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 *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핏빛공’ 유리스 후작의 침실에서 시트로 몸을 가린 엘리자베스가 미소 지었다. 그야말로 꿈에 그린 듯한 이상의 왕자님이었다.
“좋은 꿈을 꾸셨습니까?”
홍조를 붉히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유리스 후작이 되물었다. 손에 들린 핏빛 포도주를 몇 모금 홀짝이며.
엘리자베스가 황홀감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스 후작이 입을 맞추었다. 입에서 입을 타고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핏빛 포도주……?
바로 그때, 입속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엘리자베스가 숨을 삼켰다. 포도주의 맛이 아니다.
“……!”
그것은 피였다. 엘리자베스가 그대로 입에 물고 있는 피를 뱉어냈다. 그녀가 휘감고 있는 백색의 시트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 이런.”
그 모습을 보며 유리스 후작이 차갑게 웃었다.
“음료가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소름이 끼칠 것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 * *
기사와 마법사와의 싸움은 거리가 생명이다.
그러나 방금 데일이 그림자 망토를 통해 보여준 그 모습…… 어둠의 호수, 그리고 그 호수 속에 잠들어 있는 끔찍한 피조물들.
《섀도우 러커》의 가시 지옥.
데일의 그림자 피조물이 기사와의 백병전에서 가질 이점이란, 감히 헬무트 경조차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유리해야 할 기사가, 제 발로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행위니까.
아울러 ‘거리의 여부’가 전투에 미치는 영향력을 배제할 경우, 기사와 마법사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누구일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리라.
“데일 공자님께서 승리하셨다!”
그렇기에 데일의 승리를 외치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헬무트 블랙베어 경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그림자 망토를 택하셨나?’
자기 자신의 역량을, 나아가 전투의 이치를 100% 통달하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행위. 이해나 앎의 영역조차 아니다. 통달(通達)이다.
그야말로 자신이 전투의 신이라도 되는 듯이.
고위 흑마법사들이나 가능한 ‘흑검의 데스나이트’를 일으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육체 하나를 갖고 오크 워보스와 싸워 승리할 정도의 전투 능력에 이르기까지.
검과 마법에 있어 제국의 누구도 비할 바 없는 재능과 성장 속도를 바탕으로…….
‘공자님께서는 지금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계시다.’
자신의 약점을 보충하고, 강점을 강화하고 있다. 일체의 요소들이 맞물리며, 완벽에 가까운 하모니를 자아내듯.
기사를 상대로 육체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동시에 마법사를 상대로 사상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제야 헬무트 경은 깨달을 수 있었다.
데일이 추구하는 것은 가장 완벽한 전투의 형태였다.
처음부터 ‘최강의 기사와 마법사’를 상대로 상정하고, 어느 하나의 싸움에서도 절대 패배하지 않겠다는 듯이.
대륙 최강의 일곱 기사, 칠검(七劍)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살육의 괴물’ 헬무트 블랙베어 경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는 살육의 재능.
그리고 도대체 저 아이가, 그토록 자신의 전투 능력을 갈고닦으며 도달하고자 하는 상대는 누구일까.
감히 ‘검은 공자’의 적의를 감당할 존재가 있을 수는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헬무트 경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저 순수하게 데일의 승리를 축하해줄 때였으므로.
* * *
마족 대이동.
오크 무리의 대규모 남하를 저지하며, 전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비록 그 규모가 일찍이 고위 마족이나 마왕의 군세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수천 마리의 오크들에 맞서 제국을 지키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가 더해진 적들을 상대하기란 더더욱.
작센 공작의 집무실.
“퓨리파이어들의 뇌를 끄집어내고, 삼일 밤낮에 걸친 조사를 끝마쳤습니다.”
흑색 마탑주의 비서, 에리스가 말을 이었다.
“달리 성과는 있었나?”
“이미 기억 소거 마법을 비롯해 뇌 기능 대다수를 제거한 뒤였습니다.”
“그렇겠지.”
흑색공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색 마탑의 적마법사들이 갖는 광신이란 오색 마탑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끄덕이고 나서, 흑색공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데일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별도로 행동할 거란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사전에 이쪽의 내부자가, 퓨리파이어들에게 데일의 행보를 비롯한 구체적 명령을 내렸겠지.”
“달리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진리의 괴물들이다.”
흑색공이 대답했다.
“……흑탑의 강경파 장로들이 적탑과 내통하고 있다는 겁니까?”
“흑적 교도대(黑赤·敎導隊)의 활약을 벌써 잊어버렸나?”
흑적 교도대. 제국의 통일 전쟁 당시, 흑색과 적색 마탑 사이에서 ‘학술적 탐구와 협력’을 위해 설립한 비공식 부대.
비록 종전 이후 부대가 해체되고 기록이 말소되었으며, 아울러 흑색공 체제의 흑색 마탑은 ‘구시대의 어둠’과 결별을 택했다.
그러나 흑색 마탑의 모두가 그의 방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비록 흑색공의 앞에서 거부의 뜻을 나타내지는 못해도, 당시 흑적 교도대의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마저 진리의 과정으로 긍정하는 강경파들. 바로 그 괴물들이, 흑색공의 체제를 거부하고 적색 마탑과 손을 잡은 것이다.
“또다시 숙청의 바람이 불겠네요.”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이 남자 역시, 결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 * *
흑색공의 지하 공방.
육체의 형태를 오롯이 유지하고 있는 밤까마귀 기사들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죽어서도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작센 가의 가주들이 대대로 쌓아 올린 업의 일부가 되기를 기다리며.
바로 그 기사들의 시체를 앞에 두고, 작센 가의 두 부자(父子)가 있었다.
“저의 기사들이었습니다.”
데일의 기사들. 데일이 지키지 못한 작센의 검.
“저는 주군으로서…… 그들의 바람에 보답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데스 오더’를 일으킬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데일이 입을 열었다.
마력의 지속 공급 없이 데스나이트를 유지하는 작센 가의 비의.
그러나 그들의 진가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데일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결코 보통의 데스나이트가 아니란 사실을.
하나하나가 바스커빌의 베일 경, 순결검 밀바스 경과 같은 ‘고위 기사’의 경지를 가진 고위 데스나이트.
“…….”
흑색공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 오크 워보스 앞에서 데일이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며…… 데일의 재능이, 일찍이 흑색 마탑의 뿌리 깊은 어둠과 결합했을 때의 풍경을 떠올렸다.
데일이 훗날 그를 대신해 또 하나의 ‘작센 공작’이 되고,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게 되었을 때. 그조차 벗어날 수 없는 그 어둠으로부터, 이 아이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훗날 성장한 네가 나를 넘어서고…….”
생각 끝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흑색 마탑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저 아직은 때가 아니란 듯이.
“이 어둠의 군세는 오롯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데일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 있는 자. 바로 그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쓰러뜨리는 것.
그 말에, 데일이 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버지.”
“왜 그러느냐.”
“지금 이 자리에서, 감히 스승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데일의 앞에 있는 ‘흑색공’이란 남자의 벽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까닭에.
“좋다.”
흑색공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데 있어, 결투처럼 확실한 방법도 없을 테니까.
“무엇으로 승부를 치르겠느냐?”
“저의 전력을 다하게 해주십시오.”
발밑의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데일이 말했다.
“마음껏 전력을 다하거라.”
흑색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작센의 흑검(黑劍)들이여.”
데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데스나이트를 일으키기 위한 최적의 영창을 읊조리며.
죽어야 할 기사들이, 그들의 기사 검을 고쳐 잡고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작센의 흑검, 칠흑빛 오러 블레이드를 쥐고서.
“주문이 무척 깔끔하구나.”
확실하게 심상을 그리며 암시를 주되, 너무 길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그 모습을 보고, 흑색공이 스승으로서의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죽음의 기사들. 하나하나가 데일의 흑색 마력, 나아가 검의 경지마저도 오롯이 투영하고 있는 데스나이트들이다.
바로 그 기사들의 검에서, 일찍이 신검을 쓰러뜨린 용사의 무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일이 그림자 망토를 펄럭이며 ‘어둠의 호수’를 펼쳤다. 그림자의 홍수가 일대를 수몰시키고, 발밑의 물결을 따라 ‘섀도우 러커’들이 일제히 가시 촉수를 내리꽂았다.
지하 공방의 발밑에서, 사방에서, 흑색공의 목숨을 노리고 필살의 일격들이 쏟아졌다. 일말의 배려나 가감조차 없이.
바로 그때였다.
세계가 정지했다.
정확하게는……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데스나이트의 흑검과 섀도우 러커들의 가시 촉수가, 그대로 정지했다. 멈추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데일에게 악의의 총구(銃口)를 돌린다.
“……!”
자신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데스나이트, 심지어 ‘섀도우 러커’들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와 같다. 일찍이 데일이 탑의 시험에서 ‘헤들리스 나이트’를 굴복시켰듯, 더더욱 커다란 어둠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다.
“흑마법사들 사이의 결투에서, 피조물의 제어를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흑색공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
그렇기에 데일이 다시금 의식을 집중했다.
시린 냉기와 잿빛으로 가득 찬 공백의 세계를 떠올리며, 바로 그 겨울밤의 어둠으로 이루어진 흑청의 마력을 투영했다.
멈추어야 할 데스나이트의 흑검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힘겹고 뻣뻣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흑색공의 목’을 향해서.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제어하고 있는 데스나이트를, 다시금 데일의 통제 밑으로 되돌린 것이다.
“……!”
그 모습 앞에서는 천하의 흑색공조차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후우웅!
경악과 동시에 데스나이트의 흑검이 휘둘러졌다. 잘린 목이 맥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침묵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데일이 당황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참으로 놀랍구나.”
아니나 다를까, 잘려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흑색공의 목이 입을 열었다.
“설마 나에게서 망자의 통제를 되돌릴 줄이야.”
마치 B급 호러 영화의 그것처럼.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었다.”
스승의 여유를 가지고, 제자의 모습에 흐뭇함을 감추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데일이 놀라서 숨을 삼켰다.
어느덧 흑색공의 목이,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부터 ‘목이 잘린 사실’ 따위는 없다는 듯이. 그때와 같았다. 일찍이 데일을 습격한 퓨리파이어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그때처럼.
“도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깨닫고 데일이 되물었다. 천하의 자신조차 도무지 그 이치를 파악할 수 없는 속임수. 속임수? 아니다.
이것은 속임수 같은 알량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아니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내가 네놈들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하나의 가능성에 데일이 숨을 삼켰다.
‘현실 조작……?’
마법이란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란 무척이나 불완전해서, 절대로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마도의 정점에 이르러 있는 존재들의 경우. 가령,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라 일컬어지는 남자의 경우,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의 이치 그 자체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예를 들어, ‘죽음의 개념’ 그 자체를 지워버린다거나.
그 사실을 깨닫고 데일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데일이 제국 제일의 천재로 거듭나, 터무니없는 성취를 손에 넣었음에도 다를 것은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가 전력을 다할 경우, 승패가 결정 지어지는 데에는 찰나로 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검은 공자’의 위명이 그러하듯, 제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남자의 이름 역시 결코 허명이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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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후, 마족 대이동을 저지한 작센 가를 치하하기 위해 황제의 사람이 도착했다.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천금(千金)의 하사품과 더불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족 대이동에 맞서 빛나는 활약상을 보여준 ‘검은 공자’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치하하고자.
나아가 ‘흑색과 적색 사이의 교류’를 위해, 황도에 있는 적색 마탑의 아카데미에서 몇 주가량 데일을 초청하고 싶다는 덧붙임과 함께.