탑의 유지를 잇는 자.

《영 블러드(Young Blood)》.

유리스의 일족, 레이 유리스는 그곳에 있었다.

“서, 설마 네놈의 정체는……!”

그 모습을 보고 흑색 마탑의 장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는 출혈을 뒤로하고.

“사악한 자의 피는 싫지 않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나직이 미소 지었다. 입술 주위로 묻어 있는 피를 핥으며, 뾰족하게 솟아 있는 송곳니를 과시하듯 드러내고 있었다.

레이 유리스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유리스의 일족’이 쌓아 올린 피의 역사이자, 혈계(血繼)의 힘이었고, 그것은 일개 부모 자식 사이의 유대와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릴 수는 없지요.”

레이 유리스가 땅을 박차며 쇄도했고, 그것은 오러 나이트의 그것을 능가하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육체 능력이었다. 오러나 마법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종(種)으로서 갖는 압도적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서, 기사 앞에서 거리를 내준 마법사의 결말이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아가 뱀파이어 앞에서 거리를 내준 마법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콰직!

그대로 레이 유리스의 송곳니가 흑탑 장로의 목덜미를 향해 파고들었다. 동시에 체내의 피가 레이의 입속으로 일제히 역류하기 시작했다.

“컥, 커허억!”

뱀파이어의 어금니, 나아가 생체 융합형 아티팩트 ‘용의 턱뼈’를 따라 6서클 흑마법사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이 유리스가 ‘흑적의 교류’를 위해 작센의 동토를 찾은 진짜 목적.

“이것이 6서클 흑마법사의 마력…….”

중얼거리고 나서, 심장에 있는 두 개의 서클을 회전시켰다.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고열의 적색 마력과, 밤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검고 어두운 흑색의 마력을.

불과 어둠.

적흑(赤黑)의 마력이 뒤섞이며, 소용돌이처럼 그의 발밑에서 휘몰아쳤다.

일찍이 데일이 보여준 시린 냉기와 어둠의 마력…… 흑청(黑靑)의 그것처럼.

* * *

“어머니, 리제!”

데일이 성내의 복도를 가로질러, 작센 공작 부부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

“오셨습니까, 공자님!”

그 일실 앞은 성내의 밤까마귀 기사들과 더불어, 철통같은 방어를 자랑하는 요새가 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작센 공작성에 머물며 주군을 수호하는 가신 기사들. 그중에서도 헬무트 경의 뒤를 이어, 밤까마귀 기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최고의 실력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무게를 알고 있기에 평상시 함부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며, 평소 기사들의 수행에도 합석하지 않는 침묵의 기사들. 나아가 ‘침묵의 서약’을 맺고 평생을 작센 공작 가의 그림자가 되기를 맹세한 기사들.

작센 공작 가 직속 최고 친위대.

《그레이브 가드(Grave Guard)》들이, 데일 앞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들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았다.

설령 흑색 마탑의 장로가 사상의 세계를 펼쳐도…… 능히 그 결계를 깨트릴 정도의 경지를 가진 사상검(思想劍)의 실력자.

하나하나가 아바타 능력자, 다시 말해 오러 나이트조차 뛰어넘어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기사들. 기사로서 궁극의 전투 형태를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초상의 능력자들.

하급 영주들 사이의 다툼에 4서클 이상의 마법사와 대량살상마법의 영창이 금지되듯이,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보유하고 있는 ‘아바타 능력자’들의 참전 역시 불가능하다.

너무 커다란 희생을 불러오니까.

그곳 흑백 회전에 참전한 최고 전력이, 베일 경이나 밀바스 경 같은 오러 나이트에서 그친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오러 마스터의 기사, 무덤의 수호자들이 작센 공작 부부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다. 흑색공의 말마따나, 일개 마탑의 장로 몇 명에 무너질 정도로 작센의 성채는 나약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앙, 오빠야!”

느닷없는 소요 속에서, 리제가 겁에 질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을 알기에 너무 어린 그녀조차 작센 공작성 내에 감돌고 있는 불길함을 직감하는 것이다.

“리제, 이리 오렴.”

“오빠야, 나 무서워!”

“무서워하지 마. 겁낼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겁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데일의 어린 여동생. 데일이 다급히 다가서며, 그녀를 포옹해 주었다. 리제가 더더욱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오빠가 지켜줄 테니까.”

“저, 정말로?”

“그럼.”

그 작고 가녀린 생명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에 나직이 입술을 악물었다.

“데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머니.”

숨을 삼키는 엘레나를 향해, 데일이 미소 짓는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데일의 심장을 옥죄었다.

“절대로 저들이 어머니와 리제에게 닿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데일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심장을 옥죄고 있는 ‘칠흑의 촉수’를 뒤로하고.

“헬무트 경께서 적의 주력을 묶고, 그 틈에 윗충으로 침입하고 있는 장로들을 성의 고위 마법사들이 저지하고 있습니다.”

데일의 곁에서, 바스커빌의 베일 경이 보고를 올렸다.

성의 고위 마법사들. 에리스와 세피아를 비롯해, 흑색 마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센 공작 가’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

냉정하게 말해서, 감히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그러나 천에 하나의 가능성을 고려해 작센 가의 기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고, 이곳에 있는 오러 마스터들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 최강의 기사들이 작센 공작의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데일 역시 그들의 손에 일방적으로 지켜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울러 이곳을 지키는 것은 데일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 역할은 바로 이들, 그레이브 가드들의 몫이 될 테니까.

“어머니와 리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데일!”

“고, 공자님!”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

당황하는 엘레나를 뒤로하고, 데일이 작센 가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대로 성내의 어둠 사이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어디까지나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이 되어서, 감히 흑색 마탑주의 체제에게 대항하려 하는 어리석음에 대가를 치러주고자.

* * *

흑적 교도대의 부대장이자, 6서클의 흑마법사 벨로크가 성내의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전쟁 당시, 흑적 교도대의 생체 실험실. 진리의 탐구를 위해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것들이 갖추어져 있는 이상향. 악마의 천국. 그곳에서 도덕 따위에 개의치 않고 쌓아 올린 6서클의 경지와 깨달음을 떠올린다.

바로 그때였다. 성의 복도, 불길하게 일렁이는 그림자 저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밤까마귀 기사……?’

아니었다. 기척은 오직 하나였다.

‘제 발로 걸려들 줄이야!’

그 모습을 보고 벨로크가 쾌재를 내질렀다. 그의 목표이자 사냥감이 그곳에 있었다.

“아, 이것 참. 검은 공자님이 아닙니까.”

흑색공의 아들. 벨로크가 나직이 미소 지었다.

“…….”

그러나 ‘검은 공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형용할 수 없이 불길한 어둠과 침묵 속에서, 그의 심장을 따라 꿈틀거리는 촉수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아직도 자기 처지가 이해되지 않나?”

괴물을 찾은 사냥꾼이 입을 열었다.

“흑색 마탑주의 후계자란 이름이, 그토록 우습게 느껴지나?”

저 흑마법사는 스스로를 괴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렇기에 데일 역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비로소 괴물을 사냥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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