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 *
그로부터 얼마 후, 황립 아카데미.
3서클 최고 학부의 수업용 강당. 교대 위에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느 때의 4서클 교수가 아니었다.
“아, 모두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남자조차 넋을 잃을 것 같은 미색을 가진 적발의 미남자. 8서클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이자, 적색 마탑의 정점.
“……!”
적색 마탑주,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그곳에 있었다.
“오늘 하루, 평소의 교수님을 대신해 ‘저의 수업’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그 모습에 학부생들이 경악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 천하의 적색 마탑주가, 우리를 위해 수업을 해주겠다니! 이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을까.
“불과 얼마 전…….”
핏빛공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참으로 불미스럽기 그지없는 사태가 일어났지요.”
그날, 레너드 월터에게 벌어진 진실을 알고 있는 ‘3서클 최고 학부’의 학생들을 향해.
“…….”
데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려나.’
이 남자가 무엇을 바라고 데일을 이곳까지 불렀는지. 어째서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들로 자신을 습격하게 했는지.
“레너드 월터는 참으로 모두의 촉망을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학생 앞에서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지요.”
과장되게 어깨를 벌리며 핏빛공이 말을 잇는다.
“재능의 찌꺼기조차 갖지 못한 그깟 버러지 따위에게 말입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에, 일순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뭐, 아무래도 좋은 벌레들의 이야기는 이쯤 하지요. 아울러 제가 오늘 이곳에서 가르쳐줄 것은…….”
핏빛공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역사입니다.”
특유의 과장스러운 배우처럼 미소 지으며.
“이 중에서 혹시, 흑적 교도대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나요?”
통일 전쟁 당시, 흑색과 적색 마탑 사이에서 ‘학술적 탐구와 협력’을 위해 설립한 비공식 부대.
“제국의 통일 전쟁 당시…… 흑적(黑赤)의 두 마탑이 ‘하나의 목적’을 갖고 힘을 합친 유대의 상징이지요.”
일말의 가감조차 없는 흑적 교도대의 끔찍한 진실이, 핏빛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힘과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미명과 대의 아래, 응당 사람의 도리마저 저버린 그들의 잔혹한 실체가.
그렇게 흑적 교도대의 밝힐 수 없는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고, 악마조차 울고 갈 행적에 학생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까?”
핏빛공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색 마탑의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그깟 도덕 따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흑색공 역시 그대들과 같았습니다.”
“……!”
핏빛공이 말을 잇는다.
“알량하기 그지없는 도덕 따위에 구애받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求道)의 자세를 포기했지요.”
그것은 데일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종전 이후에도 제국이 비밀리에 그들 조직을 존속시키려 했다. 설령 그들이 악마의 부대라 할지라도 그들의 악행 속에서 손에 넣은 ‘학술적 성과’는 능히 그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데일의 아버지는 그의 의지로 흑적 교도대의 부대를 해체했다.
‘흑색과 적색의 유대’는 끝을 맺었고, 흑적 교도대의 기록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데일 공자님께서는 다릅니다.”
핏빛공이 고개를 돌린다.
“저는 데일 공자님의 재능과 활약에서, 진정한 ‘흑색 마탑주로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이곳에 있는 쓰레기들은 재능의 찌꺼기조차 갖지 못한 버러지들이지요.”
주위에 있는 학생들의 경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 비해, 이곳의 벌레들 따위와 비교를 불허하는 악마의 재능……!”
핏빛공이 말을 잇는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검은 공자’의 악명과 잔혹함에, 저는 무척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짐짓 과장되게 자신의 두 팔을 벌리며.
“공자님께서는 훗날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설 겁니다. 그리고 공자님의 뜻에 따라 흑색 마탑의 체제를 이끄시게 되겠지요.”
핏빛공이 물었다.
“부디 흑색과 적색의 새로운 유대를 위해 힘을 합치지 않겠습니까?”
핏빛공이 말을 이었다.
“저와 함께 ‘궁극의 힘과 진리’를 손에 넣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핏빛공이 바라는 것은 데일의 재능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흑색과 적색의 유대였다.
“…….”
데일이 침묵을 지켰다. 혹시라도 여기서 그의 대답을 거절할 경우, 핏빛공이 내릴 결정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생각하고 나서,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기에, 저의 아버지께서는 너무나도 정정하시군요.”
“아, 그것은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핏빛공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핏빛공이 손가락을 튕겼다.
딛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 뒤틀렸다.
핏빛공의 발밑을 중심으로…… 일찍이 레너드가 그랬듯이 ‘핏빛공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그것은 멋대로 폭주를 일으키는 참사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와 통제 아래에서, 고위 마법사가 펼치는 심상의 결계였다.
적색 마탑의 정점에 서는 마법사의 세계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덧 학생들의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핏빛공의 세계가 허락하는 것은 오직 데일 하나였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눈송이가, 흩날린다.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라 일컬어지는 남자의 심상 속에, 겨울의 눈송이가 흩날린다고? 데일이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았다. 이내 깨달았다.
그것은 냉기를 품고 있는 겨울의 상징 따위가 아니었다.
재(Ash)였다.
불길한 재가, 하늘을 뒤덮고 흩날리고 있었다.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돌리고 나서, 숨을 삼켰다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폐허와 잿더미가 그곳에 있었다.
부서진 고층 빌딩의 잔해들. 찌그러진 자동차들. 마치 핵겨울이 찾아온 뒤의 풍경처럼──.
잿더미가 되어 있는 도시의 폐허가 펼쳐져 있었다.
“……!”
“참으로 경이롭고 멋진 세계지요.”
폐허가 되어 있는 이계의 풍경을 뒤로하고, 핏빛공이 말했다. 그 저의를 알지 못하는 데일이 시치미를 떼고서 침묵을 지켰다.
“이 세계에는 대륙의 어느 석조 길드조차 흉내 내지 못할 강철의 탑을 거리 곳곳마다 세우고, 강철의 용들이 저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불꽃 마법을 내뿜고 있었지요.”
그대로 핏빛공이 고개를 돌렸고, 몇 대의 전폭기(戰爆機)가 하늘을 갈랐다. 머지않아 지평 너머에서 빛이 휘몰아쳤다.
핵 폭격이었다.
일대를 집어삼키는 소멸의 불길이 휘몰아쳤고,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것을 두고서 강철의 용이 펼치는 불꽃 마법이라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착각이었다.
그대로 핵폭발이 휘몰아치고 나서, 세상을 찢을 것 같은 절규가 울려 퍼졌다. 지평 너머에서도 목격할 정도의 거체가 몸을 일으켰다. 하나하나가 지름 수 킬로미터에 범접하는 촉수들이 미친 듯이 날뛰다, 비로소 침묵에 빠졌다.
“저 거신(巨神)들조차 굴복시키는 이 위대한 불과 강철의 제국을 보십시오.”
핏빛공의 말에, 데일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저것이야말로 우리 마법사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궁극의 힘과 진리입니다.”
“그것을 위해 이계의 용사를 불렀습니까?”
“그 존재는 터무니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데일이 조심스럽게 되물었고, 핏빛공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병사로서 제법 쓸모는 있었으나, 위대한 불과 강철의 제국이 가진 진리의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병졸(兵卒)에 불과했죠.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진리 같은 것은 무엇 하나 없었습니다.”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계의 용사가 아니라, 바로 그의 앞에 있는 제국 제일의 적마법사였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그럼에도 형용할 수 없는 증오 속에서, 데일의 가슴을 가득 메우는 것은 하나의 확신이자 희열이었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앞에 있는 데일이, 바로 그 불과 강철의 제국이 가진 진리를 계승하고 있는 존재임을.
핏빛공은 이계의 용사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진리가 무엇 하나 없다고 믿었다.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세계로 끌려와 다짜고짜 ‘강철의 용이 보여준 불꽃 마법’을 영창하라며 다그치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 세계에 마법이 존재하며, 그것이 심상(心想)에 실체를 부여하는 힘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법사로서 깨달음을 손에 넣은 데일에게, 핵무기의 사상을 투영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시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 제의를 위해 저를 여기까지 부르신 겁니까? 다시금 흑적의 유대를 통해 궁극의 힘과 진리를 얻고자?”
“그렇습니다.”
데일의 말에, 핏빛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니 부디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생각해 주시지요. 아, 설령 흑색공의 사후라 할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
“저에게 있어 시간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니까요.”
그 말과 함께 핏빛공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니, 튕기려고 했다.
“참, 그러고 보니.”
핏빛공이 깜빡했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염혈의 월터 공께서 공자님에게 무척이나 이를 갈고 있는 모양입니다.”
“……!”
“그 역시, 일찍이 흑적 교도대의 부대장 중 하나였지요.”
정말로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아울러 폐하께서는, 흑적 교도대의 ‘진짜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하나라도 줄어들기를 바라신답니다.”
폐하. 그 이름에 다시금 데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감정의 동요는 찰나에 불과했다.
흑적 교도대의 진짜 진실.
핏빛공이 학생들의 앞에서 해준 이야기는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 고작 ‘잔혹한 생체 실험 따위’에 전전긍긍하며 입막음을 할 제국이 아니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탑의 장로를 직접 처치하기에는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말이지요.”
흑적의 교류를 위해 황도에 체류하고 있는 흑색의 후계자를, 적색 마탑의 장로가 습격하는 것.
그 행위가 갖는 무게를 이해하지 못할 자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래입니다.”
“…….”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대로 황도를 떠나셔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거래를 수락하실 경우.”
그렇기에 핏빛공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기꺼이 그에 맞는 보상을 지불하리라 약속하지요.”
그 말을 끝으로 핏빛공이 손가락을 튕겼다. 잿더미가 되어 있는 도시의 풍경이 소멸했다.
핏빛공의 세계가 사라지고, 어느덧 학생들이 있는 아카데미의 강당에 있었다.
“그럼 다시 뵙도록 하지요.”
핏빛공이 등을 돌린다. 강당에 남겨진 데일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척이나 길고 고적한 침묵이었다.
* * *
그날 밤, 황도 교외에 있는 흑색공의 저택.
일찌감치 호위 기사들을 물리고, 핏빛공과의 거래를 이행하기 위해 데일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핏빛공이 보여준 세계를 떠올렸다.
잿더미가 되어서 스러진 도심의 폐허. 마치 핵겨울이라도 찾아온 뒤의 풍경을 보는 듯한 멸망 이후의 세계.
“…….”
데일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느닷없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폭발조차 데일의 상념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저 침대 위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킬 따름이다.
처음부터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데일!”
동시에 6서클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피아 님…….”
데일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 있었나, 작센의 빌어먹을 애송이.”
그리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고개를 돌린다. 일찍이 유리스 후작의 예고대로, 이를 갈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감히 내 아들을 그 꼴로 망쳐버린 작센 가의 애송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저택의 폐허를 뒤로하고, 적색 마탑의 장로이자 6서클의 적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염혈의 월터.
바로 그가,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적색 마력을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실소했다.
자기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그가 우스워서.
나비가 거미줄에 걸렸고, 먹잇감을 잡아먹기 위해 거미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물러서거라.”
세피아가, 데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정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6서클의 엘프 마법사이자 청색 마탑의 장로로서.
“약속하지 않았느냐.”
데일을 향해 등을 보이며, 세피아가 대답했다.
“너를 지켜주겠다고.”
세피아가 대답했다. 여섯 개의 서클을 가속하며, 비로소 데일을 지키기 위한 전력을 발휘하며.
“청색 마탑의 장로가 작센 가에 의탁했다더니, 이야기가 사실이었군.”
그 모습을 보며 염혈의 월터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좋다. 핏빛공께서 허락하신 이상, 누구도 내 앞을 가로막지 못할 테니.”
그 말을 듣고 데일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버려진 장기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의 처지가 너무나도 우스워서.
“걱정하지 마라, 데일.”
“……고마워요.”
세피아가 입을 열었고, 데일은 그저 미소 지었다.
적청(赤靑)의 두 고위 마법사가, 비로소 자신들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