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58화 (58/301)

58화

* * *

“저와의 마법 결투를 의미하는 겁니까?”

“두 마탑의 후계자로서, 아울러 흑적의 교류를 위해, 아울러 마침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이상.”

데일의 물음에, 레이 유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실력을 가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애들의 대수롭지 않을 싸움이겠지요.”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결국 데일 앞에 있는 것은 자기 또래의 아이에 불과하다. 일부러 밑천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이 유리스가 되물었다. 그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두 개의 서클을 가속하며.

‘2서클……?’

나아가 그 서클이 가속하며 생성하고 있는 적색 마력의 홍수에, 데일이 숨을 삼켰다.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는 두 서클의 RPM을 보고 깨달았다.

‘일개 2서클 마법사가 생성할 수 있는 마력량 따위가 아니다.’

게다가 저 나이에 2서클을 이루었다는 것 역시 심상치 않다. 설령 데일의 성장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데일이 시린 냉기와 정제된 어둠으로 고순도의 마력을 다루는 것처럼, 레이가 생성하는 마력에는 흡사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고열을 머금고 있었다.

지옥의 업화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터무니없는 고순도의 적색 마력.

마법사의 역량에 있어 서클의 개수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지표다. 그러나 서클의 개수가 마법사의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다. 당장 3서클 마법사 데일이 그러했고,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가 그러하듯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검은 공자’처럼 대륙 전체에 그 위명이나 활약상이 알려지지 않아도, 핏빛공 유리스 후작의 아들이자 적색 마탑의 후계자란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오히려 그림자 속에 숨어 의도적으로 지키고 있는 침묵이다.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를 꺼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두 개의 서클에서 적색 마력을 생성하며, 레이가 되물었다.

“…….”

그림자 망토. 데일의 흑색 아티팩트가 갖는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데일이 짐짓 놀란 듯 숨을 삼켰다.

“마침 저 역시, 보잘것없는 아티팩트 하나를 갖고 있지요.”

나아가, 레이 유리스가 입을 열었다.

적색 마탑주의 아들이니 아티팩트 두어 개 정도 있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레너드 월터 따위와 달리 그것을 통제할 정도의 역량도 갖추어져 있겠지.

이 세계는 넓다. 그리고 그 넓은 세계에서 레너드 월터처럼 우물 속을 세계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었고, 적어도 데일의 앞에 있는 어린 마법사는 그렇지 않았다.

냉혹할 정도의 실력 지상주의. 그러나 그 실력은 결국 혈통과 재력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함이, 바로 마도의 세계다.

‘그래, 어디 물고 있는 금수저 때깔이나 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이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를 펄럭였다. 어디까지나 탐색전에서 그칠 정도의 요량으로.

“비록 데일 공자님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에 맞서 레이가 자신의 적색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핏빛공의 아들, 레이 유리스의 애장(愛裝)을.

“친구를 잡아먹은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아티팩트를 꺼내기에 앞서 레이가 물었다. 참으로 느닷없는 소리에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저는 있습니다.”

레이가 대답했다. 그날의 생지옥을 떠올리며.

“너무 배가 고프고, 먹을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었지요.”

수십여 명의 아이들이,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그 지하에 있었다. 물도 먹을 것도 없는 그곳에서 함께.

“처음에는 쥐나 벌레를 잡아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쥐나 벌레를 잡아먹는 정도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레이 유리스가 말했다.

“뼈에 붙어 있는 살과 피와 내장을, 뼛속의 골수(骨髓)를, 두개골 속의 뇌와 뇌수를…….”

무엇 하나 남김없이. 레이 유리스의 고해 앞에서,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것은 참으로 맛있고 영양 넘치는 생물이지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 유리스는 이미 자신의 아티팩트를 꺼냈다는 것을.

그의 입이 길게 찢어져, 턱 속으로 십수 열로 줄지어 있는 이빨들이 보였다.

《용의 턱뼈》.

데일이 비로소 숨을 삼켰다.

‘생체 융합형 아티팩트다.’

아티팩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끔찍하며, 돌이킬 수 없는 힘을 제공하는 최악의 형태.

데일 역시 알고 있었다. 당장 데일의 심장에 촉수를 뿌리내리고 있는 마도서 역시, 어느 의미에서 생체 융합형 아티팩트의 일종이니까.

‘저것이 핏빛공의 괴물…….’

괴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일이 무심코 실소를 흘렸다.

“무엇이 웃기지요?”

“그냥.”

데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발밑을 따라 발광하고 있는 그림자의 무리를 통제하며.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데일이 역으로 되물었다.

“…….”

그 모습을 보고, 레이 유리스가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네요.”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주위를 압도하며, 일개 아이들의 철없는 일탈을 제지하듯이.

“흑색공 각하.”

“아버지.”

데일의 아버지,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의 발밑에서 흑색 마력을 과시하듯 휘몰아치며.

어느덧 레이 유리스의 찢어진 입이, 정상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마침 작센 가의 공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레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침 흑색과 적색의 마탑을 계승하게 될 후계자로서 말이지요.”

“…….”

그 말에 흑색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이 깊었다.”

침묵 끝에 흑색공이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쯤에서 돌아가도록 하자꾸나.”

그 이상의 충돌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 * *

그날 밤, 공작 부부의 침실.

“아빠! 돌아오셨어요?”

데일의 여동생, 리제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왔다. 어느덧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드러내고, 나아가 두 발로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꼬마 숙녀가 되어서.

“어머나, 얘도 참.”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 엘레나가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그래, 리제.”

아버지 작센 공작이 상체를 숙이며 어린 리제를 포옹했다. 리제가 아버지의 뺨을 향해 입맞춤했고, 딸의 애교에 흑색공이 묵묵히 미소 지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

나아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자랑스러운 아들까지.

흑색 마탑의 옛 어둠과 결별하고, 아들과 아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자 했다.

그것이 작센 가(家)의 가족들이었고, 흑색공이 가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들이었다.

동시에 그 보물을 지키고자 제국 앞에 굴종하고, 그들의 악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결국 그 역시 제국과 적색 마탑의 정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약자였다.

힘 앞에 비굴하게 굴종하며 자신의 보신(保身)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비겁자.

“엘레나.”

그렇기에 흑색공이 자신의 아내를 향해 말없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미소 지었다.

“참으로 고맙소.”

“어머, 당신도 참.”

그 모습에 엘레나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왜 그래요?”

“…….”

엘레나의 물음에 흑색공이 침묵을 지켰다. 그저 묵묵히 엘레나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몇 모금 들이켜며, 창밖을 바라볼 따름이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밤의 어둠 속을, 그저 묵묵히.

* * *

그로부터 얼마 후. 네크로폴리스, 흑색 마탑의 상층.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흑색 마탑의 고위 장로이자 7서클의 흑마법사 ‘에드거’는 당황하지 않았다.

악마의 부대, 흑적 교도대의 제3부대장. 어릴 적부터 작센 공작과 함께 흑색 마탑에서 수행하며, 경쟁을 아끼지 않은 흑색공의 몇 없는 친우.

“왔나, 앨런.”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감히 함부로 부르지 못할 작센 공작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으며.

“어째서 나를 배신했지?”

작센 공작, 흑색공(Lord Black). 그리고 ‘작센의 앨런’이 되물었다.

“자네는 달라졌어.”

그 물음에 에드거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약해졌지.”

“…….”

“흑색 마탑의 정신을 망각하고, 생명의 무게니 어쩌니 알량하기 그지없는 도덕 따위에 구애받으며…….”

진리의 괴물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날, 우리 흑적 교도대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었어. 아니, 성공했지.”

에드거가 말을 잇는다. 제국이 필사적으로 그 정체를 감추려 하는 흑적 교도대의 진짜 목적을 입에 담으며.

“죽음의 장막 너머…… 자네는 그곳에 있는 ‘진리’에 닿지 않았나.”

흑색 마탑이 그토록 갈구하고 또 갈구하며 찾아온 진리.

“어째서 ‘그 세계’에서 아무것도 갖지 않고 그냥 돌아왔지?

에드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9서클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포기했지?”

흑백적청녹, 오색 마탑의 정점에 서 있는 다섯 마법사조차 감히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

9서클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실험.

에드거의 입에서 숨길 수 없는 진실이 흘러나왔고, 작센 공작의 표정에 동요가 어렸다.

황제가 필사적으로 감추고자 하는 흑적 교도대의 진짜 목적. 나아가 제국이 그토록 무리하며 대륙의 통일 전쟁을 불사한 진짜 이유.

사람의 몸으로 신의 영역에 닿고자 하는 실험.

인조의 신이자 마신(魔神)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

그것을 위해 힘과 진리를 추구하는 두 색의 마탑이 손을 잡았다.

“어째서 신이 되기를 포기했나?”

그 물음에 흑색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배신했나? 나의 옛 친우여.”

침묵 끝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자네 덕에, 나날이 나약해지고 쇠퇴해가는 흑색 마탑을 보게나.”

에드거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밖에 남지 않고, 그 정신마저 죽어버린 이 탑을. 그까짓 생명의 무게 따위에 벌벌 떨고 있는, 흑색 마탑주의 나약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자네를 죽이고 싶지 않네.”

에드거의 말에 앨런이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나를 죽이게 될 걸세.”

7서클의 마법사. 다섯 명의 정점에 이어, 대륙 전체를 통틀어 수십여 명에 지나지 않는 정점의 바로 밑.

“그리고 나는 자네가 다시 그 시절의 괴물로 돌아오기를 바라네.”

“…….”

“무엇이 자네를 그 시절의 괴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나?”

그 시절의 괴물.

“가족을 잃은 슬픔이 자네를 괴물로 바꿀 수 있나?”

에드거의 물음에, 앨런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의 발밑을 중심으로 칠흑의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 보아하니 정곡을 찔린 모양이지.”

비로소 에드거가 미소 지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괴물’ 앞에서.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걸세.”

7서클의 흑마법사, 에드거가 말을 잇는다.

“지금쯤 그들이 자네의 성에 도착했을 테니까.”

“……!”

흑색공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내 엘레나, 딸 리제, 그리고 자랑스러운 아들 데일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무리 자네가 8서클의 흑마법사라고 해도, 지금의 내가 발목을 잡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네.”

흑색 마탑주, 오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다섯 마법사 중 하나.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사상의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흑색공의 세계.

푸드득!

─ 까악! 까악!

흑색공의 등 뒤에서, 몇 마리의 새들이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더없이 검고 불길한 갈까마귀였고, 갈까마귀들의 흑색 깃털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