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작센 공작성.
밤이 깊었고 어둠 속에서 그들이 움직였다. 진리의 괴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흑색 마탑의 강경파 장로들이, 흑색의 성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흑색 마탑을 위하여.”
“그리고 흑색 마탑주님을 위하여.”
그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은 오직 하나였다.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꾸리고, 데일이 태어났을 때. 가족의 따스함 속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흑색 마탑주’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흑색 마탑의 사상마저 죽어버렸다.
그렇기에 흑색 마탑주를 나약하게 하는 가족의 따스함을 없애고, 그 시절의 괴물을 되살릴 것이다.
“작센의 엘레나, 작센의 리제, 그리고…….”
“검은 공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설령 데일이 제국 제일의 재능을 갖고 흑색 마탑주의 후계자가 될 재목이라고 해도, 그 아이야말로 ‘흑색공의 나약함’에 있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였으니까.
결의를 마친 흑색 마탑의 강경파 장로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vos liberabit).”
그들의 뒤로 끝없이 늘어서 있는 ‘죽음의 기사’들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데스나이트의 손에 들려 있는 작센 가의 흑검이, 그들이 충성하고 섬겨야 할 공작 가를 향해 검고 창백한 서슬을 내뿜었다.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
흑색의 성전이 시작되었다.
* * *
새벽의 어둠을 틈타 습격이 시작되었다.
* * *
댕, 댕, 댕.
좀처럼 울려 퍼질 일이 없는 작센 공작성의 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적의 기습을 알리는 경보였다.
“적습! 적습이다!”
“일제히 무장하고 습격에 대비하라!”
“당장 전투태세를 갖추고 검을 뽑아라!”
적습. 작센시도 아니고, 시의 중심에 있는 작센 공작성에서 느닷없이 적의 습격을 알리는 경보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아무 의심 없이 작센 공작성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자들.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데스나이트까지.
작센 가가 자랑하는 밤까마귀 기사들이, 그들의 적을 상대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들과 같이 작센 가의 흑색 갑주로 무장하고, 절대 쉬지도 멈추지도 않는 불사의 기사를 상대로.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고 있는 옛 전우(戰友)들을 향해.
* * *
새벽이 깊도록 홀로 검의 수행에 매진하는 소녀가 있었다.
흑색의 갑주로 전신을 꽁꽁 무장하고서, 맞춤 제작한 밤까마귀 기사의 갑주에 작센의 양손 대검을 쥐고 있는 소녀였다.
“…….”
적습을 알리는 성내의 종이 울려 퍼졌을 때, 샬롯에게 주저함 같은 것은 없었다.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은 기사의 역할이 아니다. 기사의 덕목이란 오로지 집행에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중검을 고쳐잡고, 기사로서 그 의무를 집행할 때였다.
검에 있어, 제국 제일의 재능을 가진 소녀가 그녀의 성과를 시험하기 위해.
“기다려, 데일.”
신검(神劍)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 * *
흑색 마탑주의 부재를 틈타 어째서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 작센 공작성을 습격하고 있나.
그 무엇보다 믿음직해야 할 데스나이트가, 어째서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를 향하여 대검을 휘두르고 있나.
필시 흑색공의 체제를 거부하는 흑색 마탑의 강경파들이 모종의 쿠데타를 일으키는 거겠지.
그러나 밤까마귀 기사들의 정점에 서 있는 대륙 칠검, 광검(狂劍) 헬무트 블랙베어 경에게 있어 그것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샬롯 오르하르트가 그러하듯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은 기사의 역할이 아니다.
주군을 위해 그의 검을 휘두르는 것. 적들을 배제하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군과 주군의 혈족을 지키는 것.
집행이다.
그렇기에 광검 헬무트 경이 그의 애검 ‘광기’를 고쳐 잡았다. 감히 작센의 흑검을 쥐고 성내의 복도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데스나이트들, 나아가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흑색 마탑의 장로들을 향해서.
“광검 헬무트……!”
“네놈들이 감히.”
북부 최강의 기사, 헬무트 경이 입을 열었다.
“겁도 없이 나의 주군을 향해 작센의 검을 들이밀고, 자랑스러운 우리 밤까마귀 기사들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체내에 있는 흑색 오러를 폭발하듯 가속하며,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중얼거렸다.
“네까짓 버러지 놈들이 감히, 감히, 감히……!”
천지를 찢는 것 같은 광기 서린 노호와 함께.
“살과 뼈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콰직, 콰직! 우드득!
그와 동시에 무엇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헬무트 경의 흑색 갑주가, 갑주의 강판(鋼板)들이 폭발하듯 거대해지는 육체의 폭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우그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흑색 중장갑 역시 육체의 형태와 함께 뒤틀리고 일그러지며…….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폭주하는 육체와, 흑색 갑주가 융합되고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 마법이란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며, 나아가 ‘고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검(劍)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따라서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은 결코 마법사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기사로서 검과 오러의 극의에 닿아 있는 검객들의 경우, 검에 그들의 사상을 담아 마법사의 그것과 같은 초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고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마법사가 저마다 사상의 세계를 가지듯이.
기사는 그 사상을 오로지 그의 ‘검과 갑주’ 그리고 ‘육체’에 투영함으로써 궁극의 전투 형태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
사상의 갑주.
아바타(Avatar).
칠흑의 강철 갑주와 폭주하는 육체, 나아가 손에 들린 대검이 하나로 융합하며 ‘흑색 중장갑의 괴수’로 거듭나 있는 남자처럼.
사람의 형태를 가진 중장갑 전차가 그곳에 있었다. 칠흑의 오러를 흩뿌리며, 그의 흑색 대검 ‘광기’의 칼자루와 팔이 하나로 융합되어서.
“죽음조차 네놈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흑갑의 괴수가 땅을 박차며 소리쳤다. 육체 일부로 거듭나 있는 ‘흑색 대검’이 휘둘러졌다.
후우웅!
“죽여주마, 네놈들의 육골을 모조리 찢어발겨 주마!”
칠흑의 광전사가 소리쳤다.
쿠웅! 쿠웅!
마치 대형 전차가 사람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장갑차가 일개 보병대를 짓밟으며 돌진하는 것 같은 압도적 위압감이었다.
비유가 아니었다. 헬무트 경의 육체는 흑색 갑주로 이루어진 장갑차 그 자체였으니까.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 자랑하는 데스나이트가 일개 잡병처럼 도륙당하고 있었다.
헬무트 경의 대검 ‘광기’가 휘둘러졌고, 때마다 데스나이트의 육골이 형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어져 나뒹굴었다.
“작센 공작의 미친개가……!”
그 모습을 보고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 혀를 찼다.
끝없이 쏟아지는 데스나이트의 물량 공세조차 그를 어찌하지 못했고,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 쏟아붓는 어둠의 마법조차, 감히 그의 흑색 중장갑을 뚫지 못했다.
6서클 장로의 마법조차 쉽사리 통하지 않는 흑색 갑주의 육체. 마도의 극의에 이르러 있는 마법사들조차 아바타를 사용하는 기사의 앞에서는 그저 ‘일개 마법사’에 불과하다.
아울러 일개 마법사가, 기사에게 거리를 내주었을 때의 결말이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피가 흩뿌려졌다.
흩뿌려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핏빛으로 얼룩져 있는 흑색 갑주의 광전사가 포효했다.
6서클의 흑색 마탑 장로들조차, 그 위압감 앞에서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을 파쇄하며 질주하는 흑갑의 괴수.
그 앞에서,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 일제히 ‘사상의 세계’를 펼쳤다.
작센 공작성을 지키는 북부 제일의 괴수.
애초에 이곳에 있는 장로들의 역할이란, 바로 그 괴수의 발을 묶는 것이었고, 살아서 이길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동지가 성내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마칠 때까지 최대의 전력을 쏟아부어, 이 괴물의 발을 묶는다. 흑색의 성전을 위해 기꺼이 순교자가 될 각오를 다잡으며.
* * *
데일이 성내의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의 손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서.
바로 그때였다.
성의 복도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핏빛공의 양아들, 적색 마탑의 후계자가 그곳에 있었다.
‘레이 유리스……!’
하필 이럴 때. 내심 혀를 차며, 데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내 앞길을 막으러 왔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친구가 아닙니까.”
레이 유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흑색 마탑의 장로들은 여러 곳에서 침입조를 나누어 성내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
“보아하니 주력을 저지하는 것은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몫일 테고…… 그사이 서넛 정도가 성내 위층에 잠입을 시도하고 있겠지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서.
“그리고 저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의 생체 융합형 아티팩트 ‘용의 턱뼈’를 드러내며,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두 개의 서클과 함께.
‘고작 2서클 마법사 따위가 흑색 마탑의 장로를 막겠다고?’
승부조차 성립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핏빛공의 아들이란 것은 거저 얻은 이름이 아닐 것이다.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어쨌거나, 그것은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고맙다.”
그 이상 망설일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레이 유리스를 뒤로하고, 심장을 중심으로 흑청의 마력을 생성하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데일이 지켜야 할 것들. 데일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위해서.
* * *
그 시각, 황도의 적색 마탑.
탑의 최상층에 그 남자가 있었다. 적색 마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 제국 제일의 적마법사라 불리는 핏빛공.
“레이가 잘하고 있을까요?”
유리잔을 따라 넘실거리고 있는 핏빛 액체를 홀짝이며, 핏빛공의 곁에 있는 여성이 입을 열었다. 적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였다.
“두고 봐야 할 일이겠지, 레이디 스칼렛.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어머나. 저는 때때로, 오라버니께서 레이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너무 과하지 않을까 걱정돼요.”
레이디 스칼렛의 말에, 핏빛공이 말없이 그의 손에 들린 핏빛의 액체를 홀짝였다. 포도주가 아니었다.
“음, 맛이 제법 나쁘지 않네요.”
적색 마탑의 최상층. 레이디 스칼렛이 고개를 돌리자, 돼지 도축장처럼 거꾸로 매달린 살덩어리들이 보였다.
갈고리에 매달려 육체의 피가 뚝뚝 흘러내렸고, 그 밑에 놓여 있는 것은 피를 담고 있는 포도주병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짐승의 생피를 취하는 귀족의 악취미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천장의 금속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그 존재들은 결코 돼지가 아니었다. 하물며 죽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이곳에 있는 두 남매가 보기에, 그것은 사람이 도축하는 돼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사람이 소나 돼지를 잡아먹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듯…… 사람 위의 포식자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무엇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먹이사슬의 섭리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