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그날 밤, 황도에 있는 작센 공작의 저택.
‘겨우 애송이들 구경이나 시켜주려고 나를 여기까지 불렀나?’
며칠의 어처구니없는 소요 끝에, 침실에서 가부좌를 틀며 데일이 생각했다.
겨우 그깟 이유로 핏빛공이 자신을 황립 아카데미에 초청했을 리가 없다. 그날, 작센 강에서 데일의 기병대를 습격한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육체를 불사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광신자들.
그에 비해 황립 아카데미의 귀족 자제들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풋내기들이었다. 자신들이 적색 마탑의 마법사, 나아가 제국의 엘리트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겠지. 마탑의 꼭두각시 신세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세상 물정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데일.”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세피아 선생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자신의 침실에 들어오겠다고 말하는 세피아의 말에, 데일이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다.
“들어오세요.”
그 즉시,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과 함께.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서는 세피아를 보며, 데일은 그대로 숨을 삼켰다.
새하얀 실크에 검고 어두운 레이스 장식을 수놓은 나이트가운 차림. 수정색 머리카락이 물기를 따라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실크 자락 사이로 백옥처럼 하얗고 고운 피부가 흘끗 엿보였다.
“……흠, 흠.”
넋을 잃고 있는 데일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세피아가 짐짓 얼굴을 붉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는데, 그, 마땅히 입을 의복이 없더구나.”
짐짓 과장스러운 헛기침 끝에, 세피아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우모(羽毛)를 가득 채운 이부자리 위로. 데일의 바로 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소 어색한 침묵이었다.
“……황도까지 함께 해주셔서 고마워요.”
침묵 끝에, 데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제야 세피아 역시 평정을 되찾은 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카데미의 수업은 마음에 들었느냐?”
“세피아 선생님의 가르침에 비할 바가 아니죠.”
데일이 짓궂게 미소 지었고, 세피아 역시 상냥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날.”
정적을 깨트린 것은 세피아의 쪽이었다.
“기사들을 잃고 슬퍼하는 너의 표정을 보았다.”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퓨리파이어들에게서, 제대로 너를 지켜주지 못했다.”
비록 오크 기수들을 향해 냉기의 폭풍을 일으키고 나아가 청색 불협화음을 울려 퍼지게 했어도, 그날의 세피아는 어디까지나 ‘데일을 아슬아슬하게 지킬 정도의’ 역량밖에 발휘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6서클의 엘프 마법사로서 보여줄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기에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지켜주셨고, 작센의 검들을 잃은 것은 제 실책이니까요.”
“아니다.”
그러나 세피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네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젓고 나서,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것은 그저 너 하나를 지켜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
그대로 어린 데일의 손을 맞잡는다.
“나는 그저 네가 슬퍼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란다.”
“세피아 선생님…….”
스노우 엘프의, 세피아의 따스한 온기가 손에서 손을 타고 느껴졌다.
“이토록 어린 네가, 어째서 그토록 허무하고 공백으로 가득 차 있는 사상의 세계를 가졌는지, 필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
두 명의 마법사가, 서로의 세계를 교감하고 공명을 일으킴으로써……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데일의 세계와 접촉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애틋함과 사랑스러움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세피아는 데일을 긍정해 주었다.
그야말로 아가페(Agape)에 가까운 사랑의 형태로서.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이 아이의 세계를 마주하고, 처음으로 각오한 ‘사명’이었으므로.
* * *
그 시각, 월터 궁정백의 저택.
레너드는 홍등가에서 술에 취해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그러나 그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향하는 곳은 그렇지 않았다.
“레, 레너드 공자님!”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월터 가의 집사장을 향해, 레너드가 소리를 높였다.
“시끄러, 이 영감탱이 새끼야!”
“하, 하오나 백작님께서 지하의 출입을 엄금하시고…….”
“백작 가의 장남이 가겠다는데 네깟 새끼가 뭐라고 내 앞을 막아?”
집사장의 애걸을 뿌리치고, 레너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일찍이 적색 마탑의 장로, 염혈의 월터가 그의 ‘아티팩트’를 수납하고 있는 지하의 일실을 향해. 월터 궁정백이 집사장에게 맡겨놓은 열쇠를 강제로 빼앗으며.
오늘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데일의 표정을 떠올린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작센의 데일에게 있어, 레너드 월터는 ‘의식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빌어먹을 애새끼에게 보여줘야 해…….”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취기의 힘을 빌린 레너드가 소리쳤다.
“이 내가, 레너드 월터가 바로 제국 제일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란 사실을…….”
며칠 전, 작센 가의 공자가 보여준 것은 결코 그의 재능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티팩트의 힘’을 빌린 결과에 불과하다. 그렇다. 레너드와 데일의 차이. 그것은 절대로 재능의 차이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 바로 아티팩트의 여부다.
그렇기에 레너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재능이 부족한 자가 아티팩트를 쥐게 될 경우, 스스로 감당하게 될 피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 * *
이튿날, 황립 아카데미의 3서클 최고 학부를 위한 강당.
“머지않아 다가올 졸업 시험을 위해, 괴물 사냥꾼들이 시험에 쓸 ‘괴물’들의 포획을 마쳤다는 모양이네.”
몇 주가량을 남겨두고 있는 황립 아카데미의 졸업 시험.
데일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황도에 체류하고 있는 사이에 ‘졸업 시험’이 치러질 경우, 데일 역시 시험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딱히 걱정할 것도 없겠지.’
일개 3서클 마법사를 위한 시험 따위에 고생할 그가 아니다. 그저 데일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어젯밤 세피아가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란 결국 ‘데일의 세계’와 공명하며 느끼는 감정의 미혹(迷惑)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데일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피아가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으니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이, 데일에게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다.’
생각 끝에, 데일이 미혹을 떨치듯 고개를 돌린다.
레너드가 그곳에 있었다.
“…….”
여느 때와 달리, 불길할 정도로 묵묵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레너드가.
‘이제야 철이 좀 들었나?’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은 딱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의미에서, 천재가 범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 * *
그날 오후, 졸업 시험에 대비해 마법 결투의 모의 수업이 이루어졌다.
수업의 첫 주자는 레너드 월터였고, 불행하게도 그의 상대가 된 것은 3서클의 어느 학부생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정도로 열등하지도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고, 그저 레너드의 통치 아래 복종하는 일개 학부생. 그리고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는 교수는 내심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의 일’ 이후, 레너드의 상태가 묘하게 이상했다.
확실하게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폭군처럼 황립 아카데미에 군림해야 할 그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교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불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철이 들었을 따름이라고 넘겨짚는 데일과 달리, 레너드 월터란 학생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 그, 그럼…… 레너드 군과 발러 군의 결투를 시작하겠네.”
교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존재. 엄밀히 말해, 레너드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비록 그의 재능이 자신보다 아득히 앞서 있다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3서클과 4서클의 벽이 있으니까. 교수의 두려움은 어디까지나 그의 뒤를 봐주는 적색 마탑의 장로…… ‘염혈의 월터’를 향하는 것이었다.
적색 마탑의 장로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레너드 이상의 폭군이었으니까.
자신 같은 일개 4서클 마법사 따위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적탑의 지배자들.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마법의 불꽃이 타올랐다.
“야.”
바로 그때였다. 레너드가 그의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법을 쓸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팔을 뻗어 데일을 가리키며.
“작센의 애송이를 향해 공격 마법을 써.”
“레, 레너드? 그게 갑자기…….”
“이대로 내 마법에 맞아 죽을래?”
뜻밖의 상황에, 학생의 표정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레너드가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의 손을 따라 휘몰아치는 핏빛 마력을 가공하며.
동시에 마지막까지 직접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 것이, 그의 비열하기 그지없는 처세를 보여주는 증명이리라.
“레, 레너드 군!”
“입 닥쳐, 재능 없는 영감 새끼야.”
그 모습에 교수가 당혹과 함께 소리를 높였고, 레너드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이 60을 처먹도록 4서클에서 빌빌대고 있는 새끼가, 어디서 입을 나불거려?”
“레, 레너드 군……!”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기 전에,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지금 나보다 저 애새끼가 두렵다는 거야? 응?”
레너드가 다시금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레너드 월터가 아니라, 저 빌어먹을 애새끼가 더 무섭다는 거지? 그렇지?”
이곳에 있는 3서클 최고 학부의 일동을 향해서.
“당장 저 애새끼를 향해 마법을 쏴!”
레너드가 다시금 소리쳤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휘몰아치는 핏빛 마력이 불꽃의 형태를 이루었다. 결코 일개 3서클 마법사의 그것이라고 볼 수 없는 홍염(紅焰).
‘아티팩트……!’
“다들 물러나!”
데일이 소리치기 무섭게, 레너드의 발밑 일대에서 화염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4서클 교수조차 감히 어찌할 엄두를 낼 수 없는 불꽃이다. 바로 그 불꽃을 향해, 데일이 그의 ‘청색 마력’을 내리꽂았다.
시린 냉기와 잿빛으로 가득 찬 공백의 세계, 바로 그 겨울밤의 냉기로 이루어진 마력을 투영하며.
그것은 설령 아티팩트의 힘을 빌어도, 일개 수재(秀才)의 불꽃 따위가 감히 저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불꽃이 가라앉았다.
“하, 하하…….”
덧없이 사그라지는 불꽃을 보고, 레너드가 힘없이 웃었다.
“그래, 드디어 내 결투 상대가 나타났네.”
자조의 웃음이 아니었다.
“제국 제일의 재능을 가리는 싸움을 시작해 볼까?”
레너드가 웃음 끝에 되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 역시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요즘 애새끼들 사춘기는 스무 살이 넘어서 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