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 *
“음료가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유리스 후작이 되물었다. 피가 가득 담겨 있는 유리잔을 홀짝이며.
“유, 유리스 님? 이게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려우십니까?”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죽음이 두렵습니까?”
“제, 제발……!”
“아, 부디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핏빛공이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바둥거리는 엘리자베스의 목덜미를 향해.
콰직!
어느덧 뾰족하게 솟은 핏빛공의 송곳니가, 엘리자베스의 목덜미를 탐하고 있었다.
“죽음이란 축복입니다.”
입맞춤 끝에, 유리스 후작이 거리를 벌린다.
“화려하게 피어나고, 아름답게 스러지는 꽃잎과 같지요.”
어느덧 핏빛공의 앞에 있는 것은 미모의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흡사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그에 비해 죽음이 없는 불사(不死)의 삶이란…….”
엘리자베스의 시체를 뒤로하고, 핏빛공이 말을 이었다.
“참으로 덧없고 공허하며, 무의미로 가득 차 있는 법이지요.”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과 일그러진 쾌락 속에서.
“평생 피어날 일이 없는 잡초와 같이.”
홀로 나지막이. 무척이나 덧없는 목소리였다.
* * *
얼마 후, 작센 공작의 집무실.
“저를 황도로 보내주십시오.”
“너무 위험하다.”
데일의 당돌하기 그지없는 요청에, 흑색공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마족 대이동에 맞서 활약한 작센 공작 가와 ‘검은 공자’의 업적을 치하하고, 두 마탑 사이의 교류를 위해 데일을 적색 마탑의 아카데미에 초청하겠다는 황실의 메시지.
볼 것도 없이 적색 마탑주, 유리스 후작의 입김이 닿았으리라.
“제 발로 사지를 향해 걸어 들어가겠다는 것이냐?”
“유리스 후작의 아들 역시, 교류를 위해 흑색 마탑에 체류하겠다고 했지요.”
적색 마탑의 제의는 어디까지나 쌍방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의 형태였으니까.
“우리 측에서도 적색 마탑주의 후계자를 볼모로 데리고 있는 이상…….”
그렇기에 데일이 말을 이었다.
“상대도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퓨리파이어들의 습격을 벌써 잊어버린 것이냐?”
“황도에서, 그것도 ‘적색 마탑의 아카데미’에서 흑색공의 후계자에게 손을 대려 할 경우…… 그 행위가 가지고 올 파급력을 핏빛공 역시 모르지 않을 겁니다.”
사색 마탑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나아가 제국 전체를 휘말리게 할 전란의 기폭제가 되겠지.
흑색 마탑의 후계자 하나가 죽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마탑 역시 적색 마탑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하니까.
“게다가 제국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니까요.”
적어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러하리라.
“…….”
데일의 말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나무랄 데가 없는 정답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당장 데일을 제거하고, 작센 가를 상대로 총력전(Total War)을 펼칠 정도의 여력은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이 펼쳐질 경우, 제국에 등을 돌리는 제후들은 결코 작센 공작 가 하나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퓨리파이어들의 습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아마도…….”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저를 정말로 제거하려고 마음먹었을 경우, 고작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테지요.”
“흐음.”
“적색 마탑은 그저 저와 아버지를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시험이라.”
흑색공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렷다.
참으로 그 말대로다. 시종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데일 쪽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로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으므로.
“그럼 달리 황도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이라도 있는 것이냐?”
“제 눈으로 제국이란 나라를 직접 둘러보고 싶습니다.”
이곳 북부의 영지나 교황령 따위가 아니라.
“그리고 적색 마탑이 도발을 걸어오는 이상, 응당 그에 맞는 화답을 해줄 필요가 있겠지요.”
제국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그곳, 황도에서. 제국의 ‘시대정신의 집행자’라 일컬어지는 적색 마탑을 상대로.
“……참으로 너의 생각을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데일의 말에, 작센 공작이 나지막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저 아버지와 저, 그리고 작센 가를 위해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쓴웃음 앞에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여느 때와 같은 두 부자의 대화였다.
* * *
제국의 황도, 그리고 적색 마탑.
적색 마탑 부속의 황립(皇立) 아카데미는, 일개 마탑의 아카데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당장 규모나 커리큘럼부터 여타 마탑의 그것과는 감히 비할 수 없으며, 제국 제일의 엘리트를 양성하고, 귀족 자제들 사이의 사교와 치열한 물밑 암투가 벌어지는 장.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적색 마탑의 마법사가 되는 것은, 제국 귀족들에게 있어 출세의 보증 수표 그 자체였다.
모두의 촉망을 받는 제국의 엘리트.
그렇기에 제국 유수의 재능을 가진 귀족 자제들이 황립 아카데미에 모여들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열기 역시 치열하기 이를 데 없다. 당장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과정 자체도 타 마탑의 그것과는 비교를 불허하니까. 설령 3서클의 경지에 도달해도 적색 마탑의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상,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졸업 시험을 몇 주 가까이 남겨두고 있는 시기.
제국 제일의 천재,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이 도착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가장 치열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바로 그 시기에.
* * *
황제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칩거 끝에 벌써 몇 해가 지났다.
그렇기에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이 황도에 도착했을 때,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수들을 필두로 하는 행차가 황도의 거리를 가로질렀고, 데일을 맞이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대행자들이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유리스 후작을 필두로 하는 황제파 귀족들. 하나같이 돼지기름 냄새가 날 것 같은 추악한 몰골이다.
“작센 가의 공자님이,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비릿한 웃음과 아첨.
뱀의 혓바닥 사이에서, 적발의 미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그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유리스 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센 가의 공자님.”
적색 마탑주의 정점에 군림하며, 핏빛공의 별명을 손에 넣은 남자.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대륙 제일의 적마법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요! 저야말로 무리한 제의에 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저야말로 적색 마탑주님의 초청에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족 대이동에 맞서, 공자님이 보여주신 활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데일이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고, 유리스 후작이 다시금 미소 지었다.
“학자로서의 탐구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전장의 투사가 되기를 자처하는 그 용맹함! 제국 전체에 도무지 그칠 줄을 모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무용담이지요.”
“…….”
그러나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날, 작센 강의 상류에서 데일의 기병대를 습격한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들을 떠올리며.
바로 이 남자다.
이 남자가, 마족과 손을 잡고 적색 마탑의 퓨리파이어들을 침투시켜…… 데일과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들을 바로 그 불꽃 속으로 이끌었다.
그날, 화염 속에서 잿더미가 되어 스러진 자신의 기사들을 떠올렸다.
가볍게 입술을 악물고 나서, 데일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가슴속의 증오를 싸늘한 냉기 속에 감추며.
“호사가들의 바람을 타고 ‘검은 공자’의 무용담이 들려올 때마다,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과장되는 법이지요.”
“아, 그럴 리가요.”
유리스 후작이 당치도 않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희고 가느다란 치아를 흘끗 드러내며.
“제국 제일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그 재능……! 공자님이 아카데미에서 보여주실 재능이 벌써 기대되네요.”
“작센의 데일, 삼가 황실의 사람들을 뵙습니다.”
여느 때처럼 곁을 지키는 베일 경과 엘프 마법사 세피아를 뒤로하고, 데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진한 11살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장하며, 당장에라도 데일을 집어삼킬 듯한 악의(惡意)의 밑바닥에서.
* * *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이 ‘적색과 흑색의 교류’를 위해 적색 마탑의 황립 아카데미에 초청되었다.
그것도 졸업 시험을 몇 주가량 남겨두고 ‘3서클 최고 학부’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황립 아카데미의 귀족 자제들이 받은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센 공작 가의 어린 장남, 데일.
고작 11살 나이에 3서클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탑의 시험에서 20계층을 돌파했다. 게다가 ‘검은 공자’의 재능이란 그저 마법 하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흑백 회전을 승리로 이끌고, 마족 대이동을 저지하며 오크 워보스를 쓰러뜨릴 정도의 지략과 무력마저 겸비하고 있는 제국 제일의 천재.
호사가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떠들고 있는 검은 공자의 명성을, 그들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황립 아카데미의 최고 학부. 제국 유수의 재능을 가진 귀족 자제들이 모여드는 곳이자, 그들이 엘리트 마법사로서 걷게 될 출세 가도의 시작점.
그 까닭에,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갖는 프라이드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처지에서 보기에, 데일의 명성이란 그야말로 과장 끝에 부풀려진 허황(虛荒) 그 자체였다.
제아무리 흑색 마탑주의 후계자라고 해도, 고작 11살짜리 애송이다. 그것도 북부 벽지의 흑색 마탑 출신 따위가, 애초에 정말로 3서클의 경지를 이루기는 했을까? 설령 3서클이라고 해도, 그것이 ‘수행을 통해서 착실하게 쌓아 올린 서클’이기는 할까? 서클의 회전수는 얼마나 될까? 아마 100rpm조차 되지 못하겠지.
탑의 시험 역시 그럴 것이다. 흑색 마탑주의 아들이란 이유 하나로, 볼 것도 없이 특혜를 받았으리라. 나아가 흑백 회전의 승리와 마족 대이동을 저지한 일화 역시, 사실상 작센 가의 기사들이 쟁취한 승리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작센 가의 명성’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억지로 부풀린 거짓 명성이 틀림없다.
그것이 아카데미의 학부생 대다수가 갖는 생각이었다. 아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콧대 높은 그들이 보기에, 데일의 재능이란 차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과 같았으니까.
역으로 호사가들이 떠들어대는 ‘검은 공자’의 재능이 진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고작 11살 어린아이의 재능 앞에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다.
제국 제일의 엘리트로서 갖는 프라이드.
그렇기에 ‘검은 공자’의 재능을 긍정하는 것은 곧 그들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고, 그들의 자부심이 깨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