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 *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의 발밑을 따라 그녀의 세계가 펼쳐졌다.
외부 세계의 개입을 가로막는 마법사들의 이계(異界)이자, 어느 하나가 죽기 전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투기장.
수정색의 지평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동토의 대지였다.
그에 맞서, 염혈의 월터 역시 그의 세계를 전개했다. 6서클 적마법사의 등 뒤로, 그의 심상을 투영하고 있는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외과 병동……?’
아니, 아니다. 세피아의 뒤로 물러나며, 데일이 일순 숨을 삼켰다.
의료용 침대와 병자들, 그리고 그들을 구속하는 쇠사슬과 온갖 끔찍한 도구들이 넘치고 있는 풍경.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아니었다. 제발 죽여달라는 애걸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병동 따위가 아니다.
적색 마탑의 장로, 염혈의 월터. 악마의 부대라 일컬어지는 흑적 교도대의 제6부대장.
월터의 세계는 바로 그 흑적 교도대, 그것도 그가 직접 지휘한 제6부대의 실험실이었다.
적마법사의 생체 실험실.
일찍이 ‘힘과 진리’를 손에 넣기 위하여, 응당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도리마저 저버린 잔학의 상징. 살아 있는 포로를 상대로 온갖 끔찍한 실험이 자행되는 생지옥.
“어째서 나의 이명이 ‘염혈(炎血)’이라 불리는지 알고 있나?”
바로 그 흑적 교도대의 실험실을 뒤로하고, 염혈의 월터가 되물었다. 세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정색 동토를 따라 청색 마력의 기류를 휘몰아칠 따름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피를 끓는점까지 가열할 경우…… 피험자의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나?”
월터가 되물었다. 피험자. 그 말에 데일이 일순 표정을 찌푸린다.
“…….”
“살상 목적으로 최적의 폭발 수식(修飾)을 얻어내기 위해, 몇 명의 포로들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나?”
염혈의 월터가 되물었다. 어느덧 그의 등 뒤에서 무수한 ‘피험자’들이 불꽃에 타오르고 있었다.
피험자마다 불꽃의 세기를 달리해서 불태우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진 화염이 살상용으로 최적의 효율을 발휘할지. 구역질이 나왔다.
“볼트 마법의 수식을 어떻게 배합해야, 최소의 용량으로 최대의 효율이 발휘되는지 알고 있나?”
마법사들의 학술적 탐구와 협력을 위해, 그곳 흑적 교도대의 생체 실험실에서 몇 명의 포로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희생되었을까.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어느 정도의 폭발을 일으켜야 최대의 살상력이 발휘되는지는 알고 있나?”
비록 지금 펼쳐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월터의 마음 속 풍경’에 불과하나, 그 풍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진보란 흘리는 피의 양과 직결되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피로써 굴러가는 법이다.”
월터가 말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광기의 신념 그 자체를.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는 악마가 그곳에 있었다.
“확실히 알았다.”
월터의 말에, 세피아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구제받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란 사실 정도는.”
“무엇을 알았다는 거지?”
염혈의 월터가 되물었다.
“실험을 거듭해 가설을 검증하고, 그 실증적 결과를 바탕으로 지혜의 탑을 쌓아 올리는 것. 그것이 바로 마도의 이치를 탐구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었나? 대의 앞에서, 피를 두려워하는 청색 마탑 따위가, 감히 우리의 정신을 이해할 수는 있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월터의 물음에, 세피아가 침묵을 지켰다.
“이 세상에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룩할 수 있는 발전 따위가 있다고 생각하나?”
“……참으로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짐승의 추악함이구나.”
침묵 끝에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구제할 가치조차 없는 짐승 앞에서, 6서클 엘프 마법사의 힘을 펼치며.
바로 그때, 데일이 세피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데일, 물러서거라……!”
세피아가 당황하며 소리쳤고,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흑색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적탑의 장로가 보여주는 사상의 세계를 마주하고서.
고위 마법사가 펼치는 사상의 세계는 그의 삶 그 자체를 투영하는 마음의 풍경이다. 그리고 저 생지옥의 풍경이 바로, 흑적 교도대의 부대장 ‘염혈의 월터’가 가지는 심상(心想) 그 자체였다.
힘이야말로 이 세상의 절대적 가치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적색 마탑의 사상. 힘을 얻기 위해서 흘리는 피 같은 것은 ‘대의 앞의 희생’에 불과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악마의 믿음.
생체 실험실에서 끝없이 울부짖고 있는 피험자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제발 죽여달라고 애걸하는 울부짖음. 잊을 수 없는 증오의 감정이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적색 마탑과 제국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저 남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스승님 하나가 아닙니다.”
“하, 고작 3서클의 애송이 따위가 이 ‘염혈’에게 맞서려는 것이냐!”
데일의 발밑을 따라 휘몰아치는 흑청(黑靑)의 마력을 보고, 염혈의 월터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의 재능이 조금 뛰어나다고 해서, 감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다니!”
적색 마탑의 장로이자 6서클의 마법사. 그가 보기에 데일은 일개 3서클의 마법사에 불과했고, 격의 차이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보통의 3서클 마법사’로서는 그러하리라.
“지옥불 속에서 네놈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염혈의 월터가, 여섯 개의 서클을 따라 핏빛의 마력을 쏟아냈다. 동시에 생체 실험실의 헤아릴 수 없는 피험자들이 ‘사슬의 구속’에서 풀려났다.
“피, 피, 오로지 피다!”
구속에서 풀려나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피험자들이 일제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불꽃에 휘감겨 발광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좀비 떼처럼 데일과 세피아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오로지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위 마법사가 펼치는 사상의 세계, 그 세계가 보여주는 풍경은 결코 실체 없는 허상 따위가 아니다.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수정색의 지평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동토의 대지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쩌적, 쩍.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토가 갈라지며, 헤아릴 수 없는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하, 겨우 그 정도로 피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으냐!”
염혈의 월터가 손가락을 튕겼고, 피험자들의 육체가 일제히 폭발했다. 피험자를 살아 있는 폭발물로 취급하며, 폭발과 동시에 그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염혈의 월터에게 있어 ‘피’는 세상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도구에 불과했고, 바로 그 피가 세피아의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는 피, 그의 이명을 상징하는 염혈(炎血)이.
“울려 퍼져라.”
그러나 수정의 지평을 뒤로하고, 세피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청아하고 알 수 없는 불쾌함을 가진 화음이 울려 퍼졌다. 청색 마력의 입자들이,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청색 불협화음》.
“불협화음의 거미줄.”
동시에 사방에 흩어져 있는 ‘청색 불협화음’의 입자들이, 거미줄처럼 청색 실을 잇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불꽃의 피가, 청색의 거미줄에 가로막혀 덧없이 사그라들었다.
그 즉시, 데일이 움직였다.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며, 발밑을 따라 일대를 집어삼키는 ‘어둠의 물결’이 홍수처럼 일대를 수몰시켰다.
「키에에에엑!」
그날, 오크 워보스를 쓰러뜨리고 손에 넣은 또 하나의 힘.
두 고위 마법사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 그 경계가 맞물린 일대를 어둠의 호수가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출렁이는 어둠의 호수 밑에서, 침묵 끝에 ‘그림자 잠복자’들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섀도우 러커(Shadow Lurker)》.
“……!”
그 모습을 보고 염혈의 월터가 숨을 삼켰다. 그의 말마따나 ‘일개 3서클 마법사’가 6서클의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상대는 결코 일개 3서클 마법사가 아니었으며, 아울러 월터의 상대는 데일 하나가 아니었다.
“조심하거라, 데일.”
“이렇게 믿음직한 스승님이 제 뒤를 지켜주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세피아의 말에, 데일이 짐짓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청마법사의 특기는 직접 전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마법을 봉쇄하고 무위로 되돌리는 것부터, 철저하게 지키기 위한 방어와 보조 마법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바로 그 청마법사, 그것도 6서클의 엘프 마법사가 데일의 뒤를 지켜주고 있다. 이 이상 믿음직한 엄호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일대를 어둠의 호수로 물들이며, 데일이 땅을 박찼다. 외과 병동을 방불케 하는 지옥도, 염혈의 월터가 펼치고 있는 세계 속으로.
“네깟 애송이 따위가……!”
그 모습을 보고 염혈의 월터가 노호했다.
“타올라라……!”
여섯 개의 서클이 휘몰아치며, 핏빛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미사일 폭격을 내리꽂는 듯한 압도적 화력이, 데일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미사일 폭격에도 불구하고, 데일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플레어.”
등 뒤에서, 세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데일을 향해 내리꽂혀야 할 미사일들이, 엉뚱하기 그지없는 곳으로 표적을 바꾸었다. 세피아의 주위에서 흩날리고 있는 청색 입자에 이끌리듯이. 마치 열추적 미사일을 교란하기 위해 흩뿌리는 미사일 유도체(플레어)처럼.
거리가 좁혀졌고, 그때마다 어둠의 호수 일대가 빠르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사상의 세계를 펼치는 곳은 곧 그의 영토를 의미하며, 제아무리 그림자 망토라 해도 그 영역에 함부로 어둠을 덧씌울 수는 없다. 그러나 적의 영토를 두 발로 밟고 침범할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염혈의 월터가 펼치고 있는 사상의 세계를 향해 데일이 망설임 없이 질주했다.
그때마다 데일의 발밑에서 그림자 호수의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나를 지켜라, 노예들아!”
흑적 교도대의 생체 실험실. 바로 그 실험실에서 끝없이 생성되는 피험자들이, 데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발 죽여달라는 애걸과 함께, 이글거리는 불꽃에 휩싸여서. 그러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월터의 심상 속 이미지에 불과하며,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데일이 ‘그림자 망토’의 칼날을 생성했다. 마법사라고 믿을 수 없는 칼날 세례가 휘몰아쳤고, 피험자들의 육체가 덧없이 조각났다. 그 직후, 피험자의 육체가 일제히 폭발하며 데일을 집어삼켰다.
아니, 집어삼키려 했다.
“청색의 격리(Quarantine).”
세피아가 속삭였고, 데일을 집어삼켜야 할 폭발 세례가 알 수 없는 청색의 입방체 속에 갇혀 들었다.
마법의 감옥.
‘정확하게 좌표를 지정해서 상대의 공격 일체를 격리했다.’
광범위하게 흩뿌려지는 폭발의 범위를 정확하게 지정해서, 데일에게 닿아야 할 공격을 격리시켰다.
“이 망할 청색 창녀가……!”
청색 마탑의 장로, 6서클의 엘프 마법사란 것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다시금 거리가 좁혀졌고, 비로소 월터의 세계가 어둠의 호수로 물들었다. 그림자 속에 잠복하고 있는 ‘섀도우 러커’들의 가시 촉수가 일제히 솟아났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가시 촉수를 앞두고 월터가 불꽃의 장벽을 세워 올렸다. 일찍이 ‘오크 워보스’를 상대할 때처럼 가시 촉수 하나에 일방적으로 당해줄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최적의 수식은 어디에 있지?”
“웃기지 마라, 빌어먹을 애송아!”
데일이 차갑게 되물었다. 염혈의 월터가 발악하며 화력의 세례를 퍼부었다. 그야말로 헬파이어 미사일 폭격을 방불케 하는 화력이 휘몰아쳤고, 그 미사일 폭격이 데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격리 구역 재지정(Reassignment).”
마법 격리. 말 그대로 그것은 마법의 감옥이다. 상대의 마법을 괴리시켜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봉쇄하는 청마법사의 기예. 알기 쉬운 냉기나 수 속성의 마법이 아니었다.
고위 청마법사로서, 상대의 마법 자체를 봉쇄하며 발을 묶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사상의 세계’를 아직 무기의 형태로 활용조차 하지 않고 있다. 비록 그녀가 데일의 엄호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도 있었으나, 냉정하게 말해 격이 달랐다.
엘프 마법사.
6서클이라고 해서 다 같은 6서클이 아니다. 하물며 ‘마나의 사랑을 받는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엘프와 사람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리라.
“……!”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염혈의 월터는 지금, 세피아의 거미줄 속에 걸린 파리나 다름없다는 것을.
동시에 월터의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는 어둠 속에서,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대개 기사와 마법사의 승부는 ‘거리를 허락하는 시점’에서 승패가 갈린다.
아울러 지금 데일이 보여주는 검객으로서의 무위(武威)는 일개 오러 나이트 그 이상의 것이었고, 설령 월터가 6서클의 마법사라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저 정도의 적마법사 앞에서는 제아무리 데일이라 할지라도 쉽게 거리를 좁히기 어렵다.세피아의 엄호가 있기에 가능했고, 그렇게 거리를 허락해준 이상, 승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 오지 마……!”
‘검은 공자’가 그의 앞에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가 기사에게 거리를 내주었을 때’의 결말이, 바로 그곳에 펼쳐졌다.
마법사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를 막아내기 급급했고, 그 허점을 노려 데일이 쇄도했다.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그림자 칼날’이 염혈의 월터를 향해 내리꽂혔다.
촤아악!
살점이 찢어졌고, 피가 흩뿌려졌다.
“아아아악!”
월터가 비명을 내질렀고, 데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비명을 내지르지?”
촤아악!
다시금 ‘그림자 칼날’이 휘둘러졌고, 월터의 몸에서 피가 흩뿌려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것이 네가 말하는 ‘피로써 이룩한 발전’이 아니었나?”
비명 속에서 데일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피로써 굴러가는 법이라고 했지.”
다시금 무자비하게 그림자의 칼날을 휘둘렀고, 피가 튀었다. 알기 쉬운 즉사의 일격이 아니라, 철저하게 ‘고통’을 목적으로 휘둘러지는 잔혹한 악의.
“너의 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데, 기뻐해야 하지 않나?”
“아, 아아…….”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데일이 되물었다. 등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세피아의 존재마저 잊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애걸하는 월터를 향해, 다시금 그림자의 칼날이 휘몰아쳤다. 셀 수 없을 정도의 핏줄이 끝없이 그어지고, 또 그어지고, 그 위로 다시금 그어지며. 아이가 스케치북 위에 핏빛 크레파스를 마구잡이로 휘갈기듯이 피가 흩뿌려졌다.
“제, 제발…….”
고통 속에서 월터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주, 죽여줘…….”
피가 흐르고, 또 흘렀다.
그러나 염혈의 월터에게 알기 쉬운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끝없이 굴러갔고,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조소했다.
“죄 없는 이들의 희생과 피를 통해서 굴릴 수밖에 없는 수레바퀴 따위, 차라리 부서져 버리는 쪽이 낫다.”
수레바퀴의 파괴자가 말했다.
그의 앞에 있는 적색 마탑의 장로, 나아가 적색 마탑과 제국의 시대정신 그 자체를 부정하며.
촤아악!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가 그의 가슴팍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대로 그림자의 가시 촉수가 갈라지며, 파쇄기처럼 그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섀도우 러커’의 도륙 앞에서, 그러나 세피아는 그저 씁쓸하게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월터의 시체가 갈가리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비로소 그의 세계가 소멸했다.
어느덧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수정색의 동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